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우크라이나 전쟁

[일단락된 우크라 전쟁2] 잃은 땅 20% 잊고, 남은 땅 80% 보라는 미국

gino's 2023. 11. 28. 11:25

"장기적인 소모전 양상을 보이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러시아가 패배할 것이라는 조짐은 없다. 러시아 경제는 거뜬하게 서방의 제재를 우회했다. 무엇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권력 기반이 되레 탄탄해졌다. 외교적으로도 러시아는 고립되지 않았다. 되레 중국과 인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글로벌 사우스(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개도국) 외교에서 활기를 띠고 있다. 애당초 세계 최대 면적의 국가가 고립될 것이라는 희망의 전제 자체가 틀렸다. 푸틴에 우호적인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진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더욱 탄탄해진 푸틴의 권력기반

미국의 러시아 전문가 유진 루머와 앤드루 웨이스가 지난 16일 자 월스트리트 저널 공동기고문에서 던진 질문이다. 루머는 전 미국 국가정보협의회(NIC) 러시아 담당관 출신이고, 웨이스는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부회장이다.

미국이 실패했다는 진단은 전문가 집단에서 먼저 나온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내년 11월 대선까지 실패를 인정하기 어렵다. 되레 우크라이나 전략이 성공하고 있다며 지지를 끌어모아야 할 처지다. 비교적 책임에서 자유로운 전문가 집단은 명확하게 전략노선의 변침을 요구한다. 그중 루머와 웨이스가 주장한 '신봉쇄정책'과 리처드 하스 외교협회(CFR) 명예회장과 찰스 쿱찬 조지타운대 교수가 함께 내놓은 '수단과 목적의 균형전략'을 소개한다.

두 개의 주장은 모두 미국의 실패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대신, 우회적으로 표현을 선택했다. 그 점에서 여전히 미국의 '성공신화'로부터 절반 정도만 떠나왔다. 루머·웨이스는 "미국이 패배했다"는 직설 대신 "러시아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스·쿱찬은 우크라이나 전략 성공의 의미를 재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중심의 시각만 걷어내면, 우크라이나 전쟁의 현황을 읽을 유용한 자료가 된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주민들이 25일 러시아의 무인기 공습 경보에 지하철역 안에서 대피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공습으로 영하의 날씨에 전력난이 극심해졌다. 2023.11.25. AFP 연합뉴스

루머·웨이스는 더 이상 우크라이나에서 단기간에 재미를 볼 생각은 하지 말라고 단언한다. 먼저 재래식 무기의 생산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은 자체 방위산업을 활성화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관료주의와 공급망 병목현상으로 빈말이 됐다. 반면에 러시아의 전쟁 수행 능력에 타격을 주려던 제재와 수출통제는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의 유물로 먼지에 덮여 있던 공장의 꺼진 불빛이 다시 켜지고 있다. 오래된 무기공장은 포탄을 비롯해 군수물자 생산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러시아 경제관료들은 제재를 우회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유가 조정 협력이 이뤄지면서 국고는 늘어간다. 반면에 우크라이나는 군인과 공무원 봉급에서부터 무기와 장비를 죄다 서방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 경제의 선방, 우크라 경제의 궤멸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전범으로 기소된 푸틴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지난 10월 일대일로(BRI) 포럼에 버젓이 참석한 것은 물론, 세력권 내 국가들을 자유로이 방문한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세계를 자신들의 구도대로 몰고 가려는 미국과 유럽의 이중기준에 진저리를 치고 있다. 이는 10·7 시작된 가자지구 사태는 불에 기름을 붓는 계기가 됐다.

이번 겨울에도 우크라이나 전력 기반시설과 산업단지 등을 겨냥한 러시아의 공격은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끝없는 파괴와 공포를 일으킬 게 분명하다. 루머와 웨이스는 이 모든 것은 러시아가 원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끝낼 여건이 갖춰지고 있는 것이라고 짚었다.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푸틴 입장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종전을 주도할 맞춤한 인물이 2025년 1월 백악관에 입주하는 걸 의미한다.

푸틴의 권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네바다센터의 조사 결과 2022년 2월 전쟁 전 60%대를 유지했던 지지율이 개전 한 달 뒤 83%가 된 뒤, 바그너 그룹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항명 에피소드를 뒤로 하고 올 10월에도 82%를 기록했다.

푸틴은 서방에 대해 인질을 잡아놓고 있다. 미국과의 전략핵무기 감축 협정(START 2)은 러시아가 복귀하지 않는 한 2026년 종결된다. 핀란드와 스웨덴이 새 나토 회원국이 됐다지만, 유럽 안보에 대한 위협은 러시아가 서방 앞에서 잡아두고 있는 또 다른 인질이다.

​ 각국 정부가 2022년 1월 24일 이후 약속한 예산 지원액(회색)과 지난 7월 31일까지 전달된 예산 지원액(짙은 청색). 단위는 10억 유로이다. 238억 유로를 약속한 미국은 78%인 185억 유로를, 771억 유로를 약속한 유럽연합은 24%인 182억 유로를 각각 전달했다. 출처 독일 키엘 연구소

기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탈냉전 이후 이등 국가로 전락한 러시아가 장기적인 포석을 놓는 계기가 됐다. 루머와 웨이스는 푸틴이 우크라이나 개전 6개월 전쯤에 서명한 신국가안보전략서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서방과 장기간 대치를 불사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푸틴은 이제 자신의 전략이 먹히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초점은 '장기간'이라는 시간 개념이다. 루머·웨이스는 푸틴이 장기 전략을 구사한다면 서방도 장기 전략으로 맞서야 한다면서 냉전 초기 조지 캐넌 전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이 제시했던 봉쇄(containment)전략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새무기 우크라 공급은 요술지팡이 아니다

서방 지도자들은 제재와 우크라이나군의 성공적인 반격, 새로운 무기 공급 따위의 '마술적 사고'를 포기하고 각각 국민을 상대로 더 강해진 러시아가 제기하는 위협의 지속적인 성격을 설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캐넌은 결코 러시아를 상대로 쉬운 승리를 말하지 않았다. "인내심을 갖되 단호하게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조심스러운 봉쇄"를 강조했다. 루머·웨이스의 제안이 미국 성공신화로부터 고작 반보만 떨어진 것으로 읽히는 이유는 캐넌주의의 본질을 짚지 않고 있어서다.

캐넌은 장기간에 걸친 러시아 봉쇄를 제안했지, 결코 군사주의를 말하지 않았다. 미국은 그러나 1950년 캐넌주의를 버리고, 국방예산을 3배 이상 증액하는 NSC-68 전략을 택했다.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에서 승리하고도 군사주의의 명맥을 잇고 있다. 1990년대 두 차례의 걸프전과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침공으로 국력을 소진하더니, 이제 중국을 상대로 장기적인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대치를 강화하고 있다. 전제가 잘못됐기에 미국이 우크라이나전의 실패를 성찰하고 대전환을 결행해야 한다는 제안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수단·목적의 균형'을 제시한 하스와 쿱찬은 보다 직접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포린어페어스 17일 자 기고문에서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성공'을 다시 규정하기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미국의 '실패'를 덮었을 뿐이다. 얼핏 복잡해 보이는 하스·쿱찬의 주장은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를 포함한 1991년 독립 당시의 영토를 회복하는 '목적'은 정당하지만, 이를 달성할 '수단'이 마땅치 않으니, 뒤로 물러서라는 제안이다. 러시아 경제는 거의 타격을 받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 경제가 3분의 1 정도로 쪼그라든 것은 현실의 또 다른 측면이다.

 

'장기 전략'이라 쓰고, 미국의 실패로 읽는다

군사적으론 공격 대신 방어로 전환하고, 20%의 빼앗긴 땅에 연연하지 말고, 80%의 지켜낸 땅의 방어와 재건에 힘을 쏟으라고 주문했다. 심각한 수준의 인명 손실을 줄임으로써 재건 인력을 확보하라는 제안이다. 미국과 유럽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휴전협상에 나서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제안도 겹친다. 그러면서 나토 조약 5조의 집단방위 약속 대신 조약 4조의 안보협의에 만족하고, 유럽연합(EU) 가입을 서두르라고 주문했다.

하스·쿱찬은 발레리 잘루지니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이 타임 인터뷰에서 인정한바, 두 번째 겨울이 시작된 상황에서 전선의 장기간 교착 전망을 전제로 내놓은 해법 아닌 해법이다. 루머와 베이스 역시 "우크라이나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유럽에 완전히 통합된 부유하고 독립적인 국가로 거듭나는 것이 푸틴과 그 후계자에게 패배를 안길 방안"이라고 제시했다. 미국과 유럽 지도자들이 휴전 협상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겹친다. 러시아군의 패퇴라는 담대한 계획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

'장기 전략'은 최근 들어 미국 조야의 사고를 지배하는 열쇠말이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지난 6월 28일 CFR 대담에서 "미중 경쟁은 우리 생애에 안 끝난다"라면서 장기 전략임을 강조했다. 러시아 견제도 장기 전략으로 가야 한다는 루머·웨일스의 제안이나, 하스·쿱찬의 제안을 뒤집어 보면 당장은 해법이 없다는 말이다. 미국이 당장 우크라이나 지원을 끊으라는 주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전망 없는 전쟁에 비용을 댈 수는 없다는 말로 읽힌다. 미국이 절반쯤 발을 뗀 뒤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될지, 재건 자금은 어떻게 확보할지, EU 가입은 가능한지에 대한 전망과 논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