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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한반도 칼럼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 그들은 ‘똥간나 새끼’로 살았다

by gino's 2014. 7. 28.


 

ㆍ정전협정 61년 맞아 되짚어 보는 국군포로 4만여명… 남쪽선 ‘외면’ 북쪽선 ‘학대’ 남북정치에 희생돼 철저히 잊혀진 존재로

“한국군을 1만명 이상 섬멸하라.” 마오쩌둥이 격노했다. 정전협정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6월18일 새벽, 이승만 정부가 기습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하자 특별명령을 내린 것이다. 마오는 “정전협정 조인을 반드시 늦춰야 하며, 언제까지 미룰지는 상황 전개를 보아 결정할 수 있다”는 명령을 덧붙였다.

한국전쟁 중 국군의 7대 패전의 하나로 불리는 금성전투는 국군포로 문제와 질긴 인연이 있다. 정전협정 협상 막바지에 중국은 영토와 명분을 건졌고, 한국은 모두 잃었다. 6월19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유엔군 사령부는 한국 정부와 군대를 통제할 능력이 있는가.” 그 끝에 나온 것이 마오의 진격 명령이었다.

정전협정 61주년을 맞아 ‘돌아오지 못한 국군’ 문제를 다시 들춰본다. 금성전투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북한강 지류인 금성천은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 김화군에서 합류하는 강이다. 전선은 북쪽으로 반원형으로 올라가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 20병단을 주축으로 한 6개 군단과 인민군 2개 군단의 공세에 국군 2군단의 4개 사단과 미 제9군단 휘하 국군 수도사단 및 제9보병 사단

한국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이 국군포로들을 이송하는 장면. 포로들의 입성이나 용모가 깔끔하게 나오지만 실제는 달랐다. 포로로 붙잡혔던 국군 및 유엔군 병사들은 그나마 중국군의 포로대우가 북한 인민군에 비해 덜 잔인했다고 회고한다. | <그들이 본 한국전쟁1> 눈빛출판사 제공

 

이 배치됐던 전선은 무너졌다. 훙쉐즈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의 회고록 <중국이 본 한국전쟁>에 따르면 이 전투 이후 우리가 잃은 영토만 192.6㎢에 달한다. 사람은 더 잃었다. 포로 문제 끝에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전투는 또 다른 포로를 낳았다.

 



국군 및 유엔군 포로들이 전선에서 이송됐던 경로. 녹색선이 국군포로, 붉은선이 유엔군 포로의 호송경로다. 호송 중 사망자가 많아 ‘죽음의 행진’이라고 불렸다.


■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도박으로 희생 늘어

양융 중국인민지원군 제20병단 사령관은 <양융 상장>에서 한국군 등 5만2783명을 섬멸했고, 그중 2836명이 포로라고 밝혔다. 이 책에서 ‘섬멸했다’는 말은 사상자와 부상자를 포함한 말이다. 아군 전투사에 따르면 7월12~27일 전사자와 실종자는 5569명이다. 실종자의 상당수가 전사자로 처리된 것을 감안하면 국군포로는 2836~5569명 사이다. 이승만의 도박이 없었으면,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전후 함경북도 학포·고건원·하면·고참·주원·유선·무산·용양·온성·아오지 탄광 등지에서 ‘똥간나 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90년대 이후 탈북해 남한에 정착한 국군포로 80명의 대부분이 7월 전투에서 붙잡혀 함경북도 지역 광산에 근무했었다. 2008년 북한인권정보센터가 심층면접한 20명 가운데 절반도 금성전투 지역에서 포로가 됐다.

■ 중국 마오쩌둥 격노… 금성전투 벌어져

한국전쟁은 교전보다는 협상하는 기간이 훨씬 더 길었다. ‘말로 싸우는 전쟁(A Talking War)’이라고 불리는 까닭이다. 싸우다가 쉬고, 쉬다가 싸웠다(打打停停, 停停打打). 정전협상은 1951년 7월8일 시작해 만 2년을 끌었다. 그중 1951년 12월11일 착수한 포로의제에만 20개월이 걸렸다. 전쟁은 좀 더 빨리 끝날 수 있었고, 더 많은 국군포로가 귀환할 수 있었다. 1953년 4월20일~5월3일 판문점에서 상병포로 교환이 있었고, 같은 해 6월8일 “송환을 원하는 모든 포로는 60일 이내에 송환한다”는 포로교환협정이 조인됐다. 정전협정이 조인만 남겨둔 상태에서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수만명의 추가 사망자와 수천명의 추가 포로를 낳았다. 금성전투 후 7월19일 속개된 정전협상장에서 유엔군 측은 미귀환 국군포로 문제를 강하게 꺼낼 수 없었다.

한국전쟁은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미완의 전쟁으로 남아 있다.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투 종결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인 포로 문제조차 정리되지 않은 채 61년이 흘렀다. 이러한 반인도적 상황은 유독 한반도에서만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핵심에 ‘사람’을 부수적인 고려사항으로 경시했던 이념적, 정치적 타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반공포로 2만7000여명의 석방은 겉으로 내세운 명분이 무엇이었건 간에 난관에 봉착했던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이승만의 승부수였다. 미국은 1953년 8월8일 결국 상호방위조약 최종안에 가조인을 했다. 한·미동맹의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렵사리 끌어낸 합의를 깔아뭉개는, 막무가내식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사람을 내버리고 조약을 얻은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후 남북한의 어떤 정권도 미귀환 국군포로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이 잊힌 전쟁이라면, 국군포로야말로 철저히 잊힌 존재들이었다.

미귀환 국군포로가 대규모로 발생한 가장 큰 원인은 북한 인민군의 뒤틀린 포로정책 때문이었다. 정전협상이 시작되기 보름 전인 1951년 6월25일 북한군 총사령부가 전쟁 발발 1주년을 맞아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한 국군 및 유엔군 포로는 10만8257명이었다. 빨치산 활동을 했던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기관지 ‘승리의 길’ 12호도 같은 숫자를 제시했다. 그러나 1951년 12월18일 유엔군 측이 북에 건넨 공산포로 명단은 13만2474명(인민군 9만5531명)이었던 반면에, 공산 측이 통보한 국군과 유엔군 포로의 수는 1만1599명(국군 7142명)에 불과했다. 북한은 정전협상 개시 보름 전에 스스로 발표한 숫자의 10%에 불과한 포로 명단만을 내놓고 생떼를 부렸다. 국군과 유엔군 측은 실종자 중 포로가 최소한 62%인 6만2000명이 돼야 한다는 통계추정치를 들어 나머지 5만여명의 국군포로 송환을 촉구했다. 공산 측은 “5만여명을 이미 석방했다”고 맞섰다.

북한 인민군이 1951년 6월 국군 및 유엔군 포로 수가 8만5428명이라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했던 것과 비교해도 설명이 안되는 대목이다. 중국군은 포로를 4만6062명으로, 러시아 측은 5만5800명으로 추산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실제 귀환한 국군 및 유엔군 포로 1만3444명과는 최소 4만명 이상의 차이가 있다. 국방부가 1997년 10월 발표한 실종자 4만1971명과 비슷한 규모다. 이러한 자료들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정전 61주년을 맞아 지난달 펴낸 <6·25전쟁과 국군포로>에 근거한 것이다. 정부는 1994년 조창호 소위의 귀환을 계기로 국군포로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그동안 국방부 내부 보고서와 전문가들의 논문만이 있었을 뿐 번듯한 책 한권 나오지 않았다. 조성훈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펴낸 이 책은 국군포로 문제의 기원에서부터 현황 및 향후 대책을 망라한 종합판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정전 후 북에 남은 국군포로들은 어떻게 됐을까.

북한 인민군이 한국전쟁 발발 1주년에 즈음해 전선에 뿌린 선전전단. 1951년 5월22일까지 국군 및 유엔군 포로수를 8만5428명으로 명시하고 있다.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19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탁자 앞에 앉은 사람)과 북한 인민군 남일 대장이 정전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 포로들 질병·기아·혹한·노역 ‘참혹한 삶’

국군 및 유엔군 포로는 대부분 평안북도 의주 근처의 천마·강계·만포·벽동 일대의 수용소에 수용됐다. 포로들은 전선에서 일단 포로수용소로 이동했지만 포로 규모를 위장하기 위해 수용소 간에도 이동이 많았다. 특히 전선에서 첫 수용소로 이동하는 과정은 ‘죽음의 행군’이었다고 생존자들은 증언한다. 부상이 악화되거나 질병과 기아, 혹한, 북한군의 살해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스러졌다. 한 국군포로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편했다”고 기억했다. 경북 영덕에서 포로가 된 국군 제3보병사단과 수도사단 포로 300여명이 함경남도 고원에 도착했을 때는 생존자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동 중 하루 옥수수 한 개로 끼니를 때웠다. 고원 읍내 제일인민학교에는 국군포로들의 시체가 마른 고기처럼 널려 있었다고 한다. 포로 대우는 북한 인민군이 중국인민지원군에 비해 더욱 포악했다. 이동이 어렵거나 저항하는 포로들을 즉결처형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지는 않지만 이동 중 또는 수용생활 중 유엔군 폭격의 희생자들도 발생했다. 국군포로 중 상당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북한 인민군에 자원입대하는 길을 택했다. 북한은 이들을 ‘해방전사’라고 치켜세우며 부족한 병력자원으로 활용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1952년 9월2일자 첩보 보고서에 따르면 국군포로 중 수천명이 소련으로 끌려갔지만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 국군포로들은 전후 북한 전역의 도로, 철도, 주택 복구와 각종 건설사업에 동원됐다. 1956년 재배치됐지만 대부분 광산노동자로 60세가 될 때까지 살인적인 강제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북한 입장에선 체제 불안 세력이기에 끊임없는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기도 했다. 강원도 금화전투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가 정전을 불과 23일 앞두고 포로가 됐던 허재석씨(83)는 아오지 탄광에서 환갑을 맞았다. 중국을 통해 탈북한 그는 2008년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라는 자서전을 통해 “지하 4000m 막장에 들어가면 숨쉬기도 바쁘지만 우리 포로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일하는 기계가 되어 묵묵히 일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아침 식사는 북한의 일반주민인 동료 광부들의 3분의 1에 불과한 좁쌀밥 반공기에 소금국으로 때웠다. 정년 뒤 경비원 등으로 생활했지만 1990년대 중반 덮쳐온 식량난 속에서 국군포로 가족들의 삶은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2012년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남한으로 넘어오게 된 계기였다.

■ 살아남은 자들 남 “변절자” 북 “해방전사”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측 정부는 납북자 문제와 함께 국군포로 문제 해결을 시도했지만 북측은 협의 자체를 거부해왔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범주에 넣어 126명의 생사확인을 요청했지만 북한은 그중 93명이 확인이 안된다고 답해왔다. 결국 17건의 국군포로 가족 상봉만이 성사됐으며, 그나마 북한은 이들이 해방전사라고 강조했다.

남으로 내려온 국군포로들도 그다지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귀환국군용사회 창립 1주년 행사가 열린 지난 4월23일 유영복 용사회 회장은 “만약 내려오지 않았다면, (남에서는) 우리를 두고 변절자나 투항자라고 낙인찍었을 것”이라면서 “북에서 비참하게 죽은 전우들 몫까지 당당하게 증언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늙었다. 어제 일도 잘 기억이 안 난다”는 그의 고백처럼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쇠하는 데다 많은 경우 북에 두고온 가족이 있기에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고 활동하지 못한다. 젊어서는 이중, 삼중의 감시 탓에 탈출을 꿈꾸기가 어려웠다.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경험이라도 전해야 한다”는 다짐에는 그들이 살아온 한 맺힌 일생이 담겨 있다. 귀환 국군포로들은 너나없이 ‘대한민국 군인의 명예’를 강조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들의 명예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격을 지켜주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스스로 자문해보지 않으면 안된다.

<김진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


 

입력 : 2014-07-25 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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