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러 관계] "한국 우크라 무기전달, 적대 행위 간주" 강력 경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9일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조건부 무기 지원' 가능성을 밝힌 뒤 러시아 정부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 10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놓은 경고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러시아가 한국에 대해 즉각적인 보복 또는 상응 조치를 취할 태세가 아님을 말해준다. 하지만 한국의 무기·탄약 지원이 실행된다면 러시아 측의 반응 또한 바뀔 수밖에 없다. 마리아 자카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20일 표명한 입장이 이를 예고한다.
자카로바 대변인은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전달을 공개적인 반러시아 적대행위로 간주한다"라면서 "해당국과의 관계에 극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해당국의 근본적인 안보 우려가 걸린 문제에서, 한국의 경우 한반도 문제 해결에 대한 러시아의 입장을 정하는 데 고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자카로바는 또 윤 대통령이 러시아군의 민간인 공격 관련 언급에 대해 "러시아군은 민간인 시설이 아닌, 군사적 목표에만 정밀 타격을 하고 있다"면서 "민간인 사상자에 대한 우려는 불행히도 돈바스 주민들이 2014년 이후 처해온 현실"이라고 반박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 공격' 언급 정면 반박
다소 유보적이었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의 19일 반응에 비해 훨씬 강경해진 것이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19일 언론 브리핑에서 "안타깝게도 한국은 이 모든 과정에서 다소 비우호적인 입장을 취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그들(서방)은 갈수록 더 많은 나라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할 것"이라면서 "무기 전달이 시작된다면 이는 분쟁에 간접적인 개입을 의미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기 전달 개시를 한국의 개입 정도가 달라지는 시점으로 보겠다는 말이다.
윤 대통령은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나 대량학살 또는 전쟁법의 심각한 위반과 같이 국제사회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인도적, 재쟁적 지원만 제공하기 어렵게 될 것"이라며 무기·포탄 직접 지원 가능성을 시사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은 20일 텔레그램 계정에 러시아가 상응조치로 북한에 최신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메드베데프 부의장은 "자진해서 우리의 적을 도우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면서 "윤 대통령이 말한 것은 원칙적으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할 준비가 됐다는 말"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한국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제공 가능성이 전적으로 배제됐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했었다"면서 "최신 러시아 무기가 자신들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우리의 파트너인 북한의 손에 전달된다면 한국 국민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고 덧붙였다. 메드베데프는 '보상' 또는 '대가'를 뜻하는 라틴어(Quid Pro Quo)'로 글을 맺었다.
중국의 '전랑 외교'와 다른 러시아의 접근
앞서 푸틴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에 155㎜ 포탄 10만 발을 수출하던 지난해 10월 27일 발다이 국제회의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탄약을 제공한다면 러·한 관계가 파멸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또 "러시아가 북한과 이러한 협력을 재개한다면 한국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면서 러·북 국방 협력 재개를 시사했었다.
러시아의 반응은 한국산 무기·포탄이 우크라이나에 전달되는 순간까지 한국에 대한 상응 또는 보복 조치를 미룰 것임을 말해준다.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미국과 서방이 주도하는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 러시아가 지난해 3월 22일 발표한 '비우호 49개국 리스트'에 올랐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및 북대서양조약(나토) 주요 회원국들과 달리 독자적인 대러 제재는 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가 대한국 태세를 즉각적으로 바꾸지 않는 것은 역으로 한국과의 협력 가능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열어두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비우호적인 국가들에 대해 즉각적이고 우악스럽게 보복하는, 중국의 '전랑(戰狼)외교'와 사뭇 대비되는 접근이다.
심상치 않은 북·러 국방협력
러시아가 지난해 10월부터 경고하고 있는 북한과의 국방협력 '재개'는 북한의 위협에 대비해야 하는 한국의 안보태세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핵무기와 미사일 등 비대칭 전력에 대한 대비뿐 아니라, 재래식 전력에서도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소련 해체 뒤 러시아가 국방협력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북한이 아닌, 한국이었다. 1992년 11월 국방전문가 및 해군 함정 전문가들의 교류가 시작됐다. 1990년대 이후 한·러 간 ‘불곰사업’ 덕분에 러시아 T-80 탱크 기술을 원용한 K-2 흑표 전차의 개발이 가능했고, 천궁, 신궁 미사일 개발에도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는 미국에 비해 군사기술 이전에 관대했다. 러시아 무기체계를 기반으로 작성된 북한군 교리 및 교범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이 적지 않았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은 상당 부분 러시아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러시아 정부가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북·러 간 국방 협력의 틀을 바꾸고 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 뒤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할 뿐 아니라 수백만 발의 포탄과 로켓을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북한은 자국산 152㎜ 포탄 또는 카투사 형 로켓을 러시아에 보내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실 전략소통조정관은 지난해 11월 2일 북한이 러시아에 상당량의 포탄을 제공했다는 정보를 받고 있다"면서 "중동 또는 북아프리카 국가로 보내는 방식으로 실제 목적지를 숨기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같은 달 7일 국방성 부국장이 조선중앙통신 담화 형식으로 "러시아와 무기 거래를 한 적이 없다"고 전면 부인했지만, 미국 정보기관들은 북한이 이란과 함께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꼽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북한이 러시아에 10만 명의 의용군을 보내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북한군 파병은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드베데프가 언급한 대로 러시아가 최신 무기를 북한에 제공한다면, 한국은 전혀 새로운 대비를 해야 한다. 핵무기와 미사일 등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대처하는 데도 미국의 확장억제력에 의존해왔지만, 북·러 국방협력이 본격화된다면 재래식 전력에서도 새로운 대응을 해야 한다.
한반도 안보에 또 다른 악재
그러나 러시아가 우리의 안보 현실에 던질 위협은 한반도를 넘어선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안보 지형은 급변하고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미국과 일본이 군사적 긴장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러시아에 빼앗긴 북방 4개 섬의 반환 요구를 해온 일본은 지난해 12월 개정한 방위전략에서 러시아를 중국과 북한에 이은 제3의 위협으로 지목해 동해상의 긴장 수위를 높이고 있다.
러시아는 이에 동해 상공과 해상에서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등 미·일의 태세에 대비하고 있다. 러시아가 한국에 적성국으로 돌아선다면, 한국은 대만해협을 둘러싼 미·중 갈등에 이어 동해에서 벌어질 미·러 갈등에 이중으로 속박된다.
멀리 2019년 2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가까이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아무도 한반도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 취임 뒤에는 남북이 서로를 소 닭 보듯 하는 단계를 넘어 아예 쳐다보지 않고 있다. 70주년을 맞은 한·미 동맹은 미국 전략무기를 한반도에 배치하는 훈련을 되풀이하고 있다. 중간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양측 모두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작금의 한반도 정세다. 이 와중에 러시아까지 한반도 안보에 악재로 등장한다면 정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윤석열 정부의 무모한 미국 올인이 내포한 잠재적 위협의 일단이다. 정부의 선택에 따라 지금 보이는 러시아의 조건부 경고는 '폭풍 전의 고요'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