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한국 방문 목적은 반도체산업 회수" 바이든의 실토
"내가 반도체 산업을 회수하기 위해 (대만 아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우리가 8650억 달러의 민간 부문 투자를 받았던 사실을 기억한다. 어떤 미국 대통령이 이런 성과를 달성했는지 말해봐라."
"왜 당신 임기에 미국이 이렇게 됐나" 도발적 질문
지난 4일 자 시사주간 타임지 인터뷰 도중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말이다. '회수한다(reclaim)'라는 단어가 눈에 박힌다.
저널리스트와 정치인 간의 인터뷰 대화는 일종의 '주도권 게임'이다. 기자가 주도권을 놓치면, 자칫 정치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하게 된다. 최대한 인터뷰 대상(interviewee)을 자극해 흉중의 언어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 도발적인 질문으로 상대를 불편하게 해야 온갖 고상한 말로 덧칠하지 않은 '민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타임지 샘 제이콥 편집인과 마시모 캘러브레시 워싱턴 지국장이 지난 5월 28일 백악관에서 35분 동안 진행한 인터뷰는 그 정석이었다.
첫 질문부터 공격적이었다. "다음 주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행사(6월 6일)에 간다. 디데이(D-day)는 자유세계에서 미국 리더십의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왜 당신 임기 중에 미국은 여러 위기를 막지 못하고 있나. 아프가니스탄을 필두로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또 극동의 높아지는 긴장이 그렇다. 미국은 2차 대전이나 냉전 때 맡았던 강대국(world power)의 역할을 여전히 수행할 수 있는 건가?"
'반도체 산업 회수' 발언은 생뚱맞게 '재선하면 86세에 백악관을 떠난다. 미국민이 당신의 고령을 걱정한다'는 질문 끝에 나왔다. 가장 아픈 곳을 직격당한 끝에 꺼낸 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댓바람에 "첫 3년 반의 임기 동안 내가 한 것만큼 한 대통령이 있으면 그 이름을 말해 보라"면서 "타임이 불가능하다고 보도한 수조 달러의 기간시설 재건 예산(BBB)과 3680억 달러의 기후변화 대비 예산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반도체 회수를 위한 방한을 거론하면서 자신이 취임한 뒤 865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음을 강조했다.
고령 리스크 거론에 생뚱맞게 '한국' 소환
타임은 인터뷰 뒤 '사실 확인'에서 백악관이 발표한 지난 5월 현재 바이든 행정부의 민간 부문 투자유치액은 8660억 달러라면서 반도체 산업뿐 아니라 청정에너지 개발과 제조업 지원을 포함한 규모라고 지적했다. 바이든은 현 투자유치 총액을 과거 기준으로 착각했다. 어쨌든 바이든이 한국을 '트로피'로 꼽은 건 그만큼 큰 성공으로 자평하기 때문일 거다.
바이든 행정부는 대만해협 위기를 극대화하는 한편으로 한국과 대만의 첨단반도체 공장을 미국으로 이전시켜 왔다.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공급망의 안전' '첨단기술 분야의 상생 협력' '동맹의 가치' 등 그럴듯한 문구로 기록한다. 타임 인터뷰는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국 입장에서 '회수하기'라면 한국 입장에선 '빼앗기기"일 터. 그 과정을 되짚게 한다.
2022년 5월 바이든 대통령의 2박 3일 방한은 시작부터 파격이었다. 20일 오후 5시 22분쯤 전용기로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한 바이든은 곧바로 삼성전자 평택 공장을 먼저 찾았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안내했다. 21일에는 서울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과 회동했다. 정상회담은 그 중간(21일)에 배치했다. 인물로 보면, 이재용-윤석열-정의선 순이다. 바이든은 두루뭉술하게 2차 전지와 반도체, 자동차 부문 협력 등을 말했지만 속내는 '공장'을 미국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1년 뒤인 2023년 4.26 백악관 한미 정상회담 뒤 발표됐다. 윤석열 정부는 자체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핵협의그룹(NCG) 창설과 미 핵전력의 정기적인 한국 기항, 착륙을 약속한 '워싱턴 선언'을 최대 성과로 홍보했다. 바이든은 달랐다.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간략히 동맹의 의미를 짚은 뒤 곧바로 "내가 취임한 뒤 한국 기업들이 1000억 달러 이상을 미국에 투자, 미국과 한국 노동자들에게 좋은 새 일자리를 제공했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의 미국 공장이 한국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말은 엉뚱했다.
백악관은 정상회담 참고자료(Fact Sheet)에 상세한 내용을 담았다. 바이든 취임 뒤 한국 기업들의 투자 덕에 미국 내 4만 개의 새 일자리를 창출했고 강조했다. 현대 자동차(540억 달러 투자, 1만 1000개 일자리)와 SK 이노베이션(114억 달러 투자, 1만 1000개 일자리) 등 투자 내역을 자랑했다. 이날 발표된 삼성전자의 텍사스주 테일러 반도체 공장 투자액은 25억 달러였다. 한국 기업들의 총투자액은 952억 달러. 반면에, 미국 기업(넷플리스)이 한국에 투자한 금액은 달랑 25억 달러. 38배의 투자 역조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삼성전자의 대미 반도체 투자는 불어났다. 지난 4월 15일 바이든이 64억 달러(8조 9000억 원)의 보조금 지원을 발표하면서 밝힌 테일러 공장 투자 규모는 170억 달러(23조 5000억 원)로 시작, 2030년까지 450억 달러(62조 3000억 원)에 달한다. 총투자액의 14% 정도를 보조받지만, 이는 국내 및 중국 투자의 기회 비용 성격을 띈다.
미국이 한국과 대만, 일본과 맺은 '반도체 4(Chip4) 동맹'의 핵심 역시 반도체 공장을 미국에 건설하는 거였다. 대만의 세계 1위 반도체 수탁(파운드리) 생산업체 TSMC는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2개의 첨단반도체 공장을 더 건립키로 하면서 총 투자액을 650억 달러로 늘렸다.
미국의 반도체 산업 회수 논리는 간단하다. 미국이 반도체를 처음 만들었으므로 미국이 반도체 슈퍼파워가 돼야 한다는 억지다. 미국의 목표는 2030년까지 미국이 최첨단 반도체 생산거점이 됨으로써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되찾는 것이다. 왜? 2001년 30만 개에 달하던 미국 반도차 산업 노동자의 3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 새 세계 반도체 시장은 3배 성장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이 강조하는 '미국을 위한 칩(Chip for America)'의 핵심이다. 미국 자본과 기술, 인력을 동원하는 대신 한국과 대만 반도체 공장을 유치해서 그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1990년 세계 반도체 칩의 37%를 생산했지만, 지금은 12%로 줄었고, 한때 세계 수요의 대부분을 공급했던 첨단반도체의 생산량은 거의 제로(0)이기 때문이다." TSMC 반도체 기술이 UC버클리대가 연방정부 지원을 받아 개발한 기술임을 강조했다. 같은 논리라면 자동차와 컴퓨터, 전화, TV와 냉장고도 미국이 생산 거점이 돼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혁혁한 투자유치 성적을 올린 바이든은 왜 11월 대선을 앞두고 유권자 절반의 지지도 받지 못할까. 그 이유의 하나는 미국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더 이상 제조업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요한 포탄은 물론, 중국과의 제해권 싸움에 나설 대형군함 제조 능력도 예전만 못하다. 반도체는 다를까? 공장을 운영할 전문 노동자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민의 피부에 다가오지 않는 이유의 하나다.
바이든 취임 이후 임금 상승률이 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하는 것 역시 바이든의 자랑이 잘 먹히지 않는 까닭이다. 바이든은 인터뷰에서 "임금 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을 앞섰다"라고 주장했다. 타임은 미 노동통계국의 최신 발표자료를 인용, "지난 4월 현재 전년보다 시급이 3.9% 상승했지만, 물가상승률이 3.4%였다"라면서도 "이는 최근 1년의 통계일 뿐 바이든 임기 400개월의 수치를 보면 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에 못 미친다"고 확인했다.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바이든 인플레이션'이라고 비아냥거리는 대목이다.
경제와 안보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게 바이든 경제전략의 요체다. 그 대차대조표 역시 미국의 엄청난 흑자다. 바이든은 타임 인터뷰에서 시종 인도태평양 전략의 성공을 강조하면서 "그동안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이 태평양에서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라고 자평했다. 수십억 달러의 안보 투자로 수백 배의 투자(8660억 달러)를 유치한 걸 보면, 그가 역대급 영업사원인 것은 분명하다.
투자 유치 실적에 열을 올린 바이든은 정작 한국민이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한반도 평화에 대해서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북핵은) 꽤 오래된 문제다. 5년 전 이 자리에 앉아서도 같은 말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갈수록 위협적이지 않냐'라는 질문에 "아니다. 북한은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위협하고 있다. 더 위협적이라고는 보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바이든은 "(북한에) 사용할 수 있는 핵무기가 있는 한, 늘 말썽이다. 문제는 어떻게 중단시킬 것이냐는 점"이라면서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데 집중했다. "5년 전, 3년 전 임기 말까지 해결하지 못한 트럼프의 잘못"이라면서 트럼프가 북핵 통제 관련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백악관을 떠났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노력이라도 했다. 합의는커녕 시도조차 하지 않은 장본인은 바이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