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락된 우크라 전쟁6] 세계는 왜 한국전쟁을 소환하나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최전선 국가(Frontline State)라면, 동아시아에서는 대한민국이 전방국가다. 우크라 전쟁은 개전 당시부터 끊임없이 '코리아'를 소환해 왔다. 국지전, 소모전에서 가장 긴요한 포탄의 제공국이자, 우크라가 추진해야 할 최종 해법의 선례로 제시됐다. 국제사회는 왜 계속 70여 년 전의 한국전쟁을 작금의 우크라 전쟁과 비교하는 것일까.
"한국을 보라"
우크라 전쟁과 한국 전쟁을 비교하는 첫 번째 근거는 '지정학적 변곡점'이 됐다는 점에서다. 한국전쟁에서 미‧소 냉전의 양극화 구도가 굳어져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됐듯이 우크라 전쟁 뒤 세계는 다시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뉠 것으로 전망된다. 전쟁의 간접적인 당사국을 좁게 말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이지만, 실질적으로 미국과 러시아이다. 여기에 전쟁과 상관없는 중국이 들어온다. 기왕의 미‧중 경쟁에 새로운 전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 인게 베케볼드 노르웨이 국방연구원(NIDS) 중국 담당 선임연구원이 6월 28일 자 포린폴리시 기고문 "우크라이나는 돌아온 한국전쟁"에서 짚은 골자다. 전쟁의 구조를 보면, 한국전쟁과 우크라전은 강대국이 관여한 '비대칭 대리전'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한국전쟁에선 남북한이 각각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을 수행했지만, 지금은 우크라가 러시아를 상대로 미국의 대리전을 하고 있다. 남북한이 피를 흘렸듯이 우크라 국민이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를 보고 있다. 한국전쟁은 소련을 대리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지만, 우크라 전은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됐다.
요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중국과 북한을 지원, 미군을 한반도에 장기간 묶어놓으려고 했다면,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우크라 무기 지원으로 전쟁기간을 늘려 러시아의 군사력이 약화되는 것을 노려왔다. 한국전쟁에서 트루먼과 아이젠하워가 두 차례 핵무기 사용 위협을 했듯이 푸틴은 서방의 직접 개입 의지를 꺾기 위해 핵 위협을 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3월 25일 벨라루스 전술핵 배치를 선언한 데 이어 미국처럼 핵무기 선제사용 독트린을 검토하겠다고 천명했다. 러시아TV는 지난해 5월 1일 영국과 아일랜드가 러시아의 핵 공격으로 파괴되는 시뮬레이션 장면을 전했다(워싱턴 포스트). 핵 위협은 러시아가 필요를 느낄 때 종전 합의를 강압할 수단이기도 하다.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인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두 전쟁은 비슷하다. 우크라이나전은 70년 동안 정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전쟁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동결된 분쟁'이 될 가능성이 짙다. 정전협정이 그랬듯이 두 차례의 민스크협정은 분쟁의 기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동결됐다고 하지만, 언제라도 다시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분쟁이다. (리얼 클리어 디펜스 '한국전쟁의 렌즈로 본 우크라 전쟁')
지난 10월 3일 자 더 디플로매트는 '우크라를 위한 한국전쟁의 교훈'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전쟁 당시 미국처럼 러시아가 완승을 거둘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소가 전장을 한반도로 국한했듯이, 미·러는 전장을 우크라 영토로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장 이전에도 한반도가 동아시아 안보의 지속적인 불씨였던 것처럼 영토 일부를 점령당한 우크라는 영원한 '분쟁의 씨앗'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크라 전쟁의 최종 상태로 다시 한반도가 소환되는 이유다.
작년부터 논의된 '전쟁 동결'
우크라군이 한창 반격전을 준비하고, 미국이 무기 지원을 늘리던 시점에도 바이든 행정부 내에서는 우크라전의 '동결' 및 '한국화'가 논의되고 있었다. 폴리티코 5월 18일 자는 바이든 행정부 전, 현직 당국자들의 말을 인용해 우크라가 또 하나의 한국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동결된 분쟁'은 전투가 중단되지만, 양측 모두 승전을 주장하면서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푸틴의 러시아'가 애초 공표한 특별군사작전의 대상지는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등 돈바스 지방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30일 헤르손-자포리자-도네츠크-루한스크 등 우크라 국토의 20% 정도인 4개 주 점령지를 병합했다. 현 상태를 유지하되 크림반도를 포함한 1991년 독립 당시 영토의 100% 수복을 다짐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권의 정치적 입장을 살려주려면 '정전'이 유일한 해법이라는 말이다.
지난 10월 은퇴한 마크 밀리 전 미 합참의장은 미국 관리들 중 드물게 "전쟁이 협상으로 종결될 것'이라고 여러번 주장했다. 이는 우크라가 한반도처럼 수십 년 동안 국제법적 분쟁국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은 지원을 대폭 줄이고, 대중의 관심이 엷어지도록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니스트 기데온 라흐만은 벌써 1년 전 '우크라와 한국의 그림자' 칼럼에서 전쟁이 평화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으로 끝날 것을 예견했다. 그즈음 출간된 로렌스 프리드먼의 저서 <사령부: 한국에서 우크라까지 군사작전의 정치학>를 원용해 군사분계선으로 러-우군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중단하되 전면적인 평화협정을 맺지 않는 방안을 제시했다.
사실상 유일하게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된 한국의 경제발전 모델과 K-POP은 각국의 주목을 받는 매력 자산이다. 그러나 어쩌다 정전체제가 주목받는 해괴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한국을 보라"는 서방 전문가들이 염두에 두는 것의 하나는 우크라의 경제발전이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과 외교관계협회(CFR) 등의 미국 전문가들은 우크라에 "20%의 점령당한 땅에 연연하지 말고, 80%의 점령당하지 않은 땅에 주목하라"면서 군 전략을 공세에서 방어로 전환, 남는 인력을 재건에 투입하라고 권고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유럽에 완전히 통합돼 부유하고 독립적인 국가로 거듭나는 게 푸틴에 패배를 안기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EU, 우크라 가입 협상 착수
동아시아 분단국의 '1호 영업사원'이 지난 7월 키이우 방문길에 제시한 비전이기도 하다. "지금 우크라 상황은 70여 년 전의 한국을 떠올린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부흥한 국가의 하나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던가. 그 끝에 "군수를 더 지원할 테니 승리하라"는 덕담을 던졌다.
15일 우크라에는 모처럼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브뤼셀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몰도바와 함께 EU 가입 협상 개시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전쟁 나흘만인 작년 2월 28일 제출한 가입 신청서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끝까지 몽니를 부리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기권해 가능했다. 가입 협상은 3월 시작된다. 그러나 2013년 EU의 마지막 가입국인 크로아티아의 경우 가입 신청부터 최종 가입까지 10년이 걸렸다. 전쟁 전에도 옛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블록 국가 중에서 바닥 수준의 경제 성과를 보였던 우크라가 획기적으로 달라지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전쟁처럼 질긴 우크라의 '부패 바이러스'가 짧은 시간 내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몇 차례의 정권교체가 필요할지 모른다.
정치는 더 문제다. 과거 한국과 지금 우크라 지도부는 남의 돈과 남의 무기로 전쟁을 치르면서도 늘 한발 앞섰다. 호전적이다. '북진통일'을 다짐했던 누구처럼 젤렌스키는 국토 100% 수복을 다짐한다. 전쟁 와중에서 부패를 맛보며 정파의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정쟁을 벌이는 것도 국화빵이다. 지금 한반도 남쪽에 과거로 퇴행, '공산전체주의'와의 싸움에 의지를 내보이는 정부가 집권하고 있다면 악명 높은 우크라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기세도 꺾이지 않았다.
한반도 거주민에게 우크라는 여느 국제분쟁과 달리 다가온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비추는 '3중 거울'이기 때문이다. 서방 언론이나 전문가들처럼 남의 일처럼 객관적인 입장에서만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우크라는 그나마 한반도와 같은 이산과 민족 분단의 아픔은 덜 겪을지 모른다.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동남부는 러시아계 주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대국 정치에 휘둘려 전쟁에 뛰어들고, 그 결과 영구 분쟁국으로 남는 것은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여정이다. 한반도가 꼬박 70년째 걷고 있는 길이자, 가까운 장래에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