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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문제 '주도자'에서 '중재자'로, 서글프지만 현실

한반도, 오늘

by gino's 2018. 9. 2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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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일정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일 양강도 삼지연 공항에서 공군2호기에 탑승해 활주로에서 배웅하는 북측 인사들을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리설주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서성일기자 centing@kyunghyang.com



 #남북의 길, 열강의 길

 “미국은 위대한 힘과 인내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동맹국들을 방어해야만 한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로켓맨은 자신과 자신의 정권을 놓고 자살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미국은 준비돼 있고, 용의가 있으며 능력도 있다. 하지만 (군사행동이) 필요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북한은 비핵화만이 유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미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9월19일 오후 뉴욕 유엔총회 연설에서 내놓은 공개 경고였다. 인구 2500만명의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한반도의 추석을 황폐하게 했다. 미국 국방력의 위력을 유독 강조했던 트럼프는 실제로 대북 군사행동의 다양한 선택지들을 심각하게 검토했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만 1년이 된 올해 9월19일 오전, 남북 정상은 돌이킬 수 없는 평화의 길을 제시했다. 한반도 전역의 하늘과 땅, 바다에서 실질적인 전쟁 위험을 제거하고 근본적인 적대관계 해소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교류와 협력을 더욱 증대시키기로 했다. 이산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한편, 문화·예술·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과 교류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한반도를 ‘핵위협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실질적인 진전을 이어가자는 데도 인식을 같이했다. ‘9월 평양공동선언’의 요지다. 최악에서 최선까지 위태롭게 보내온 시간이었다. 남북 정상의 공동 기자회견문에는 ‘평화’가 넘실댔다. 문 대통령을 환영한 북한 주민들도 “조국통일”과 함께 “평화번영”을 외쳤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남과 북만의 전쟁이 아니었듯이, 한반도 평화 역시 남북이 굴려 갈 역사의 수레바퀴와 주변 열강이 굴려 갈 수레바퀴의 지름이 정확하게 일치해야만 움직일 수 있다. 각국 언론으로 하여금 한반도발 핵전쟁의 음울한 시나리오까지 쓰게 했던 지난해의 대치국면을 벗어났음에도 열강의 수레바퀴는 여전히 겉돌고 있다. 그걸 일치시키는 것이 ‘수십년 세월 지속되어 온 처절하고 비극적인 대결과 적대의 역사를 끝내기 위한 군사분야합의’를 완성하고, ‘통일의 대하(大河)가 더는 거스를 수 없이 삼천리에 용용히 흐르도록 하는’ 유일한 길일 게다. 이 시점에서 열강의 길을 재삼 둘러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일 양강도 삼지연 공항에 도착해 환영나온 현지 주민들의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서성일기자  centing@kyunghyang.com



 평화담론은 전파력이 강한 것 같다. 남북 정상이 공동기자회견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평화’는 국제사회 반응에서도 키워드가 됐다.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20일 평양공동선언을 환영하면서 “평화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고, 어렵게 얻은 평화의 기회를 다시 잃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도 실질적인 행보에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중·러의 속내는 다를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미국’에 맞서 함께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동방경제포럼이 열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로 어깨를 두드렸다. 시 주석은 “중국에는 불행할 때 누가 친구인지 드러난다는 말이 있다. 러시아에도 ‘친구는 잔치에 오는 사람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치고 한 말이다. “우리는 러시아 동료들과 함께 국제문제에서 협력을 강화할 것이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정책과 보호무역주의에 맞서기 위해…”라고 덧붙였다. 한반도 문제는 당연히 거론됐다. 푸틴 대통령은 “한반도 상황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일치한다.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치들을 취할 것을 촉구했다”고 전했다. 두 정상이 ‘전략적 우의’를 거듭 확인하던 순간 30만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합훈이 벌어지고 있었다. 러시아 영토에서는 1981년 이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이며, 외국군으로는 유일하게 중국이 대규모 러시아군 훈련에 참가했다.


지난 9월13일 서울에서 열린 서울안보대화(SDD)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는 알렉산더 니키틴 므기모 소장.               김영민기자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중·러

 ‘평양공동선언’이 발표된 19일 시 주석은 “여러 나라가 직면한 안보 위협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전쟁 위협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면서 중국은 “세계평화의 건설자이자, 세계발전의 기여자, 국제질서의 유지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아직은 희망사항이다. 중국이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할 국력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미국과 서방은 ‘중국 제조 2025’를 기치로 첨단기술을 장착한 채 일대일로(RBI)를 타려는 중국몽의 여정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은 지난 3월 포문을 연 무역전쟁을 확대하면서 중국의 국가발전전략의 핵심을 파괴할 기세다. 그러나 어쩌랴. “중국은 아직 군사적, 경제적으로 미국에 맞설 힘은 없어도, 대북 정책과 같은 작은 분야에서 미국에 고통을 줄 힘은 갖고 있다.”(알렉산더 니키틴 모스크바 국제관계연구원 유럽·대서양센터 소장) 


 트럼프가 ‘화염과 분노’ ‘북한의 완전한 파괴’와 같은 충동적인 말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대북 전략과 관련해 어느 정도 미국 제도권의 지지를 받아온 것은 ‘최대 압력’이 통했다는 평가 덕분일 게다. 지난해 대북 압력 전선에 중국을 동승시킨 것이 주효해 북한이 올해 들어 대화국면으로 전환했다는 분석이 맞다는 걸 전제로 한 평가다. 하지만 트럼프의 본심이 단순한 대중 무역수지 개선이 아니라 중국 성장의 아킬레스건을 끊어놓겠다는 의도가 분명해진 이상 중국은 더 이상 미국의 대북 압박 노선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지난 13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서울안보대화에 참석한 니키틴 소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 인민의 생활을 개선 또는 악화시킬 수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다”라면서 “중국은 이미 겉으로는 안보리 대북제재를 준수한다고 하면서도 부드러운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고 단언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만난 에이브러햄 덴마크 미국 우드로윌슨센터 국장 역시 “중국은 더 이상 북한 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며 “한반도 분단을 유지하는 쪽으로 전략적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중·러를 함께 한반도 문제 해결 마당에 초대하는 것은 가장 큰 숙제다. 이 역시 미국의 리더십이 필요한 대목이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북한의 선 비핵화 요구를 접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9일 대집단체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하기 위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게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 들어서자 평양 주민들이 두 지도자를 환영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김 위원장의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을 글썽인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서성일기자  centing@kyunghyang.com



 #“지켜보자”는 트럼프, 트럼프를 지켜보는 세계

 트럼프는 남북정상회담 결과를 환영하면서도 일방주의적인 사고를 내보였다. 19일 “김정은 위원장이 핵사찰에 동의하고 국제 전문가들의 참관하에 시험장과 (미사일)발사대를 영구 폐기하기로 합의했다”는 트위터 메시지를 날렸다. “핵사찰(Nuclear inspection) 합의는 최종 협상에서 다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동안 로켓 시험발사나 핵실험이 없을 것이며, 영웅들(미군)의 유해는 계속 미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북한과 남한은 2032년 올림픽을 공동주최키로 했다. 매우 흥분된다”라고도 언급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아예 “핵사찰 전문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날 것을 북측 대표자들에게 요청했다”고 밝혔다. 북·미가 공개하지 않은 이면협의 과정에서 ‘빈 회담’에 합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양공동선언 5조2항은 미국이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을 영구 폐기할 용의가 있다고 명시했다. 미국은 ‘상응조치’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싱가포르 대좌에서 트럼프가 약속한 것으로 전해진 종전선언도 말하지 않고 있다. 북한의 요구에는 귀를 닫고, 비핵화 요구만 말하는 일방적인 접근으로는 의미 있는 결과를 끌어내기 어렵다. 트럼프는 이번에도 “북한을 지켜볼 것”이라고 했지만, 이번엔 세계가 미국을 지켜볼 때다.


 #주도적 역할인가, 중재자 역할인가 

 한반도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이 각기 다른 궤도를 돌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참여정부는 북핵 6자회담 구도 안에서 ‘적극적·주도적 역할’을 자임했다. 당시 중재자는 의장국인 중국이었다.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 스스로 중재자의 소임을 다짐하고 있다. 방북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비핵화는 우리가 주도하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와 북측의 상응조치 요구 사이에서 어떻게 접점을 찾을지 김 위원장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말했다. 각국 언론도 문 대통령을 ‘중재자’로 지칭하면서 북·미 회담을 재가동시킬 역할을 기대해왔다.

 ‘평양공동선언’ 뒤 회견에서도 김 위원장이 공히 평화·번영을 이야기하면서도 통일과 분단의 비극을 강조한 것과 달리 문 대통령은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거듭 부각시킨 이유일 게다. 핵문제와 평화체제는 한반도 거주민 모두의 문제다. 한국 대통령이 중재자를 자임한 것은 객관적으로 틀린 말인 동시에 정서적으로 서글픈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맞는 말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의 현주소가 있다. 


#다시 유엔 무대에서 맞을 진실의 순간

 18일(현지시간) 개막한 73회 유엔총회 안팎에서 벌어질 협상과 타협의 공간에서 문 대통령의 중재자 역할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어느 때보다 관심이 쏠리는 시간이다. 한·미 정상회담은 24일로 일정이 잡혔다. 지난해, 많은 한반도 거주민들은 전쟁 대비 물자를 사들이면서 추석을 맞았다. ‘미국이 전쟁을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의 소설가 한강의 뉴욕타임스 기고문이 화제가 됐다. 올 추석은 그나마 희망의 단서나마 안고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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