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러시아가 더 큰 위협" 용병 반란에 몸사린 서방
"분명히 밝히건대 미국은 러시아 용병의 난과 무관하다. 러시아 국내 시스템 안에서 일어난 싸움일 뿐이다. 우리는 푸틴이 이 문제로 서방이나 나토를 비난할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한다."
바이든 이례적 신중 대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용병의 무장 반란 이틀이 지난, 26일 처음 내놓은 메시지다. 바이든 대통령의 메시지는 크게 3가지였다. 우선 사태를 러시아 '내부 문제'로 규정하고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러시아 무장 반란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앞세웠다. 이어 동맹국들과 사태를 함께 지켜보며 논의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의지가 여전히 단호하다는 것이었다. 백악관은 바그너그룹의 반란 첫날인 24일 바이든이 비디오 통화를 한 상대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3개국 정상이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이와 별도로 주요 7개국(G7) 외교장관 및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와 통화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러시아가 적전 분열을 보인 것이 반가울 법했다. 2016년부터 예브게니 프리고진 바그너그룹 대표를 제재하고 있지만, 그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반기를 들었다면, 나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보인 태도는 정반대였다. 극도의 조심성을 보였다. 틈만 나면 푸틴 정부에 대해 호전적인 발언을 내놓았던 바이든조차 이번에는 준비된 원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태가 어디로 흘러갈지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기엔 너무 이르다. 최종 결과는 더 두고 봐야 한다"고 여지를 남겼을 뿐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무장 반란의 즉각적인 평가는 물론, 반란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칠 영향 평가와 프리고진이나 푸틴 대통령에 미칠 영향에 관한 언급도 자제하고 있다. 오히려 미국 외교관들은 주말 동안 러시아 측에 미 행정부는 이번 일을 '내부 사안'으로 본다는 점을 강조해왔다고 매튜 밀러 국무부 대변인이 전했다. 마이클 맥파울 전 주러시아 대사는 AP통신에 "미국과 나토는 푸틴(정부)의 불안정을 도모한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비난받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단순히 러시아의 비난만을 걱정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적다. AP통신은 "정부 관리들이 미국은 푸틴이나 프리고진 중 한쪽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뉴욕타임스 외교안보전문기자 데이비드 생어에 따르면 미 재무부는 프리고진에 대해 추가 제재를 단행할 예정이었지만, 자칫 푸틴을 도와주는 인상을 피하려고 일부러 발표를 미뤘다.
20여년 만에 '평화 시기' 보내는 미국
미국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크라이나 국경선을 넘어 확전되는 것을 막아온 것과 무관치 않다. 제한전쟁이 미국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토와 러시아 간 직접 교전으로 비화해 3차 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것만을 우려하는 게 아니다. 러시아의 불안정이 야기할 핵 재앙과 지정학적 재앙 역시 미국엔 악몽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2021년 4월 아프가니스탄에서 굴욕적으로 철수한 뒤 실로 오랜만에 '평화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대만해협과 필리핀 근해 등 곳곳에서 군사훈련을 벌이고 있지만, 2001년 테러와의 전쟁 이후 처음으로 전쟁 없는 2년을 맞았다. 동맹과 우방기업들의 대미 투자를 유도해 제조업 입국에만도 바쁘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러시아가 군사적, 경제적 약화를 노리지만, 그렇다고 러시아가 붕괴하는 상황을 맞이할 준비는 안 돼 있는 것이다.
러시아 용병들의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미국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는 계기가 됐다. 바이든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발트 3국과 핀란드 등 나토 회원국들을 제치고 영·불·독 3개 정상과 먼저 접촉했다는 것 역시 강대국 정치의 단면을 보여주었다. "약한 러시아는 더 큰 위험"이라는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의 발언도 미국과 서방의 이러한 우려를 드러낸 것이다. 보렐 대표는 29일 브뤼셀에서 기자들에게 "지금까지는 우크라이나에서 막대한 무력을 행사하는 러시아를 위협으로 보았지만, 이제는 러시아 내부의 불안정 탓에 러시아를 (또 다른) 위협으로 봐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밀러 대변인도 29일 브리핑에서 "러시아와 같은 주요 국가이자 군사적 강국의 불안정은 걱정되는 일이자, 우리가 긴밀하게 모니터링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푸틴의 중요성' 절감 계기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백악관 국가안보팀은 시간 단위로 반란 상황을 바이든에게 보고했고, 바이든은 "일련의 시나리오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의 브리핑에 단서가 있다. 커비 조정관은 시나리오 중 한 가지를 언급했다. 바로 푸틴이 자신의 통제력을 확인하기 위해 '극단적인 행동'을 취할 경우를 상정한 시나리오였다. 커비는 "우리가 늘 말하고 있는 한 가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크라이나 국민이 겪는 폭력 이상으로 확전되는 건 누구의 이해도 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유럽 동맹과 파트너는 물론, 러시아 국민에게도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커비가 언급한 푸틴의 '극단적인 행동'의 하나로 핵 재앙을 생각해볼 수 있다.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유럽 최대 자포리자 원전은 가동을 멈췄지만, 언제라도 대규모 방사능 오염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의 근원이다. 우크라이나에는 체르노빌 원전도 있다. 원전뿐이 아니다. 푸틴은 벨라루스에 전술핵을 배치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더 큰 걱정은 구소련 붕괴와 같은 혼란이 빚어지면 러시아가 보유한 수천 기의 핵무기의 안전이다. 다른 나라 또는 테러 집단의 손에 넘어갈 수도 있다. 서방 언론에서 사태 초기부터 미국과 나토가 러시아 핵무기의 비상사태를 논의했다는 보도가 나온 이유다.
시점도 좋지 않았다. 나토는 7월 11~12일 리투아니아 빌니우스에서 정상회의를 예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에 관한 확약을 요구하는 가운데 열리는 회의다. 빌니우스는 푸틴이 전술핵을 배치한다는 벨라루스 국경에서 불과 30여㎞ 떨어져 있다. 우크라이나는 이번 회의에서 나토 가입에 관한 확약을 기대하고 있다. 안드리 예르막 우크라이나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21일 이번 회의에서 동맹국들이 단호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우크라이나 국민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서방은 아직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울린 포성
'러시아의 세력권' 안에서 지정학적 분쟁이 재발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간 오랜 분쟁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28일 다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아제르바이잔이 최근 라친 통로에 검문소를 설치하면서 긴장이 높아진 가운데 서로 포격전이 발생해 아르메니아 병사 4명이 숨지고 아제르바이잔 병사 1명이 다쳤다. 조지아와 함께 남 코카서스를 구성하는 양국은 2020년 전쟁 이후에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와 함께 나고르노-카라바흐 평화 협상의 중재국들이다. 이번 분쟁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지난 27일부터 아랄랏 미르조얀 아르메니아 외교장관과 제이훈 바이라모 아제르바이잔 외교장관을 워싱턴에 초청해 평화협상을 갖는 동안 발생했다. 블링컨 장관은 29일 합의에 이르기까지 어려운 일이 남아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