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공화국? 카멀라 해리스에 한반도는 무엇인가
"미국은 동맹인 '북한 공화국(the Republic of North Korea)'과 매우 중요한 관계를 공유한다. 강력하고 지속적인 동맹이다. 오늘, 바로 그 점에서 몇 가지 실증이 있다. 여러분이 보시듯 DMZ에서 미군은 한국군과 어깨를 겯고 근무하고 있다. 함께 훈련도 받는다. 이 지역과 세계의 안보, 안정이라는 목적과 목표를 공유하며 연대감 속에 근무한다."
올림픽 사회자의 실수, 정상외교의 실수
2024 파리올림픽 개회식 사회자만 남한을 북한으로 착각한 게 아니다. 2년 전 방한,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도 짧은 연설의 말머리에 돌연 '중요한 동맹국'의 국호를 헛갈렸다. 지난달 21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에서 전격 사퇴한 뒤 미국 주류 언론과의 허니문 속에서 유력한 민주당 대선후보로서의 보폭을 넓히고 있다.
단순 실수였을 거다. 그러나 203개에 달하는 파리올림픽 참가국 중 한 나라의 국명을 혼동한 개회식 사회자의 실수와 대통령을 대신해 정상외교 차 방한한 해리스의 실수는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의 유고 상황이 아니라면, 철저하게 그늘 속에서 머물러야 하는 미국 부통령(VPOTUS)의 한계는 있다. 그러나 연방상원 의장이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고정 참석자로 명실공히 국가의 2인자다. 해리 트루먼(1945)과 린든 존슨(1963), 제럴드 포드(1974)가 부통령에서 곧바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건 부단히 지도자의 안목을 키워왔기 때문일 거다. 부통령실에 자체 국가안보보좌관도 두고 있다. 국명 실수는 해리스의 뇌리에 한반도가 각인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2022년 9월 29일 그의 판문점 연설문을 새삼 꺼내 읽은 것은 대외정책에 관한 해리스 부통령의 관점을 탐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의 한반도관은 오리무중이다.
유력한 대선후보가 뚜렷한 정책과 전략을 갖고 있지 않다면, 참모들의 자문이나 당의 방침, 조 바이든 행정부의 노선대로 펼쳐나갈 가능성이 높다. 2021년 3월부터 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자문을 해온 필립 고든 역시 한반도와는 거리가 멀다. 직업 외교관 출신으로 브루킹스 연구소와 외교협회(CFR)에서 선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에서 중동 문제 조정관을 지낸, 중동과 유럽 문제 전문가이다. 이란 핵합의(포괄적 공동행동계획, JCPOA)를 적극 옹호해 왔다. 전문가로 북핵 문제를 다룬 건 2017년 10월 11일 자 포린폴리시 기고문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위협을 비판한 게 유일하다. "'화염과 분노' '북한의 완전한 파괴' 등 트럼프 대통령의 공허한 대북 위협은 수모나 전쟁을 야기할 뿐"이라고 짚었지만, 이전에도 이후에도 북핵 관련 논평은 없었다.
본인도 참모도 한반도 현안과는 거리
물론 민주당 대선후보는 부통령뿐 아니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 민주당 두뇌집단 전체의 보좌를 받는다. 하지만 대선후보 물망에 오르기 전까지 본인과 참모 모두 한반도 문제를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어 보인다.
민주당 전국위(DNC)가 지난 7월 19일 공개한 2024년 정강(Platform)의 초안은 글로벌 교역과 경제정책 및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 등 현안에 대해 바이든-해리스 행정부의 기존입장을 고스란히 옮겨놓았다. 한반도 문제는 "동맹국들과 함께 또 북한과의 외교를 통해 북한의 핵프로그램과 호전성이 제기하는 위협을 제한하고 억제할 것"이라며 대북 억제에 방점을 놓았다. 비핵화는 "지속적이고 조율된 외교 캠페인을 구축해 시도할 장기적 목표"로 두었다. '장기적 목표'는 임기 4년 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대북, 대중 억제를 위해 일본·호주·한국 등 지역 핵심동맹국과 태국·필리핀과의 가치 동맹을 내세웠다. 대북 인도적 지원과 북한 인권에 대한 원론적인 우려도 담았다. '해리스 행정부'의 세계전략이 바이든 행정부의 속편일 것을 시사한다.
해리스는 3년 7개월 동안 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대외정책과 국제적 위기관리를 논의한 최고위급 회의에 참석해 왔다. 개전 20주년이었던 2021년 9·11 아프가니스탄에서 전면 철수를 결정하는 국가안보회의(NSC) 회의에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전쟁에 관한 미국의 주요 결정에 관여했다. 바이든과의 정·부통령 오찬 회동도 자주 가졌다. 부통령직 자체가 현실 외교 정책의 '학교'였다는 주장의 근거다. 린다 로빈슨 CFR 선임연구원은 7월 25일 자 누리집 글에서 해리스가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서 이같이 짚었다.
해리스는 150개국 국가·정부 수반과 외교무대에서 만났다. 아세안과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바이든을 대신해 참석했고, 아프리카를 순방했으며, 지난 6월엔 러시아 없이 우크라이나 평화를 논의한 스위스 글로벌 평화 정상회의에도 참석했다. 로빈슨은 그러나 그 많은 회의에서 해리스가 어떤 견해를 제시했는지, 그 바탕의 철학이 무엇인지, 제시하지 못했다. 바이든이 읽을 원고를 '대독'한 것 외 별다른 족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중남미 외교, 국가우주위원회 주관
바이든이 해리스의 몫으로 할당한 정책 과제는 이민정책과 우주개발 부문이었다. 불법 이민자들의 모국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국가우주위원회(NSC) 의장으로 민간 상업 부문과 국가안보의 필요를 아우르는 역할을 했다. 작년 4월 방미한 윤석열 대통령과 우주 협력을 논의하고 고다드 우주 기지를 안내했다.
미국 민권법이 통과된 1964년 태어난 해리스는 검사 출신의 정치인으로 주로 국내 이슈에 관심을 가져왔다. 인종·성·국적에 따른 차별 철폐와 인권 개선, 총기 제한, 마약류 부분 합법화 등이 굵직한 테마였다. 민주당 내 스펙트럼으로 보면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의 뒤를 잇는 '캘리포니아 리버럴'로 분류할 수 있다. 관대한 이민정책을 옹호하며 멕시코와의 남쪽 국경은 자주 들여다봤지만, 태평양 건너편을 내다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유럽 주의자'를 자처했던 바이든처럼 대서양 건너편에 관심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늠할 만한 근거가 턱없이 부족하다. 현 단계에선 '국내용 정치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연유다.
해리스가 러닝메이트로 지목한 팀 월즈 미네소타주 주지사 역시 주로 국내 문제에 천착해 왔다. 부친이 한국전 참전용사이지만, 교사와 연방하원의원, 주지사로 지내면서 한국과 관련은 깊지 않았다. 2019년 8월 주지사 자격으로 일본과 한국을 방문, 경제협력을 도모했다. 월즈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콩을 비롯한 미네소타 남부 농산물의 수출이었다.
여권, 양성평등에선 독자적 목소리
해리스가 국제적으로 확실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 분야는 여성 인권 및 양성평등 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문국마다 바쁜 일정을 쪼개 여성계 지도자들과 모임을 가졌다. 2022년 9월 불과 8시간 동안의 짧은 방한 중 윤석열 대통령 접견과 DMZ 방문 등 외교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서울 정동 주한 미 대사 관저에서 각계 여성 대표와 간담회를 가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바이든 행정부 첫 한미 정상회담이었던 2021년 5월 21일 한미 정상 공동성명에 이례적으로 양성평등 문제가 담긴 정도가 해리스의 흔적이었음을 짐작게 한다.
공동성명에서 두 정상은 "우리는 가정 폭력과 사이버 착취를 포함한 여성과 소녀 학대를 끝내도록 노력하고 양국이 모두 맞닥뜨리고 있는 성별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정책 아이디어를 나누기로 했다." 이후 2년여 동안 양국이 어떤 아이디어를 공유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해리스는 한국 여성계 지도자들과 회동에서 '엄마의 당부'를 전했다. "카멀라, 너는 많은 일을 하면서 최초(의 여성)가 될 수 있단다. 네가 마지막이 돼선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