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 반란' 수습 나선 푸틴…지휘부-병사 갈라치기
정중동(靜中動). 푸틴의 움직임은 요란하지 않았다. 조용히 시작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6일부터 이틀 동안 세 차례의 공개 연설을 통해 향후 조치의 윤곽을 제시했다. 예브게니 프리고진 용병 기업 바그너그룹 대표를 사면한 데 이어 무장 반란 참가 병사들도 단죄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했다. 반란 참여 용병은 5000여 명으로 보도됐다.
다만 특정인을 지명하지 않은 채 반란을 주도한 지도부들의 이적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치가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바그너그룹과 관련된 정부 관료들의 부패 혐의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도 예고했다. 비상조치라기보다 일상적인 부패 조사 수준을 크게 뛰어넘지 않아 보인다.
세 개의 연설문에 담긴 푸틴의 심중
푸틴 대통령은 27일 모스크바 크렘린궁 앞 소보르나야 광장에서 국방부와 연방보호군(FSO), 내무부 보안군 및 연방보안국(FSB) 장병 및 지휘부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 내란을 방지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한 것을 치하했다. 곧이어 크렘린궁으로 이동, 이들 기관 수뇌부와 가진 회동에서도 내란을 방지한 것을 거듭 치하했다. 이 자리에는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도 참석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났고, 당신들이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우리 모두가 이해했으면 한다"면서 어조를 달리했다. 특히 반란 과정에서 숨진 (정규군) 영웅들에 대해 각별한 감사를 표하고 국방부에 유가족 지원에 만전을 다하라고 지시했음을 강조했다. 바그너 용병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용기와 영웅적 자질을 보여준 만큼 우리 모두가 존경해 왔다"고 확인했다. 러시아 정부는 공식 발표하지 않았지만, 반란군이 모스크바로 진군할 때 1대의 항공기와 6대의 헬기가 용병들에 의해 격추돼 타고 있던 13~20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푸틴은 그러나 바그너그룹에 대한 지원이 전액 국고에서 나온 것임을 새삼 강조하면서, 국방 및 보안부처를 상대로 사정의 칼날을 겨눌 것임을 시사했다. 푸틴에 따르면 지난해 5월부터 올해 5월까지 1년 동안 총 862억 6200만 루블(약 10억 달러)이 바그너 용병들에게 지급됐다. 703억 8400만 루블이 봉급으로, 158억 7700만 루블이 보너스로, 158억 7700만 루블이 보험료로 각각 지급됐다. 푸틴은 또 바그너그룹의 지주회사인 콩코드는 같은 기간 군 식당과 매점 식자재 공급사업으로 800억 루블의 수익을 올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누구도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기를, 아니 (훔쳤더라도) 많이 훔치지 않았기를 바란다"라면서 전면 조사에 착수할 방침을 밝혔다.
푸틴이 바그너그룹에 지출한 예산을 항목별로 소개한 것은 우선 바그너그룹이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는 메시지로 국민적 지지를 받는 바그너그룹을 견제하는 동시에 정부 내 부패혐의의 존재를 인정한 것으로 양날의 칼인 셈이다.
앞서 푸틴은 전날 TV 연설을 통해 국내외에 자신의 통치 기반이 건재함을 확인시켰다. 초기부터 유혈사태 방지를 위한 조처를 했음을 강조했다. 반란에 가담한 용병에 대해서는 지도부와 일반 병사를 분리해 처리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병사들에게는 정규군이나 보안기관 편입, 벨라루스행, 귀향 등 세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자유롭게 결정하라고 말했다. 벨라루스행은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대표와 함께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벨라루스로 이동한 용병들의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프리고진은 26일 비디오 클립을 통해 바그너그룹 용병들은 체제 전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비효율적인 전쟁수행에 대한 불만을 접수하러 모스크바로 향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직할부대 앞에서 통제력 과시
푸틴은 바그너그룹 지도부에 대해 조국과 국민을 배반했을 뿐 아니라 거짓말로 휘하 용병들을 동족상잔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과거에도 알았고, 지금도 알고 있는 바 대부분의 바그너그룹 용병들은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방을 해방한 '애국자들"이라고 상찬했다.
푸틴이 27일 크렘린 광장 행사에 동원한 부대는 국방부가 아닌, 크렘린의 통제를 받는 직할부대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연방보호군(FSO)은 대통령과 총리 등 정부 지도부와 그 가족을 경호하는 부대로 병력은 5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약 2500명의 대통령 경호대(SBP)를 포함한다. 대통령 직할부대로 2016년 창설된 연방방위군(FSVNG RF)은 공공질서 유지 및 대테러 방위, 국내 안전을 맡는다. 신속 대응 특수부대(SOBR), 헌병대(OMON) 등을 포함해 34만 명의 병력이다. 연방보안국(FSB)은 과거 국가안보위원회(KGB)의 후신으로 정보기구다. 아직 푸틴이 정규군 및 직할부대들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좌는 나오지 않고 있다.
러시아 국방 전문매체를 인용한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한 바그너그룹 2만 5000명 가운데 반란에 참여한 용병은 5000여명에 불과하다. 용병들의 모스크바 진군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문의 하나는 왜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느냐는 점이었다. 진압하지 못했다기보다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진압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일부 서방 언론이 제기한 푸틴의 장악력 이상 조짐은 감지되지 않는다.
러시아의 독립 여론조사기관인 레바다 센터의 지난 5월 31일 조사 결과 푸틴의 활동에 대한 지지율은 82%(반대 15%)에 달했다. 러시아 정부의 활동에 대한 지지율 67%(반대 27%)를 웃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드니프로강 이남으로 후퇴했던, 77%로 저점을 찍었던 지난해 9월을 제외하고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프리고진 역시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프리고진은 지난 5월의 같은 조사에서 인기 있는 정치인 10명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1위는 42%였던 푸틴이었고,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 세르게이 이바노프 외교장관,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순이었다.
지난 5월 말 정규군에 넘기기 전까지 최대 격전지였던 바흐무트를 9개월 동안 지켜냈던 바그너그룹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푸틴도 여러 차례 인정한 바 있다. 인기가 높은 바그너그룹과 프리고진을 단칼에 제거할 명분이 적다. 게다가 시리아와 아프리카 20여개 국에 진출한 바그너그룹을 전격 해체하면 대외관계 손상도 예상된다. 전쟁을 수행 중인 푸틴 입장에선 결국 반란을 주도한 일부 바그너그룹 지휘부와 부패가 확인된 관료 등 일부에 최소한의 징계를 내리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영 스푸트니크 뉴스는 러시아 하원(두마)이 용병들의 활동을 규제하는 법안 작성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사태가 수습된 뒤 우방국을 상대로 상황을 설명하는 한편, 러시아 정부의 통제력이 흔들리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 임천일 북한 외무성 부상은 지난 25일 알렉산드르 마체고라 주북 러시아 대사와 만난 뒤 무장반란 사건이 순조롭게 평정될 것이라는 점을 믿는다면서 러시아 지도부가 내리는 선택과 결정도 강력히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