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미국 민주당 ‘한반도 정강’ 변화 알고 있었나?
"한미 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북한 비핵화 의지는 확고하며, 우리 정부는 긴밀한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억제·단념·대화 외교라는 총체적 접근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갈 거다. 대선 결과와 무관하게 미 측과 대북, 북핵 정책과 관련해 긴밀한 소통과 공조를 계속 유지해 나갈 거다." 20일, 이재웅 외교부 대변인
심각한 외교적 과오가 백일하에 드러났음에도 동문서답, 유체이탈식 화법으로 넘어간다. 그러고도 한미 관계가 튼실하다고 우긴다. 대한민국 외교의 현주소다. 앞에 소개한 발언은 이 대변인이 정례브리핑에서 미국 민주당 2024년 정강(Platform)에 한반도 관련 기술이 바뀐 것에 대한 언론 질문에 답한 내용이다. 질문도 엉성했지만, 답변은 더 문제였다. 정강은 민주당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지난 18일 발표됐다.
언론이 외교부에 물어야 했을 질문은 "대한민국 외교부는 미국 민주당 정강의 변화를 사전에 알고 있었나?" "몰랐다면 왜 몰랐고, 알았다면 어떤 조처를 했는가?" 정도라고 본다. 결과는 같았다. 대변인의 말에 던지지 않은 질문의 답이 고스란히 담겼기 때문이다. 답변에는 외교부가 정강의 한반도 관련 기술의 변화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어떠한 단서도 없었다. 알고 있었다면 ‘민주당 정강’을 묻는 데 한미에 더해 국제사회까지 끌어들여 ‘북한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두루뭉술한 답을 내놓았겠나.
2020년 정강은 "(트럼프의 공화당처럼) 파트너 국가를 업신여기거나, 동맹국 간에 긴장을 유발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과 한국, 호주를 포함한 지역 핵심 동맹국 간에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우리 동맹국들과 함께 또 북한과의 외교를 통해,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지역적 호전성이 제기하는 위협을 제한, 억제할 것이다. 지속적이고 조율된 외교 캠페인을 구축해 비핵화라는 장기적 목표를 진전시킬 것"을 규정했다. "북한 주민을 잊지 않을 것이다. 민주당은 인도적 지원을 지지하며 북한 정권에 총체적인 인권 남용을 중단토록 압력을 넣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88~89쪽)
2024년 정강의 주요 부분은 이렇다. "바이든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 미국은 역사적인 한미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를 주최했고, 한국과의 워싱턴 선언을 명시했으며, 일본과의 3자 간 (대북) 억제 논의를 확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동맹국들과 함께 유엔 안보리의 수많은 제재를 위반한 북한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불안정한 개발이 제기하는 위협에 맞서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 일본과의 3자 협력을 강화함으로써 우리는 한반도와 그 너머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80쪽) 상당한 변화다. 2020 정강에 담았던 대북 제한·억제와 대북 대화의 병행 원칙과 ‘비핵화’의 장기 목표 달성을 위한 외교적 노력 등을 삭제했다.
이 대변인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정강을 물었는데 답변엔 정강이 없었다. 뜬금없이 긴밀한 한미 공조를 바탕으로 억제·단념·대화를 통해 ‘북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눙쳤다. 여기서 궁금한 대목은 그렇다면 외교부는 정강의 변화에 대해 알았는지, 알았다면 정부 입장을 어떻게 반영했느냐는 점이다. 정강은 밀실에서 극비리에 작성하는 문서가 아니다.
미국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는 지난 7월 13일 올해 정강의 대강을 발표하면서 "2024 정강 서면 증언 포털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집한 개인과 조직의 의견, 복수의 설명회와 청문회를 거쳐 초안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경쟁에서 사퇴한 7월 21일 이후엔 초안을 다듬는 과정이 있었다. 정강 자체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문서가 아니다. 그러나 대선후보 이하 상, 하원 의원, 주지사 후보 수백 명이 유권자 앞에 수없이 반복할 약속이다.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행정부 정책의 나침반이 된다. 패배해도 상·하원 의정활동의기준이 된다. 한반도에 미칠 영향력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상당 기간 진행된 정강 작성 과정에 외교부는 중요한 변화를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정부 입장을 반영하지 못했다. 허투루 넘길 일이 아니다. 이 대변인의 말에는 어차피 한미 관계는 긴밀해서 향후에도 별 변화가 없을 거라는 추정이 있을 뿐이다. 문서의 토씨 하나를 놓고 밤새워 협상해야 할 외교관의 말인지 의심케 한다. 물론 대선이 진행 중인 미국 국내 정치에 관여하는 모양새를 보이지 않기 위해 언론을 상대로 모르쇠로 일관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대변인이 말했듯이 윤석열 정부의 북핵 정책은 억제·단념·대화의 3축이다. 정강은 그중 한 축을 없앴다. ‘대화’는 한미 워싱턴 선언이나, 캠프 데이비드 공동성명에도 포함된다. 실제 이행할 의지와 노력이 부족했더라도 원칙을 바꾼 건 간단한 변화가 아니다. 민주당 지도부의 변화다. 그렇지 않아도 대화 노력이 없이 "억제, 억제, 억제"로 일관해 온 바이든 행정부의 4년이었다. 향후 4년간 더 억제에 치중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미국 집권당의 정강 변화 추이를 살피고, 평화적 해법을 바라는 우리의 염원을 반영하는 건 무슨 이념이나 거창한 정책과 무관하다. 외교부의 일상적인 업무다. 이미 변화된 정강을 놓고 새삼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한다면, 협상인들 제대로 하겠는가.
주미 대사관의 국정원 화이트 요원들은 물론 외교부 직원들도 연방수사국(FBI)의 수미 테리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 기소 탓에 정상적인 활동이 위축돼 있다. 이런 상황에 발생한 일이라 더욱 주목된다. 조태용 국정원장은 지난 7월 29일 국회 정보위에 출석, 미국 법무부의 기소 뒤에나 사실을 인지한 것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없었다. "수미 테리 건으로 한미 동맹 훼손은 일절 없으며, 안보 협력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라며 둘러댔다. 여야 정보위 소속 의원들은 별다른 질책도 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과 국회, 언론을 상대로 유체 이탈 화법을 늘어놓는 게 이제는 윤석열 정부 공직자들의 ‘노멀(normal)’이 된 듯하다.
‘윤석열의 대한민국’은 미국에 여느 동맹국이 아니다. 경제적, 군사적, 이념적으로 바이든 행정부의 국정 목표를 150% 추종한 우등생이다. 바이든-해리스는 유세에서 한국으로부터 반도체 산업을 회수해서 미국 내 양질의 일자리를 늘렸다고 자랑한다. 미국의 숙원이던 한일 군사협력은 국민 정서를 깡그리 무시한 채 강행해 왔다. 이 역시 바이든-해리스가 꼽는 가장 중요한 치적이다. 이념적으론 미국 민주주의가 의사당 폭동으로 무너졌는데 엉뚱하게 세계 민주주의를 걱정하면서 만든 ‘민주주의 정상회의’의 인·태 지역 분단장을 도맡았다. 이처럼 좋은 조건에서 야당도 아니고, 집권당의 정강 변화조차 챙기지 못하는 대미 외교는 국비 낭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