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미·러 데탕트로 중국 견제? 러·중의 생각은 달랐다

gino's 2025. 3. 15. 23:44

"미·러 관계 정상화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러시아가 중국과 멀어질 거로 생각한다. 환상이다. 러시아는 낙관적 도취감(euphoria)에서 외교정책을 펼치지 않는다. 미국도 우리가 (중국과 맺은) 법적, 정치적 약속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12일, 라브로프)

"중러 우호의 역사적 논리는 제3자의 훼방은 물론 어떤 국제적 환경 변화에도 바뀌지 않는다. 양국은 ‘비동맹-비대치-제3국 불겨냥’의 원칙에서 강대국 관계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있다. 지정학적 게임에서 변수가 아닌 상수다." (7일, 왕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묘사한 마트료시카라는 러시아 전통 목제 인형이 2024년 11월 21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념품 가게에 전시되어 판매되고 있다. 2024.11.21. 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계기로 국제질서의 향방을 놓고 가정과 추측이 난무한다. 대표적인 가정은 미·러 관계 정상화가 우크라 전쟁 뒤 한층 가까워진 러‧중 관계에 쐐기를 박을 것이라는 이른바 ‘역(reverse) 닉슨 전략’이다.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미 행정부의 미·중 데탕트가 소련을 견제했듯이 미·러 데탕트가 중국을 경제적, 안보적으로 견제할 것이라는 분석. 정작 러시아와 중국은 이러한 전망에 그야말로 '쐐기'를 박고 있다. 낡은 관점에서 바뀐 시대를 읽고 있다고 지적한다.

'역 닉슨 전략'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중·러 전략적 삼각관계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러시아와 중국을 동시에 겨냥한 탓에 러·중 관계가 깊어진 만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러 접근이 흐름을 바꿀 것이라는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뒤 관세전쟁을 재개하면서 미·중 관계가 가팔라지는 반면, 미·러가 결합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분석의 근거로 제시된다.

러·중 관계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다. 지정학적으로는 중앙아시아를 두고 경쟁 관계인 데다가 역사적 불신도 만만치 않다. 제정러시아의 연해주 확보와 냉전시대 중·소 분쟁의 경험도 갖고 있다. 우리에겐 한반도 주변의 두 마리 코끼리다. 러시아는 우크라전 이후 경제적으로 대중국 의존도가 높아졌음에도 중국의 동해 진출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탈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시대 국가 간의 관계, 특히 강대국 관계는 결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미·중·러는 필요에 따라 각기 또는 따로 움직이고 있다.

중국 외무부 장관 왕이(오른쪽)가 7월 25일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열린 제57회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 외무장관 회의 및 관련 회의의 사이드라인에서 러시아 외무부 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와 악수하고 있다. 2024.7.25. AFP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세 차례 대면 정상회담을 하고, 양국 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또는 '전천후 관계'를 거듭 확인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귀환한 올해 들어서는 더욱 긴밀하게 소통라인을 유지하고 있다. 우크라 종전 협상에 불을 당긴 지난 2월 12일 트럼프-푸틴 간 90분 통화 뒤 푸틴 대통령이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대화 내용을 공유한 상대는 시 주석이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한 28일에는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서기가 베이징을 방문, 시 주석에게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논의와 최근의 미·러 접촉 상황을 전달했다. '역 닉슨' 전망이 되레 러‧중 관계를 더욱 밀착시키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성급하게 미·중·러 삼각관계의 변화를 예견하기보다 실제로 흐르는 기류를 확인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변화의 출발점이었던 트럼프-푸틴의 통화는 90분 동안 이뤄졌다. 공교롭게 트럼프 취임 다음 날인 지난 1월 21일 푸틴-시진핑의 통화 시간도 90분이었다. 두 정상은 서로 '친구'라고 부르며 우의를 과시했다. 우크라 전쟁의 조속한 종전과 미·러 관계 개선, 미·중 관세전쟁은 트럼프가 유세 때부터 강조함에 따라 예상된 변수 또는 상수였다. 통화 뒤 양국이 각각 발표한 성명은 '트럼프'를 언급하지 않았으되 공동보조를 유지할 것을 거듭 확인했다. 시 주석은 "양측은 전략적 협력의 심화와 상호 단호한 지지, 양국의 합법적인 이익의 보호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고, 푸틴은 "강대국 관계가 어떻게 돼야 하는지 견해를 맞췄다"고 말했다. 푸틴-시진핑은 우크라전 발발 3주년인 2월 24일에도 통화를 했다.

우크라전은 분명 러‧중 관계 변화의 계기가 됐다. '한계 없는(No limit) 협력'을 다져왔다. 중국은 러시아산 원유와 가스를 구매하는 등 지난 3년간 경제 협력을 늘렸지만, 동시에 우크라에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양다리를 걸쳤다. 양국 관계의 성격에 대해서는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겸 외교부장)의 지난 7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기자회견문과 12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의 미국 언론 인터뷰 전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개된 텍스트'다. 서방 언론의 해석과 사뭇 다른 현식 인식이 엿보인다. 왕이 부장은 전형적인 외교의 언어로 군더더기 없이 정리했고, 라브로프 장관은 비교적 자유롭게 의견을 내놓았다. 양국 관계의 성격에 대해선 왕이의 설명이 졸가리를 갖추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11일 러시아 외교부 리셉션 하우스에서 페리둔 시니리오글루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사무총장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5.3.11. TASS 연합뉴스

그는 미·러 관계 개선이 러·중 관계에 미칠 영향을 묻는 이타르타스 통신의 질문에 "국제 환경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중·러 관계의 역사적 논리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수교 75주년이던 지난해 세 차례 대면 정상회담을 했으며 올해는 반파시스트 세계전쟁(2차 대전) 승전 80주년을 맞아 중국과 러시아가 각각 아시아(일제)와 유럽(나치 독일)에서 파시스트의 위협에 맞서 싸운 것을 함께 기념할 것이라고 전했다. 우크라전 종전 논의에 대해서는 "중국은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환영하고 지지하지만, 위기의 복잡성을 외면해선 안 된다"면서 "3피트 두께의 얼음이 하루 추위로 만들어지지 않듯이, 녹이려면 하룻밤으론 부족하다"고 말해 평화 정착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해결 과정에서 △상호적이고 동등한 평화와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안보 불안정 위에 자신의 안보를 구축해서는 안 된다는 불가분의 안보 원칙도 강조했다.

라브로프 장관도 '역 닉슨 전망' 관련 질문에 러시아가 동쪽의 중국과 인도, 아프리카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라는 전망은 '환상'이라고 잘라 말했다. "현 상황은 1972년과 완전히 다르다"라면서 "미국도 우리가 중국과 발전시켜 온 법적, 정치적 약속을 배반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난 2월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미·러 장관급 회담에서 주고받은 말을 전하면서 시대의 차이를 우회적으로 짚었다. 미·중 데탕트는 헨리 키신저의 평생 지론이던 '세력 균형' 논리에서 비롯됐다. 라브로프는 이를 '이익의 균형' 논리로 대체했다.

라브로프에 따르면 미국 측 대표였던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마이클 왈츠 국가안보보좌관, 스티브 위트코프 중동특사는 "트럼프 행정부 외교정책의 근본이 국익 추구라는 점에서 러시아와 정상적인 관계를 원한다"고 말했다. "미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의 국익이 같기는커녕 50%나 그 이하라는 점도 이해한다"고 털어놨다. 미국 대표단의 이어지는 말에서 관계 정상화에 나서는 기본 입장이 드러난다. 루비오 등은 "이해가 일치하고 상호 이익이 되는 실질적인 분야가 있다면, 경제 프로젝트이건 인프라 프로젝트이건 다른 것이건 기회를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가 상충한다면 책임 있는 나라들로서 재앙이 될 군사적 대치 상황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7일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별도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왕 부장은 미국의 틱톡 퇴출 움직임을 겨냥해 비판했다. 2024.3.7. 로이터 연합뉴스

라브로프는 이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논리다. 바로 푸틴 대통령이 원하고, 외교정책으로 실행하는 방식"이라고 답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이후 다른 나라에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이익의 균형을 찾아왔다. 완벽히 같은 논리"라며 맞장구를 쳤다는 것이다. 정확히 트럼프의 아메리카 퍼스트와 푸틴의 '이익의 균형'이 만난 지점이다. 라브로프는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에 대해서도 같은 접근, 같은 논리를 내세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손 떼라고 하겠지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 보자"라고 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라브로프는 핵무기와 안보 이슈를 논의하는 미·중·러 회담을 제안한 것과 관련, "우리는 상호 존중과 대등하고, 편견 없는 해결에 토대를 두는 한 어떤 형태의 만남에도 열려 있지만, 우리의 중국 친구들이 관심이 있을지는 그들이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트럼프와 푸틴이 국방예산을 50% 줄일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중국이 응답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구조다. 트럼프가 미·중·러 핵 회담을 제안하는 것은 2018년 자신이 파기했던 미·러 중거리핵전력(INF) 조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트럼프는 러시아의 장거리 순항미사일 개발을 빌미로 협정을 파기하면서 "중국이 가입돼 있지 않은 것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2일 통화를 하고 우크라전 종전 협상에 즉각 착수하기로 합의했다. 사진은 2018년 7월 16일 핀란스 헬싱키에서 이뤄진 미러 정상회담에서 악수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루비오가 언급한 '다극화된 세계'에 대해서도 "내 생각에 다극화는 상당한 시간 동안 진행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4년(트럼프 임기)이 무언가 장기적으로 일을 하기에 충분한지 따져봐야 한다"라면서 2026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하면 "심지어 2년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전 이후 각국이 제각각 편익을 선택하면서 '가치외교'와 멀어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튀르키예와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 각국이 결정했던 '편익 동맹(Aliance of convenience)'이라는 말이 생긴 배경이다. 동아시아 분단국에서만 남의 일이었다. 트럼프 귀환 뒤 벌어지는 미·러 접근은 편익 동맹이 강대국 정치에 적용될 것을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