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40년 뒤, 7월4일

칼럼/여적

by gino's 2012. 7. 4. 16:10

본문

김진호 논설위원


 


1972년, 분단 한반도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으로 가 북한의 수장들을 만났다. 김영주 북한 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 ‘조국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답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김일성 수상과의 면담이 이어졌고, 북에서는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로 와 박 대통령을 만났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마오쩌둥 중국주석 간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데탕트 시대가 시작되면서 생긴 변화의 조짐이었다.



평양측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 대리 박성철과 악수하는 박정희대통령 (경향신문DB)



이후락과 김영주는 그 해 7월4일 각각 ‘(서울과 평양) 상부의 뜻을 받들어’ 사상 첫 남북공동성명을 내놓았다.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은 여전히 남북대화의 뼈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1000만 이산가족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감격시대는 이듬해 8월 끝났다.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등을 제안한 남의 6·23선언이 나온 뒤 북이 ‘두 개의 조선’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대화를 끊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남도, 북도 염불보다는 잿밥에 맘이 가 있었다. 



북은 대화공세를 전형적인 통일전선전술로 삼아 남남갈등을 조장하고, 남의 국제적인 고립을 획책했던 것으로 미국 우드로윌슨센터가 최근 발굴한 북한의 외교문서에서 드러났다. 남은 국내 정치에 활용하는 데 급급해했다. 박정희는 냉전구도가 데탕트로 풀어질 조짐을 보이자 북한의 평화공세가 또 다른 위협이라면서 그 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내놓았다. 북의 도발위협이 아니라, 평화공세 탓에 안보위기가 발생했다는 해괴한 논리였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가 최근 논문 ‘7·4 남북공동성명의 재해석’에서 인용한 닉슨 행정부의 외교문서들은 박정희 정권이 남북관계의 진전을 얼만큼 마뜩지 않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6·15 공동선언의 추억이 까마득해진 탓인지 남과 북은 여전히 평행선이다.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어제 공동성명 40돌을 맞아 ‘전체 조선민족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통해 ‘우리민족끼리’ 시대가 막힌 게 온통 이명박 정부 탓인 양 예의 프로파간다를 늘어놓았다. 이명박 정부는 미·중 간의 잠재적 군사패권 다툼에 적극 뛰어들었다가 한·일 정보보호협정 파동의 뒷감당을 하느라 코가 빠졌는지, 아무런 입장문도 내놓지 않았다.

'칼럼 > 여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부 제조기’  (0) 2012.07.20
시신세탁  (0) 2012.07.12
부자의 자격  (0) 2012.07.03
아기상자  (0) 2012.06.15
기억의 장례  (0) 2012.06.12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