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젤렌스키에 "군수장비 더 줄테니 승전하길"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방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국권 회복에 대한 지지"는 개전 이후 키이우를 다녀간 각국의 숱한 지도자들이 해온 말이다. 전 세계 국가수반 중 지극히 예외적으로 재건사업에 큰 관심을 표명했지만, 미래의 이야기다.
최대 현안은 지난달 시작한 회심의 반격전이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는 전선 사정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당장 고양이 손이라고 빌리려는 절박한 순간에 처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역시 당장 전장에 투입할 장비다. 여느 나라와 달리 대한민국이 많이, 빨리 제공할 수 있는 장비가 가장 탐났을 것이다. 바로 지뢰 탐지·제거 장비이다. 반격전의 최대 장애물이 러시아가 촘촘히 설치해놓은 지뢰밭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공한 브래들리 장갑차도, 독일의 최신 레오파르트 전차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 러시아군의 대 탱크, 대인지뢰는 물론 인계철선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와 크림반도를 잇는 요충지인 자포리자 주 전선에 지뢰가 가장 많이 매설됐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5일 현지 발로 전했다. 미국이 제공한 M-58 지뢰제거장비(MICLIC)와 독일의 비센트 지뢰제거탱크가 있지만 수량이 문제다. 그나마 상당수가 파괴됐다. 전선이 개활지여서 적의 공격에 쉽게 노출된다. 우크라이나 군 수뇌부는 반격전 개시 전 서방에 요구한 지뢰제거장비의 15%만 제공받았다고 말한다.
정부는 지난 9일 K-330 다목적공중급유수송기로 보낸 우크라이나 4차 군수품 지원에 지뢰탐지기를 이미 보냈다. 이번엔 더 보내기로 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16일 키이우 브리핑에서 안보·인도·재건 분야 등 9개 추가 지원 패키지를 마련했다고 전하면서 특히 지뢰 탐지·제거기는 우크라이나의 수요가 절박해 지원을 확대키로 했다고 밝혔다. 지난 5월 서울을 찾았던 올레나 젤렌스카가 가장 절실하게 지원을 요청했던 품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 입장에서 대한민국의 지뢰제거장비 제공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관계파탄의 출발점으로 경고해온 살상무기나 포탄은 아니지만 현 단계 전쟁 국면에서 우크라이나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피해를 극대화할 장비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상대국의 비우호적인 말과 행동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다. 서랍에 넣어두듯 차곡차곡 쌓아놓을 뿐이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처럼 비우호적 에피소드가 쌓이면, 전격 행동에 나선다. 2016년 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의 성주 배치 당시 중·러가 모두 반발했지만, 보복에 나선 것은 중국뿐이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이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방침을 조건부로 밝히자 러시아 외교부는 "'무기 지원'을 공개적인 반러시아 적대행위로 강조하겠다"며 선을 그었다. 외교 경로를 통해 한국 측에 해명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는 시민언론 <민들레> 인터뷰에서 "무기공급 가능성을 제기한 것 자체가 한국이 일관되게 보여온 비우호 입장의 반영"이라며 대통령의 말에 대응치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이 굳이 '안전 장비'라고 칭한 지뢰제거장비 제공은 러시아에 '비우호적 행동'의 하나로 간주될 것이 분명하다.
러시아 외교부는 17일 현재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이번 주 마리아 자하로바 대변인의 주례 브리핑에서 언급할 수는 있다. 러시아는 그동안 각국 정상의 키이우 방문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대신 대러 제재 및 대우크라 무기‧탄약 지원 여부를 주목해왔다.
한·러 관계의 악재는 '우크라이나 평화 연대 이니셔티브'를 통해 한국이 제공키로 한 안보·인도적·재건 지원 내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밝힌 '말'이 더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지한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북한의, 공산 전체주의 세력의 불법 침략을 받았던" 기억을 소환해 "한국이 한강의 기적으로 일어났듯이 (우크라이나)'드니프로 강의 기적'이 반드시 이뤄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15일 한·우크라 정상 공동언론발표문)
한국전쟁은 요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기획한 전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가 소련의 정통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건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과 국제사회의 역할을 떠맡겠다고 밝힌 것은 사실상 러시아를 적으로 삼겠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아무리 재건사업에 '빨대'를 꼽더라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던 비유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15일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안보와 승리를 지금 담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군사 지원의 수준을 늘릴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전했다. 우리 대통령실이 밝힌 한·우 정상회담 '공동언론발표문'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지난해 방탄복, 헬멧과 같은 군수물자를 지원한 데 이어, 올해도 더 큰 규모로 군수물자를 지원해 나갈 것"이라고만 표현했다.
우리 대통령이 특히 젤렌스키의 '우크라이나 평화공식(Peace Formula)'에 공감을 표한 것은 우크라이나의 승전을 전제한 것과 다름 없다. 젤렌스키가 지난해 11월 19일 핼리팩스 국제안보포럼에서 발표한 '평화공식'은 평화협상 참가의 10대 조건이다. △크림반도를 포함, 1991년 독립 당시의 영토 100% 복원(5항)과 △민간인 학살 책임자의 전쟁범죄 단죄(7항) 등을 담고 있다. 러시아의 괴멸적 패전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정부의 붕괴 전에는 실현이 불가능한 시나리오다. 젤렌스키의 '희망 사항'에 가깝다.
대통령의 냉전 소환은 그렇지 않아도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러시아 및 중국과 끝간 데 없는 갈등 또는 경쟁을 유지할 의지를 보이는 국제정세에 비추어보아도 상서롭지 못하다.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장기간 진영 간 대치가 계속될 것을 예고하는 상황이다. 미국의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은 지난해 4월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미국의 목표가 "러시아의 약화"임을 분명히 했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최근 "미·중 경쟁이 우리 생애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의 양과 질을 개선하고, 한·미·일이 전략자산을 전개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안보 불안은 이미 구조화하고 있다. 대화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한 악화일로를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한은 빌뉴스 나토 정상회의 당일인 지난 12일 성능이 개선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나토를 '냉전의 산물'로 보는 중국이 나토의 동진을 반대해왔지만, 대통령은 되레 나토와의 자발적 협력을 넓히고 있다. 러시아에 나토의 동진은 우크라이나 침공의 핵심 이유이자, 개전 뒤 적대 세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반도 안보가 불안한 시점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리투아니아-폴란드-우크라이나 순방 동안 일도양단하듯 반러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은 한반도 안보에 역효과를 부를 뿐이다. 러·중과 공동의 이해라는 거대한 영토를 자진해서 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이번 순방 중 쏘아 올린 친미·친서방 노선이 어떠한 '안보적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무겁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