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이번에도 '아메리칸드림' 강조하지만...
"(당선되면 취임 첫날)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 우선순위의 하나인 중산층을 지지하고 강화하겠다. 나는 미국민이 몇 세대에 걸쳐 가졌던 희망과 낙관을 품고 나아갈 준비가 됐다고 본다." (카멀라 해리스 8월 29일 CNN 인터뷰)
"공화당은 '지불가능한 아메리칸드림'을 복원하겠다. 집값과 교육비, 의료비 등 일상적인 비용을 낮추고 기회를 늘려 가정과 청년, 모두가 지불할 수 있게 하겠다." (2024년 공화당 정강, 10대 공약 중 4번째)
부자 감세 vs. 중산층 감세
역대 미국 대선 주자들이 국민에게 내놓는 가장 중요한 약속은 중산층의 복원 또는 아메리칸드림이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당 대선후보인 해리스 부통령과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민 또는 중산층을 보호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경로와 우선순위가 다를 뿐이다. 버락 오바마가 재임 중 강조한 것도 중산층 복원이었다.
오바마는 "전형적인 미국 가정이 1997년보다 더 많은 수입을 집에 가져오지 못한다면 중산층 미국인들이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게 더 어려워졌다는 말"이라면서 "중산층 복원은 '시대의 핵심 도전'으로 내가 대통령으로 추구한 모든 정책은 이 도전에 답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2014년 중간선거를 한 달 앞둔 10월 1일 오바마가 노스웨스턴대 연설에서 한 말이다. 이번 대선은 특히 코로나19 대확산의 후폭풍인 물가 상승이 중요한 화두다. 민주, 공화당은 각각 물가 인하를 통한 생활경제 여건 개선을 핵심 공약으로 강조한다. 공약으로 보면 민주당은 6대 공약 중 세 번째로, 공화당은 10대 공약 중 네 번째로 전진 배치했다. 공화당은 부자 감세를 민주당은 중산층 감세를 각각 강조하는 차이는 있다.
대선 때마다, 아니 대선 때 더욱 중산층 문제를 더욱 부각하는 것은 미국 사회가 여전히 도달하지 못한 목표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지난 50여 년 동안 중산층의 살림살이는 양적, 질적으로 악화했다. 퓨리서치 센터가 지난 5월 31일 발표한 '미국 중산층의 상황'보고서는 중산층이 1971년 61%에서 2023년 51%로 쪼그라들었다. 저소득층은 27%에서 30%로, 고소득층은 11%에서 19%로 각각 늘었다.
여전히 큰 인종별 소득격차
인종별 중간 소득 가정은 백인→다인종 가구/하와이 원주민 및 태평양 도서국 출신→히스패닉→아시아계→흑인·미국 원주민(인디언)·알래스카 출신 순으로 줄어든다. 백인(55%)이 가장 높고 흑인·인디언·알래스카 출신(46%)이 가장 낮다. 저소득 가정(24%)보다 고소득 가정(27%)이 높은 인종은 아시아계다. 백인은 저소득 24%, 고소득 21%였다.
더 중요한 지표는 전체 가계 소득 중에서 중산층이 차지했던 비중이 더 쪼그라들었다는 점이다. 1970년 29%에 불과했던 고소득층 비중이 2022년 48%로 늘어났지만, 중산층 소득은 62%에서 43%로 줄었다. 아이러니하게 중산층 회복을 '시대의 도전'이라고 강조했던 오바마 행정부 초기(2009~2010)에 역전됐다. 3인 가정을 기준으로 고소득층은 연평균 가계수입이 1970년 14만 4068달러(1억 9299만 원)에서 2022년 25만 6920달러(3억 4416만 원)로 78%가 늘었지만, 중간소득층은 6만 6417달러(8897만 원)에서 10만 6092달러(1억 4211만 원)로 60% 늘었다. 저소득층은 2만 2831달러(3058만 원)에서 3만 5318달러(4731만 원)로 증가율이 55%에 그쳤다. 지난 10년 간 물가는 32% 올랐다. 퓨리서치센터가 매년 실시한 사회·경제조사 결과를 묶어보면, 양극화의 실상이 상세히 드러난다.
결혼 할 것 "46%"
아메리칸드림을 생애 주기별로 보면 적절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 주택을 소유하고, 가정을 이루며, 안락한 노후생활을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를 낙관적으로 보는 미국민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지난 7월 월스트리트/시카고대 NORC 연구소가 성인 1502명에게 물은 결과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놀라울 만큼 컸다. 젠더나 정당 지지 성향에선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Z세대(1997~2012년생)를 중심으로 청년층에선 간극이 더 넓었다. 높은 이자율과 학자금 부채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집 마련은 미국민들에게도 갈수록 멀어지는 꿈이다. 전체 응답자의 89%가 "집은 필수적이거나 중요하다"고 답했지만, 10%만 집 장만이 어렵지 않다고 답했다. 통장 잔고(재정 현황)와 노후대책 전망은 더 심각했다. 각각 96%, 95%가 필수적이거나 중요하게 여겼지만, "달성 가능하다"는 답은 각각 9%, 8%에 그쳤다.
62%가 결혼은 아메리칸드림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답했으면서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본 응답은 47%에 불과했다. "아메리칸드림은 여전히 유효한가?" 12년 전 공공종교연구원(PRRI)이 이 질문을 던졌을 때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그렇다"고 답했지만 이번 조사에선 3분의 1 정도로 줄었다.
해리스 "민주주의 위기" vs 트럼프 "정체성의 위기"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시대는 애저녁에 끝났다. 해리스와 트럼프의 공약은 상당 부분 겹친다. 두 후보 모두 미국을 제조업 강국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더 많은 외국기업의 공장을 미국 땅에 불러들여 괜찮은 보수를 지급하는 일자리를 늘리고, 생활물가를 줄이며,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게 요지다. 해리스는 조 바이든 행정부에 이어 '공급망의 안전'을 거론하며 동맹과 우방 기업의 공장을 계속 옮길 것이다. 트럼프는 미국 땅에서 만들지 않은 제품엔 관세를 매기겠다고 협박하며, 자유무역으로 피해를 본 미국 노동자를 보호하고, 튼튼한 국경장벽으로 일자리를 빼앗고 '미국의 피'를 더럽히는 이민자들을 막겠다고 다짐한다.
해리스는 "트럼프 4년이 미국민을 분열시키고, 미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었다"면서 "트럼프가 다시 집권하면 권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며 유권자들에게 공포를 심는다. 트럼프는 "바이든 4년 동안 치솟는 물가와 열린 국경, 만연한 범죄, 어린이들에 대한 공격, 글로벌 분쟁, 불안한 안보 탓에 우리의 미래,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생활방식이 전례 없이 위기에 처했다"면서 '바이든2 행정부'를 경계한다. 그나마 고상한 언어로 '오래된 희망'을 소환하는 해리스보다 "이제 미국은 심각하게 퇴조하는 나라(공화당 공약 서문)"라는 트럼프의 현실 인식이 더 솔직한 것 같다.
두 명 모두 더 풍요롭고 밝은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몇 세대에 걸쳐 미국민이 품어 온 희망과 낙관"을 강조하는 해리스의 다짐이나, "과거의 모든 도전을 이겨냈던 '미국 정신'을 다시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트럼프의 강조점이나 공허하게 들린다. 누구도 양극화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미국민은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해리스나 트럼프 역시 아메리칸드림을 목청껏 떠들다가 슬그머니 역사의 뒤꼍으로 물러난 숱한 대통령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