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한국 대통령의 우크라 방문을 깊이 주목한 까닭
"러시아 정부는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에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입장에 그 어떤 새로운 점을 보지 않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 정권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계속 유지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대통령의 키이우 방문에 대해 지난 18일 내놓은 짤막한 입장문이다. 대사관 관계자는 시민언론 <민들레>의 논평 요구에 구두로 이러한 입장을 전했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입장이다. 러시아 정부의 반응이 주목됐던 것은 대통령의 이번 방문에서 적대적인 태세로 해석될 발언이 있어서였다.
대통령실이 누리집에 공개한 '한-우크라이나 공동언론발표문'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공식(Peace Formula)에 공감하고, 성공적인 '평화공식 정상회의'를 추진키로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평화 공식에는 러시아군의 전면 철수와 1991년 독립 당시의 영토 복원 및 전쟁범죄 처벌이 담겨 있다. 전쟁범죄 처벌은 국제형사재판소(ICC)이 기소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단죄를 포함한다. 러시아 정부는 그러나 기존 입장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20일 현재 관련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이라는 금지선(red line)만을 주시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우리 대통령이 "지뢰 탐지기를 비롯해 올해 군사지원의 수준을 높일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살상무기가 없는 한 문제시 삼지 않겠다는 말이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대통령이 지난 5월 19일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조건부 무기 지원' 입장을 밝히자 "우리는 무기 전달을 공개적인 반러시아 적대행위로 간주한다"면서 한·러 관계에 "극도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러시아군의 민간인 공격이나 대량학살, 전쟁법의 심각한 위반 등 3가지를 우크라이나 무기 제공의 전제로 제시했다.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도 같은 달 21일 <민들레>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한민국이 넘치게 비우호적 입장을 보여왔음을 지적하면서 "무기 공급 가능성을 제기한 것 자체가 (그동안 보여온) 비우호적인 입장의 반영" 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울력으로 맞서면서 다극화된 질서를 추구하지만, 외교 관행은 결이 다르다. 중국이 조금이라도 자국 입장에 반하는 메시지가 나올 때마다 외교 경로를 통해 강력하게 항의하는 반면, 러시아는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한 문제 삼지 않는다. 다만, 자국 입장에 반하는 말과 행동이 나올 때마다 차곡차곡 모아놓았다가 한꺼번에 행동으로 반응하는 관행을 보여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자체가 그렇다.
2014년 유혈사태 이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가 중재한 민스크협정2에서 규정된 돈바스 지역(도네츠크·루한스크 공화국)에 대한 고도의 자치 조항을 우크라이나가 거듭 위반하고,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반대를 문서로 보장해달라는 요청이 무시되자 침공했다. 돈바스 지역의 안정과 나토 가입 문제는 우크라이나 일각의 친나치 행보와 함께 러시아가 침공의 명분으로 삼은 세 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 이후에 나온 러시아의 반응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모스크바 발다이 국제회의에서 밝힌 선에 머물러 있다. 푸틴은 당시 한국의 무기 지원 때 두 가지 행동을 경고했다.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과의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북한과 재래식무기 협력에 나설 것을 경고한 것이다. 정부는 레드라인의 경계선에서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무기 지원이 아니더라도 대통령의 공식 희망한 대로 러시아가 궤멸적인 패배를 당한다면, 이 같은 경고는 구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집속탄 포격전으로 민간인 피해 늘듯
우크라이나 전쟁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7일 유엔과 각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속탄(cluster bombs) 제공을 결정한 뒤에도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존 커비 백악관 전략소통조정관은 20일 "우크라이나 군이 미국 집속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은 "러시아는 충분히 많은 집속탄을 비축해놓았지만, 포탄이 부족했을 때도 사용하지 않았다"라면서 '눈에는 눈' 식으로 대처할 것을 경고했다.
집속탄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민간인 살상이 많기 때문에 세계 120개국이 금지하는 비인도적 무기다. 바이든 대통령은 155㎜ 포탄 부족을 이유로 집속탄의 과도기적 사용을 약속했지만, 단기간 충분한 포탄 공급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도기는 상당 기간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모두 집속탄 사용금지 협정 가입국이 아니다. 더 비인도적이고, 더 더러운 전쟁으로 흐를 것이라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미국의 집속탄 공급은 한국의 지뢰 탐지기 제공과 마찬가지로 한달째 답보상태에 있는 우크라이나 군의 반격전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다.
러시아군은 한편 20일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 지역에 사흘째 공습을 가하고 있다. 지난 17일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와 러시아를 잇는 크림대교를 공격해 사상자가 발생한 데 따른 보복 공격이다. 전쟁의 부정적인 측면이 많아진 반면에 유일한 타협점은 사라졌다.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지난해 7월부터 계속되어온 '흑해 곡물 이니셔티브'는 17일 종료됐다. 흑해 이니셔티브는 우크라이나의 곡물·비료 등의 수출을 허용하는 협정이다. 120일 또는 60일 단위로 세 차례 갱신돼 왔다. 7월 중순까지 1000항차에 걸쳐 우크라이나 곡물과 식료품 3300만t이 각국에 전달됐다.
흑해 이니셔티브의 종료는 제3세계 식량 부족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피해를 입힌다. 러시아는 협정 갱신 때마다 러시아산 곡물·비료의 운송을 막는 요소들을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러시아 농업은행의 국제은행간결제망(SWIFT) 재가입 및 △농기계·부품의 대러 수출 재개 △러시아 선박·화물의 보험 가입 및 항만 접안 제한 조치 해제 △비료 수출용 암모니아 수송관의 우크라이나 구간 복원 △러시아 비료회사의 계좌 동결 철회 등 식량 생산 및 공급과 관련된 요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