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피격 이후…'증오'와 '통합' 시험대 오른 미국
13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피격 사건 이후 미국 사회의 회복력이 시험대에 올랐다. '증오'와 '통합' 목소리가 각각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정치적 총격이건, 맹목적 총격이건 총기사건이 벌어진 뒤 미국 사회의 대응은 한목소리로 폭력을 규탄하고, 경계를 강화한 뒤, 국가적 치유에 나서는 순서로 진행됐다. 일정 시간 뒤 다시 총기 소유의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적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행히 트럼프가 경상에 그친 만큼 치유 과정이 단축되겠지만, 11월 대선을 앞둔 시점인 만큼 정치적 논란의 방향은 미지수다. 선거판을 지배하던 양대 이슈였던 바이든의 고령 리스크와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는 사그라들었다. 일단, 15~17일 위스콘신주 밀워키 전당대회장에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내놓을 대국민 메시지가 이번 대선의 성격을 가를 것으로 관측된다.
유세 대신 '트럼프 안전' 강화한 바이든
바이든 대통령은 14일 백악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일단 과열된 정치적 표현의 온도를 낮추자면서 국민 통합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정치가 킬링필드가 돼선 안 된다"라면서 "우리 헌법은 극단주의와 분노가 아니라, 품위와 품격의 미국을 표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다름을 총알이 아닌, 투표함에서 해결하자"라면서 "통합은 가장 달성하기 힘든 목표이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건 없다"라고 역설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예정됐던 유세를 연기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할 지도자의 책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이든은 또 비밀경호국(SS)에 트럼프의 안전을 담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재원과 역량, 보호 수단을 제공할 것을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공화당 전당대회장 안팎에 대한 경계도 대폭 강화했다. 전 대통령이자 현 유력한 대선후보인 트럼프에 대한 경호가 허술했다는 비난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의식했다기보다 대통령의 기본적인 책임 이행이다. 대통령 경호도 강화된 건 물론이다. 그렇지 않아도 과격하고 충동적인 성향이 짙은 트럼프 지지층의 테러 가능성에 대한 경계이기도 하다. 공화당과 트럼프 지지층 일각에서는 바이든이 선거자금 모금행사에서 이번 피격 사건이 "트럼프를 과녁에 놓아야 한다"라는 바이든의 말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가 피격 직후 주먹을 불끈 쥐며 선거 승리를 다짐하는 제스처를 보였듯이 정치인의 말과 행동에는 어느 순간에도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유세장에서 반이민 정견을 밝히다가 피격을 당한 트럼프는 백악관 주치의였던 로니 잭슨 하원의원에게 "만약 그 순간 불법이민 도표를 가르키며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면 총알이 머리에 명중했을 거다. 국경수비대가 나를 살렸다(NYT)"라고 말해 반이민 공약에 집중했다. 바이든의 대국민 연설은 2021년 1월 6일 트럼프가 조장한 의사당 폭동 이후 자신이 줄곧 강조해 온 국민통합의 메시지를 강조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국민통합'은 트럼프의 반무슬림, 반이민 정책을 지탄하는 대항 논리이기도 했다. 숱한 인지력 논란에도 자신이 재선돼야 할 가장 큰 명분으로 통합을 내세워 왔다.
상대 후보 비방 줄인 바이든, 트럼프 진영
트럼프와 바이든 캠프 진영이 서로 원색적인 표현으로 상대를 조롱하는 난타전 양상을 보였던 대선 유세는 자중하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바이든 캠프는 긴급회의를 열고 트럼프 비난에 집중했던 TV 광고를 중단키로 했다고 CNN이 전했다. 키르스 쿤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이날 NBC 방송에 "우리는 정치적 언변과 어조를 낮춰야 한다"라면서 "동료들에게 오늘만큼은 소셜미디어를 멀리하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본인도 아직 민주당과 바이든이 공격을 자극했다는 말을 삼가고 있다. 되레 이날 자신의 트루스 소셜 계정에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단결해 미국인의 기개를 보여주고 강하고 결연하게 악이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게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라는 통합 메시지를 내놓았다. 공화당 전당대회 강행에 대해 "총격범이나 암살 용의자는 일정표나 다른 어떤 것도 강제로 바꿀 수 없다"는 말로 '강한 지도자'의 면모를 내보였다.
이러한 변화가 11월까지 유지된다면, 저속한 난타전 양상을 보이던 대선 분위기는 달라질 수 있다. 국민통합'과 '국가지도자의 면모'가 새삼 바이든-트럼프가 경쟁해야 할 의제가 된 셈이다. 양쪽 진영은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서로 정치적 다름을 극적인 방식으로 부각하는데 몰두했었다. 2016년엔 트럼프의 증오 에너지가 득세했고, 2020년엔 바이든의 통합 메시지가 우세했다.
1박 2일의 '정치적 휴전'
물론 싸움의 방식이 달라졌다고 해도 바이든, 트럼프의 주요 공약은 치열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다. 특히 멕시코 국경의 불안과 이민정책, 인플레에 따른 바이든 경제정책의 실패,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둘러싼 트럼프 공격의 예봉은 꺾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나마 총격범이 이민자나 유색인종이 아닌 백인 남성(20)이었던 덕에 인종주의 공격의 강도가 강해지지는 않을 것 같다. 피격 1박2일 동안의 '정치적 휴전'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인신공격성 설전은 다소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 첫 리트머스 시험지가 공화당 전당대회(RNC)이다.
전당대회 주요 주제는 △ 미국을 다시 부유하게(경제, 15일) △ 미국을 다시 안전하게(국경통제, 이민, 범죄) △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이다. 공화당은 당초 초청 대상에서 제외했던 트럼프의 당내 후보 경선 경쟁자, 니키 헤일리 전 유엔대사를 연사에 포함해 당내 통합을 도모했다. 그러나 유튜브와 소셜미디어 등에서 과격한 주장을 해 온 극우 논객 터커 칼슨과 래퍼 앰버 로즈 등이 연사로 예정돼 있어 피격 사건의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다. 공화당 전당대회 하루 전, 미국 사회의 현주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