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의 대화, 비핵화 장기목표 삭제한 미국 민주당 '한반도 정강'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알랑거리고 정당화시킴으로써, 또 북한 독재자와 '러브레터'를 주고받음으로써 세계 무대에서 미국을 당혹게 하는 접근을 했다. 교역 분쟁을 빌미로 한 주한미군 철수론으로 소중한 동맹인 한국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과거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동맹국들 특히 (불법적인 미사일 능력 구축을 포함한) 북한의 위협에 맞서는 한국 편에 설 것이다."
모든 공약의 주어는 여전히 '바이든'
지난 18일 공개한 미국 민주당 정강의 한 대목이다. 국내외 주요 공약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의 한반도 정책을 비판하고 반대 명제로 민주당 공약을 기술했다. 민주당은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19~22일 전당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이미 7월 21일 대선 경쟁에서 전격 사퇴하고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물려받았지만, '2024 정강(Platform)'의 주요 공약마다 주어를 '바이든 대통령'으로 유지했다. 향후 4년 간의 약속 역시 '카멀라 행정부'가 아닌, '바이든 2기 임기'로 적었다. 정강은 대선이 있는 해 전당대회에 즈음해 발표하는 대국민 공약. 대선주자에 초점을 맞추지만, 대선뿐 아니라 상·하원 총선과 주지사 선거 등을 망라한 큰 그림이다. 해리스는 시종 '바이든의 부통령'으로만 존재했다. 한반도 관련 공약의 변화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민주당의 2020 정강은 북한의 위협과 관련해 억제와 대화의 병행을 강조했다. 장기적 목표인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지속적이고, 조율된 외교 캠페인을 강조했다. 동시에 "(민주당은) 북한 주민을 잊지 않고 있다"라면서 "인도적 지원과 함께 총체적인 인권 남용을 중단토록 북한 정권에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크게 보아 억제-대화의 접근 원칙과 비핵화를 위한 외교적 노력, 대북 인도적 지원-인권 개선 압박 등 세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DNC)가 바이든의 사퇴 전인 지난 7월 13일 발표한 개괄적인 초안 자체에 '한반도'가 빠졌지만, 2020 정강에서 달라질 것이라는 어떠한 암시도 없었다. 그런데 한 달 뒤 발표된 2024 정강은 대북 억제만 남겨 놓고 나머지 3가지를 삭제했다. 그새 바뀐 이유는 설명되지 않았다. 정강 안에서 주목도가 떨여진 건 분명하다.
한반도 주목도 더 떨어져
"바이든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 미국은 역사적인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를 주최했고, 한국과의 워싱턴 선언을 명시했으며, 일본과의 3자 간 억제력 논의를 확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동맹국들과 함께 유엔 안보리의 수많은 제재를 위반한 북한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불안정한 개발이 제기하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 일본과의 3자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우리는 한반도와 그 너머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한반도 공약은 '전 세계에서 미국의 리더십 강화(제9장)' 중 소제목 '인도·태평양'에 포함됐다. 7개 문단 중 3개 문단에 한반도가 나온다. '대화의 상대'이자 비핵화라는 장기적 목표 달성을 진전시키기 위한 지속적이고 조율된 '외교 노력의 상대'로 명시했던 북한은 사라졌다. 한미일이 '억제할 상대'로만 지목됐다. 바이든의 첫 임기 동안 한반도 관련한 성과의 핵심도 한미일의 (대북) '억제력 협력 대화'였고, 앞으로도 북한을 억제하며 한국 옆에 서겠다는 다짐에 그쳤다. '억제(deterrence)'만 남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많은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인 북한의 불안정한 핵·미사일 프로그램 개발로 인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국들 옆에 설 것이다. 한국, 일본과의 3자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한반도와 그 너머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것이다."
바이든 1기는 대북 억제에 치중함으로써 전략무기의 한반도 수시 방문(워싱턴 선언), 한미-한미일-확대 유엔사 연합연습(캠프 데이비드 합의) 등 군사적 접근이 사실상 한반도 정책의 전부였다. 대화와 외교적 해결 노력은 거의 없었기에 '군사주의'로 규정된다. "한미가 억제력 최면에 걸려 있다"는 비판(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로버트 칼린)이 제기된 배경이다. "한반도 상황이 위험한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라는 지적(NYT 칼럼니스트 니컬라스 크리스토프)도 있었다. 민주당 정강의 변화는 해리스가 당선되면 군사주의 경향이 더욱 강화될 것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지난 7월 8일 공개된 공화당 2024 정강은 어떨까.
민주당 91쪽, 공화당 16쪽
민주당 정강이 91쪽인 반면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제목의 공화당 2024 정강은 16쪽에 불과하다. 얄팍한 정강이 전통적인 시스템과 당 지도부가 붕괴된 채 트럼프의 사당화(私黨化) 된 공화당의 실상을 말해준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는 아예 새 정강을 내놓지도 않았었다. 이미 문건으로 제시된 공약보다 트럼프의 즉흥적인 말로 운영되는 정당이 됐기에 정강의 중요성도 떨어진다. 8년 만에 나온 이번 정강은 제10장 '힘에 의한 평화로의 복귀'에 외교안보전략을 담았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하겠지만, 불필요한 전쟁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세계를 권위주의 블록과 민주주의 블록으로 양분한 바이든은 '가치' 수호를 위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점에서 다르다. 공화당 정강 10장의 '우리의 약속'은 이렇다.
"미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면 강한 아메리카가 필요하다. 바이든 행정부의 약한 외교정책이 우리를 덜 안전하게 했고, 전 세계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공화당의 계획은 힘을 통한 평화의 복원이다. (중략) 군사력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크고 더 낫게 더 강하게 구축하겠다. 우리의 모든 약속은 미국을 보호하고 모두를 위해 안전하고 번영하는 미래를 확보하는 것이다."
'동맹 강화' 항목에선 유럽 동맹국들엔 '공동 방위 투자'의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중동에선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 평화를 추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인도·태평양에서는 "강하고 주권이 있는 독립된 국가들을 옹호하면서 평화와 상업으로 교역 속에서 번영할 것"이라고 기술했다. 어디에도 '억제'라는 단어는 없다.
'억제(deterrence)' 없는 공화당 정강
트럼프가 올해 유세 중에 내놓은 북한 관련 발언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개인적 친분이 중심이었다. "김정은과 러브레터를 주고받았고, 서로 잘 지냈다"는 게 요지다. 앞으로도 "핵 가진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게 좋다"고도 했다. 7월 15~18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렸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공식 대선후보로 지명된 뒤 첫 유세였던 같은 달 20일 김정은에게 "(핵 문제로 인한) 긴장 풀고 야구 경기나 같이 보러 가자"고 제안했던 것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트럼프의 김정은 언급은 대부분 과거형이다. 재집권 뒤 북미 관계를 어떻게 할지는 백지로 남아 있다.
대외전략과 관련한 민주당과 공화당 강령의 가장 큰 차이는 전쟁을 둘러싼 당론이다. 바이든 임기에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가자 전쟁이 진행 중이다. 또 2030년 중국의 대만 침공을 기정사실로 두고 전쟁연습을 하고 있다. '미국의 리더십'을 강조한 민주당 정강은 바이든 정책의 승계를 다짐하고 있다. 반면에 트럼프 임기 4년 동안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전쟁은 없었다.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한 공화당 정강도 전쟁 불필요론을 담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공화당 정강의 '힘에 의한 평화'는 동아시아 분단국 대통령이 잊을 만하면 되뇌이는 '(미국의) 힘에 의한 평화'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미국의 힘에 의존하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전혀 새로운 판을 짜야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