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민적 사기' 왜 오바마-바이든보다 트럼프 때 높았나
"우리는 뒤로 돌아가지 않겠다(We are not going back). "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지난 22일 전당대회 연설에서 반복한 다짐이다. 미국 선거 구호는 대체로 세 개 또는 네 개 음절로 운을 맞춘다. 따라 하기도, 반복하기도 좋은 리듬이다. 중독성도 있다.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주로 쓰인다.
'긍정 에너지' 21세기 들어 하락세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 진영이 힐러리 클린턴을 겨냥해 내놓은 공격적 구호는 "락, 허, 업(Lock Her Up, 그를 구금하라"의 3음절이었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시한 구호는 "위아, 낫, 고잉, 백"의 4음절이다. 3음절로 줄여 "낫, 고잉, 백"으로도 부른다. (트럼프의)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해리스는 이 구호를 세 번 반복했고, 청중도 따라 했다. 구호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해리스가 지향하는 '그 곳'은 어디일까, 생각해 본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곳은 알겠는데 돌아갈 '그때, 그곳'은 희미하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의 4년 또는 버락 오바마의 8년일까? '해리스의 4년'은 아닐 거다. 본인에게조차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선명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어디까지, 어떻게 갈지도 미지수다. 해리스는 당내 경선 후보들과 단 한 차례도 공개토론을 한 적도 없고, 후보가 된 뒤 자신의 정치철학과 세계관을 토로한 인터뷰도 하지 않고 있다. 후보 수락 연설 내용만으로 파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미국이 어느 경로를 거쳐 '지금, 여기'에 도달했는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미국 선거 여론조사 항목 중 늘 호기심을 자아내던 질문이 있다. '당신은 국가(미국)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보는가'이다. 조사기관은 후보별 지지 여부를 물은 뒤 종종 이 질문을 던진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7월 19~8월 20일까지 이 질문을 던진 여론조사는 8개가 있었다. 리얼클리어폴리틱스(RCP) 집계에 따르면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는 25.9%에 불과했다. '국가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응답이 64.8%였다. 국민 4명 중 1명 만이 국가의 방향에 동의하는 가운데 치르는 선거라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희망이 적다는 방증이다.
희망의 근거도 절망의 근거도 국민 개개인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르다. 각각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이유가 있을 터. 그걸 통으로 보면 '미국'의 현주소가 드러난다. RCP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1979년부터 같은 질문을 꾸준하게 던져 온 곳은 여론조사기관 갤럽이다. 그중 21세기 이후 '옳은 방향'이라는 응답률의 추이를 보면 이렇다.
부시, 아프간 침공으로 70%, 그러나 퇴임 땐 9%
2001년 1월, 긍정 답변 56%로 출범한 조지 W. 부시의 임기 8년 동안, 국민적 사기는 추락 일변도였다. 9·11 테러가 일어난 달 43%로 내려갔다가 아프가니스탄 침공 초기(2001. 12.) 70%를 기록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두 개의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국가의 방향을 긍정적으로 본 국민은 갈수록 줄었다. 많은 국민을 제3세계 국민으로 전락시킨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8.)에 대한 부실 대응도 사기 저하를 부채질했다. 국정연설에서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한 2002년 1월 65%로 기세를 올렸지만, 이후 임기 말까지 내림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의 대결이 관심을 끌었던 대선을 한 달 앞둔 2008년 10월, 급기야 9%로 조사 시작 이후 가장 낮았다. 10명 중 국가의 진로를 긍정적으로 본 사람이 1명도 안 된 것. '변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한 버락 오바마의 8년 동안에도 국민적 사기는 지지부진했다. 오히려 장기적인 침체가 시작됐다. 임기를 통틀어 20% 안팎에서 맴돌았다. 오바마가 외친 '희망'이 일찌감치 물거품이 된 것이다.
처음 2년 동안 저점을 벗어나 36%까지 올랐지만, 긍정의 기운은 오래 가지 못했다. 보수주의 풀뿌리 티파티(Tea Party)운동이 공화당 지도부를 흔들기 시작한 2010년 11월 중간선거 당시 19%, 이듬해 8월엔 11%였다. 2012년 2월 20%대로 회복한 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경쟁한 2016년 11월(27%) 대선까지 거의 20%대에 머물렀다. 오바마 8년간 최고치(36%)가 9·11테러 당시(43%)보다 낮았다. 미국이 안에서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한 신호다.
바이든-해리스는 트럼프가 집권하면 세상이 암흑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트럼프 4년과 바이든 4년을 비교하면, 되레 트럼프 때 긍정 답변이 더 높았다. 2018년 2월 36%로 올라간 뒤 2020년 2월 45%로 정점을 기록할 때까지 거의 30%대였다. 트럼프가 재선을 확신한 배경이다. '미국 퍼스트'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정책이 어느 정도 먹혔다고 믿었을 거다. 최근 10년 동안 국민적 사기가 가장 높았던 때 대통령은 트럼프다. 미국 기성 제도와 기성 미디어엔 쓰디쓴 패러독스이겠지만, 여론조사 결과가 보여준 엄연한 '현실'이다.
오바마-바이든 최고치 36%, 트럼프는 45%
2020년 1월 말 시작된 코로나19 대확산은 트럼프 행정부에도 최악이었다. 긍정 답변이 급전직하 하다가 바이든-해리스 팀에 정권을 넘겨준 2021년 1월, 11%로 곤두박질했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1·6 의사당 폭동이 있던 달이기도 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의 대확산을 공식 종식한 건 2023년 5월 5일. 코로나바이러스는 바이든에게 대선 승리를 선사했지만, 집권 뒤 집요하게 발목을 잡았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를 질식시키고 있는 인플레이션 탓이다. '더 나은 건설(BBB)'을 통한 기간시설 확충과 반도체를 비롯해 우방국 공장을 미국에 끌어들인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과학법 등으로 일자리를 1600만 개 늘렸다지만 물가 상승 탓에 피부에 다가오지 않는다. '바이든-해리스 인플레이션'이라는 트럼프의 마타도어가 통하는 까닭이다. 과자봉지의 함량을 줄여 가격을 높이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이 시사용어가 됐다.
바이든 행정부의 정점은 2021년 5월의 36%로 '오바마 수준'이다. 이후 20% 안팎을 벗어나지 못했다. 갤럽의 마지막 조사가 있었던 8월 현재의 25%는 RCP가 집계한 8월 말 현재와 비슷한 수준이다. '국가의 방향'에 대한 여론조사 긍정 답변을 통해 본 21세기 국민적 사기의 변천사다.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미국의 길, 세계의 길
물론 세계에 긍정적인 것과 미국에 긍정적인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코로나19 대확산 전까지 트럼프 행정부에서 국민적 사기가 회복된 것은 기성 권력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중국산 제품에 닥치고 관세 25%를 부과하고, 자유무역(FTA)에 대한 '성난 백인들'의 분노에 응답한 점, 미투(Me too) 운동에 대한 반발로 거세진 여성혐오 등이 반영된 수치로 보인다. 2017년 취임 초기 '화염과 분노'를 읊조리며 전쟁 위기를 높였지만,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으로 타협의 정치를 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하나같이 대증적 처방이었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었다. 트럼프는 로널드 레이건의 슬로건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사용하고 있지만, 돌아가려는 곳은 자신의 집권 1기다.
해리스는 "뒤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외치고 있지만, 트럼프 시대 되레 국민적 사기가 높았던 지독한 모순. 일시적인 지지율 변화에 코를 박고 있는 한, 미국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맞다. 트럼프는 천박하고 변덕스러우며,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꾼다. 민주당 2020년 정강에 따르면 '미국의 영혼'에 상처를 입혔다. 해리스는 고상하고 '약간 조리 있는' 엘리트의 언어로 중산층과 글로벌 리더십을 강화하겠노라 다짐한다. 그러나 트럼프도, 해리스도 정답이 아니라는 데 미국의 고민이 있다. 더불어 우리도 궁금해진다. 미국은 과연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