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 포성 울리면 대피소 찾아야 하는 '눈물의 연평도'
"쾅, 쾅, 쾅."
지난 5일 오후 2시쯤 연평도를 쩌렁쩌렁 울린 K9 자주포의 포성이다. 전날 포사격 훈련을 예고하는 휴대전화 공지가 있었지만, 불의의 굉음은 방문객을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총성이 귀청을 울린다면 포성은 온몸을 울렸다. 거의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주민과 방문객은 물론, 섬 안의 모든 생명체가 울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여러 문이 특정 과녁을 타격하는 '동시표적사격(TOT)'은 동시에 또는 몇 초 간격으로 포성을 잇달아 토해냈다. 3개 포대 18 문의 K9 자주포는 한 발당 400만 원에 달한다는 포탄을 얼추 100발가량 뿜어댔다. 섬 내 8곳의 대피소가 개방돼 있었다.
"9.5(목) 14시경 백령 및 연평도 지역에서 우리 군이 해상사격 예정입니다. 주민 및 방문객들은 야외활동을 자제 바라며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권고합니다." (15일 11시 7분, 옹진군) 전날 포사격을 예고하며 "안전에 유의하라"고 사전 안내했고, 포사격 뒤에는 "15시 10분 해상사격이 종료됐다"고 알렸다.
9.19 남북군사합의 효력 정지에 따른 훈련의 정상화니, 올해 해상 완충구역에 첫 포사격을 한 건 북한이라느니, 멀리 떨어진 용산 국방부의 탁상 위에서나 주고받을 말이다. 북방한계선(NLL)을 이고 사는 연평도 주민에게는 결코 할 말이 아니다. 그 이유를 밝히려 한다.
이날 포사격은 올들어 세 번째. 지난 1월 5일 오전 북한이 연평도 맞은편 등산곶과 백령도 맞은편 장산곶 인근 해상 완충구역에 200여 발의 해상 포사격을 했고, 같은 날 오후 우리 군은 400여 발의 대응 사격을 했다. 국방부는 군복차림의 장관이 합참 전투통제실을 찾아 훈련 상황을 점검하는 사진을 내보냈다. 어쨌든 포문을 먼저 연 건 북측이었다. '선제 포격'의 주체가 바뀐 것은 지난 6월 26일이다. 서북도서방위사령부(서방사) 소속 해병부대가 백령도와 연평도에서 해상 사격훈련을 했다. K9 자주포와 다연장로켓 천무, 스파이크 미사일 등 290여 발을 공해상의 가상 표적에 쏘았다. 2017년 8월 이후 첫 정례 훈련이었다.
그런데 남이건, 북이건 포문을 열면 연평도 주민은 가까운 대피소를 찾아야 할까? 아니다. 상식이 무너진 건 지난 1월 5일이었다. 남북이 해상포격을 주고받은 그날 상황을 돌아보자. 북한군이 해상 포사격을 한 것은 이날 오전 9시쯤부터 11시쯤까지다. 그런데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과 백령면 사무소가 주민대피령을 발동한 건 낮 12시 13분쯤이었다. 왜 북한군의 포사격 시간에 대피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국방부 당국자의 답에 '불온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이 당국자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북한이 해안포를 쐈기 때문에 주민을 대피시킨 게 아니라, 연평도 포격 때처럼 우리 군의 해안포 사격을 빌미로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할 수 있어서 대피령을 내린 것"이라고 답했다. 주민대피령을 내린 직접적 이유로 북측의 포사격이 아니라, 우리 측의 포사격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5일 백령면과 연평면 주민에게 발송된 '대피 권고' 메시지도 같은 맥락이다. 국방부 당국자가 확인하고, 현장에서 거듭 확인한바 연평도 주둔 해병의 포사격은 주민 안전을 담보로 한다. '국민의 안전'은 윤석열 정부가 습관처럼 되풀이해 온 말이다.
그런데 국민의 안전은 금액으로 얼마나 될까? 국방장관 신원식에 따르면 달랑 '1원'이다. 남북 9.19 군사합의를 일방적으로 일부 효력 정지한 뒤 작년 11월 23일, 국회 국방위에서 버젓이 한 말이다. "(일부 효력 정지의) 이익이 1조 원이면, 손해는 1원"이라고 했다. 2018년 이후 남북 간 서해 충돌을 막아 온 군사합의를 폐기한 결과 연평도 주민이 겪어야 하는 불안과 불편, 만에 하나 발생할지 모르는 '부수적 피해'도 1원에 포함될 터.
유독 말이 현란한 이다. 당시엔 대통령의 결정을 무작정 엄호하려다가 둘러댄 요설 정도로 들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새삼 궁금해졌다. 이득과 손해를 보는 주체가 국민이라면 99원의 이득을 위해 1원의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무심코 내뱉은 말로 국민 안전의 값을 매겼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고 있을까? '국민의 군대'에서 밥을 벌던 군인 출신 안보 관료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운 말이다. 연평도는 여느 최전선이 아니다.
주민과 군인 공존하는 공간이다. 북측 석도(3㎞)와 갈도(4.5㎞), 장재도(7㎞)가 지척이다. 1차 연평해전(1999)과 2차 연평해전(2002)은 그나마 바다에서 벌어진 군과 군의 충돌이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던 북측 개머리해안이 12㎞, 무도 방사포 기지가 11㎞ 거리다. 섬 전체가 불바다가 된 까닭이다. 이후 K9 포대를 1개(5문)에서 3개(18문)로 늘렸다고 하지만 여전히 중과부적이다. 위력이 떨어질지언정 북측 해안포가 10배 이상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사시 북측이 포격을 멈추지 않으면, 선박을 댈 수 없는 곳이다. "1원"을 운운한 예비역 장성의 뇌리에 최전방 주민은 단연코 없었다. 14년 전 포격의 흔적은 섬 곳곳에 내재화돼 있었다.
당시에도 화근은 우리 군의 K9 포사격이었다. 북측이 이날 오전 전통문을 통해 우리 군의 호국훈련을 거칠게 항의했지만 묵살했다. 군 지휘부는 북측의 이상 동향을 보고받고도 무시했다. 북측 미그-23기 5대가 정찰비행을 한 뒤 포격이 시작된 것은 오후 2시 34분. 북측은 세 차례에 걸쳐 1시간 동안 포격을 퍼부었다. 민간인 지역 7곳도 비켜 가지 못했다. 해병 2명과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다쳤다. 전파된 건물이 49채, 부분 파손된 건물이 400채였다. 전체 건물 800채의 절반이 피해를 본 것.
섬 곳곳이 불길에 휩싸였지만, 소방차는 1대뿐이었다. 다음날 인천에서 급파된 화물선이 소방차를 실어 와 진화할 수 있었다. 다행히 부두시설이 파괴되지 않은 덕분이다. 정부 지원으로 새집과 새 건물이 늘어났다. 학교 건물은 연평 초중고등학교 1곳. 건물 안 초등학교 지하에는 도서관과 놀이 시설을 갖춘 100평의 '희망대피소'가 생겼다. 시내 1호 대피소에는 간이 진료소도 갖췄다. 그러나 연평도가 고향인 해설사는 "주민들은 굉음만 울려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라고 전한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훈련을 한다"는 말이 적어도 이곳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안보는 교육하고, 평화는 전망한다. 관광의 주제이기도 하다. 175번지의 피폭 가옥 3채를 보존하고, 바로 옆에 안보교육장을 세웠다. 해주만을 바라보는 평화전망대에는 17세기 시작한 조기잡이 전성시대부터 섬의 역사를 담았다. 1969년 처음 점등한 연평도 등대는 남북관계와 운명을 함께했다. 조기 파시가 열릴 정도로 은성했던 바다를 한동안 비췄지만, 어업한계선이 덕적도로 내려가면서 쓸모가 없어지자 1974년 소등했다. 2019년 재점등했지만, 등대 구실은 못 한다. 어선을 띄울 수 없는 밤바다에 등대 불빛은 장식품일 뿐. 불빛은 남쪽만 비추도록 인위적으로 조정했다.
평화와 안보를 걷어내도 볼거리는 많았다. 연평도(延坪島)는 평평하게 이어진 섬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분단 이전에는 황해도 해주군에 속했다. 평화공원 옆 나즈막한 봉우리 정상에는 이 층 누각의 조기 역사관이 새 단장 중이었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가래칠기 해변은 절경이었다. 병자호란 어간에 조기잡이 어살법을 처음 알려준 임경업 장군을 모신 충민사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소연평도의 얼굴바위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섯 가지 표정을 짓는다. 풍요와 전쟁, 분단과 최일선, 평화로운 일상 속 상흔, 지난한 역사의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연평의 얼굴'을 연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