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징집병력 100만 중 70만은 어디 갔을까
"전쟁은 수학이다." 우크라이나 야당 유럽연대당 국회의원 볼로디미르 아리예프가 한 이 말은 개전 2년을 넘기고도 정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크라 전쟁의 현황을 말해준다. 아리예프는 4일 워싱턴포스트(WP)에 우크라 군이 직면한 병력 보충 문제와 관련해 "우리의 자원부터 계산해야 한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상식적으로 접근해도 전쟁에는 세 가지 투입 요소가 필수적이다. 유형의 자원으로 병력과 무기가 있고, 무형의 자산으로 군대나 국민의 사기가 필요하다. 우크라는 이중 무엇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수학은커녕 산수도 안 된다
각국의 안보전문가들은 우크라 전쟁을 지정학적 분쟁으로 해석해왔다. 미국과 서방의 무기 지원 여부와 그 규모, 우크라 군이나 국민의 사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러시아의 전략적 목표 등을 포함하는 고차 방정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크라 정부의 거버넌스(통치기반)는 '수학'은커녕 '산수'도 하지 못하고 있다.
WP가 파헤친 것은 우크라 군이 직면한 병력 부족의 문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실에 따르면 2022년 2월 말 개전 뒤 지금까지 모두 100만 명이 병력자원으로 징집됐지만, 전선에서 싸워 온 병력은 30만 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70만 명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을까? 2년 가까이 전쟁을 이끌어 온 발레리 잘루지니 군총사령관이 지난 2월 8일 전격 경질된 뒤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올렉산드르 시르시스키 신임 총사령관은 부임 한달이 다되도록 사라진 70만 명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만연한 부정부패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WP에 따르면 우크라 정부는 70만 명의 소재는 물론, 정확히 어느 정도의 병력이 필요한지에 대한 공감대조차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효율적인 모병 전략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WP는 가장 큰 이유로 모병을 위한 정치적 공감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젤렌스키의 무능력을 꼽았다. 우크라 의회(라다)가 동원법령을 확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젤렌스키가 어떠한 리더십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우크라 의회는 개전 뒤 18~60세 남성의 출국을 금지시키고, 27세 이상 남성은 징집 대상이고, 18~27세 남성은 자원 입대가 가능하다. 지난 2년간 유지된 동원법령의 골자이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늘어나면서 추가 병력의 확보가 발등의 불이 됐지만, 의회는 아직도 징집연령 조정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한달 동안 징집연령을 25세로 낮출 것인지를 두고 격론을 벌였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동원법령은 4000번 개정됐다. 믿기지 않는 숫자다. 야당은 젤렌스키가 정치적 인기 유지를 위해 반발이 예상되는 동원법령 개정 결정을 의회에 넘기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오죽하면 아리예프 의원이 수학 타령을 했겠는가.
병역기피자 계좌 동결에 '뱅크런'도
동원법령 개정안 중에는 징집회피자들의 자동차 운전면허를 압수하고, 은행 계좌를 동결하는 게 포함됐다. 지난 1월 우크라 금융권에서 7억 달러가 인출되는 뱅크런이 벌어진 이유다. 개전 이후 한 달 동안 최대 규모였다. WP는 징집영장을 받고 은신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특히 바이든 행정부의 전쟁지원안 600억 달러가 하원 공화당에 막힘에 따라 초래된 포탄과 무기, 장비 부족으로 무장과 훈련이 부족한 상태에서 신병이 총알받이로 내몰릴 위험이 높아진 것도 징집이 제대로 안되는 이유다. 우크라 국방부는 작년 11월 '로비X'라는 기업과 계약을 맺고 최전선에서부터 후방의 정보통신(IT)업무 등을 놓고 모병을 시도했지만, 전투부서 병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젤렌스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전쟁에는 우크라뿐 아니라 자유 세계 전체의 운명이 달려 있다"면서 서방의 지원을 촉구하고 있지만, 전쟁자금의 모금에 앞서 필요한 병력을 확보하는 데 어떠한 리더십도 보이지 못하는 것이다. 전쟁 초기만 해도 군에 입대할 동기부여가 충분했지만, 갈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면서 최소한의 병력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 전 전격 경질되기 전까지 우크라 군의 현황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이는 잘루지니 장군일 터. 잘루지니는 작년 11월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터뷰에서 "전쟁이 교착상태로 접어들어 장기적으로 러시아에 유리한 소모전이 됐다"면서 작년 6월부터 우크라 군이 펼친 반격 작전이 실패했음을 인정했다. 대통령실은 "언론에서 최전선 전황을 털어놓는 건 침략자(러시아)를 돕는 격"이라면서 잘루지니의 인터뷰를 대놓고 비난했다. 잘루지니는 당시 무기와 장비 수급이 어려워진 점만 거론한 게 아니다. "머지않아 싸울 사람조차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면서 "적의 공격 탓에 우리 영토 내에서 예비군을 훈련시킬 장소도 마땅치 않다"고 털어놓았다.
군이 요구한 추가병력은 45만~50만 명
우크라군은 작년 말 젤렌스키 정부에 45만~50만 명의 추가 병력을 요구했다. 젤렌스키는 12월 19일 기자회견에서 군총사령관이 요구한 추가 병력 규모를 공개하면서 "100만 명의 강력한 우크라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난 2년 동안 국가를 지켜 온 친구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구체적인 세부내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WP의 보도는 젤렌스키가 아직도 필요한 내용을 확보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젤렌스키는 전장에 50만 명의 병력이 전개돼 있다고 주장했지만, WP는 30만 명으로 추산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작년 12월 "우크라 특별군사작전에 61만 7000명의 병력이 2000㎞의 전선에 배치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러시아 역시 병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우크라처럼 정부와 의회의 거버넌스(통치시스템)가 통째로 무너진 상태는 아닌 것으로 관측된다.
저간의 사정은 개전 뒤 전쟁 상황에 대한 대국민 메시지를 통제해왔던 젤렌스키 정부의 소통 전략이 벽에 부딪혔음을 말해준다. 젤렌스키는 지난달 말 전쟁 2년 동안 우크라군 사망자 규모가 3만 1000명이라고 처음 발표했다. 이 역시 확인이 가능하지 않은 숫자다. 아리예프는 "이제 사회와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 억지로 내보이는 용기 대신 무엇을 해야할지 설명할 시간"이라고 지적했다. 올렉시우 보브로브스카 우크라 국방부 고문도 WP에 "이제는 두려워 말고 어른답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면서 "더 이상 감정이 지배하던 2022년이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EU의 우크라 경제지원은 숨통이 트였다. 500억 유로(540억 달러)의 지원안 통과를 저지하던 헝가리가 입장을 철회함에 따라 지난 8일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확정됐다. 공여(3분의 1)와 융자(3분의 2) 형식으로 4년 동안 나눠 지원된다. 그러나 우크라의 EU 가입조건 충족을 위해 경제 회복 및 재건에 주로 소요될 재원이다. 직접적인 전쟁 지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무기와 장비는 외국이 지원해도 병력은 보낼 수 없다. 바이든을 비롯한 서방 지도자들은 자국 병사들이 단 한 명도 위험지역에 가지 않은 점을 자랑해 왔다.
그나마 숨통 트인 EU 경제지원
국민적 사기는 더더욱 외국 정부가 줄 수 없는 전쟁 자산이다. 서방 지도자 중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최근 예외적으로 파병 가능성을 시사하긴 했다. 하지만 4일 체코 신문 프라보와 인터뷰에서 "가까운 장래에 프랑스군을 파병할 계획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크라 영토를 지원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의미였다"고 꼬리를 내렸다.
러시아는 개전 초부터 미국과 서방의 의도는 "최후의 우크라이나인까지 전쟁터로 몰아넣는 것"이라고 선전해왔다. 전쟁 중인 국가의 전형적인 선전선동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갈수록 실제상황이 되어 간다. 미국과 서방이 한사코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벽에 부딪힌 젤렌스키 정부의 대내, 대외 메시지는 아직 변하지 않고 있다. 젤렌스키는 지난달 25일 전쟁 2주년 회견에서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는 올해 결정될 것”이라면서 서방의 무기 지원을 거듭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