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년 원산 시민회 역사에서 가장 힘들고 암울했던 시간이었습니다.”
함경남도 원산시민회(회장 오손석) 제77차 정기총회 및 원산장학회(이사장 김기병) 제54회 장학금 수여식이 지난 5월 28일 서울 구기동 이북5도청 5층 강당에서 열렸다. 2020년 1월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뒤 소수 약식회의가 한차례 있었지만, 정식 총회가 열린 것은 꼬박 3년 만이다.
총회에는 시민회 회원들과 이주홍 함경남도중앙도민회 회장, 이진규 함경남도 도지사, 박동원 명예시장 등 12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4년 임기를 마친 이세영 전 회장은 인사말에서 “코로나 기간의 긴 터널에서 이제 빠져나오게 된 것 같다”라면서도 건강 탓에 함께 하지 못한 원로 회원들을 거명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한대종 수석부회장의 사회로 진행된 총회에서는 2021년도 사업 결과 보고 및 감사, 결산 보고가 진행됐다. 김기병 이사장은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애향심이 남다른 실향 3세 대학생 4명에게 200만 원의 장학증서를 각각 수여했다. 올해는 이채영(동덕여대 패션디자인과 4), 배성웅(경희대 행정학과 2), 이상연(한라대 무역통상학과 2), 박진형(한국교통대 기계공학과 2)이 ‘고향의 마음’을 받았다.
총회에서는 특히 임금자 회원(88)이 지난 1월에 내놓은 기탁금(약 5억원)에 힘입어 시민회 터전을 마련하게 됐다는 낭보가 보고됐다. 사단법인 원산시민회(이사장 최복실)는 서울 청량리의 신축 오피스텔 2실을 매입, 내년 1월 입주한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30년 봉직한 임 회원은 최근 낙상을 당해 주변의 부축을 받으면서 총회에 참석했다. 원산 루씨고녀 25회 동기인 최복실 이사장(90)은 “임 여사는 평생 차 한잔 사지 않은 지독한 노랭이었다”라면서 “그렇게 자기 옷 한 벌 안 해 입던 사람이 몇 년 전 장학금 2000만원을 덜컥 내놓아 놀랐는데, 이번에 더 큰 돈을 기탁했다”라고 치하했다.
오랜만에 총회가 열렸지만, 마냥 기쁜 날은 아니었다. 총회와 이어진 오찬 자리 내내 함께하지 못한 회원들에 대한 아쉬움이 흘렀기 때문이다.
최 이사장은 “총회를 앞두고 루씨고녀 동창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선배님 20여 분이 다 돌아가셨다. 전화를 다 돌리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한때 70명, 100명 모이던 루씨 동창회였는데 이제는 내 동기들도 자식의 부축을 받아야 나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세영 전 회장은 퇴임사에서 “오늘 (5도청이 있는) 언덕길을 올라오면서 좋은 말씀을 해주시던 어르신들을 뵐 수 없다는 생각에 맘이 안 좋았다”라면서 “어제까지 오시겠다던 김완규 시민회 고문님도 못오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인사말과 격려사, 축사에 빠짐없이 나온 열쇳말은 ‘건강’과 ‘운동’이었다. 누구나 환갑을 지내면서 건강을 화두로 삼고 살아간다. 하지만 실향민 어르신들의 건강 덕담은 ‘고향 가는 그날까지’라는 전제가 붙어 있다는 점에서 궤를 달리한다.
이주홍 회장은 “이리 고향과 멀리 떨어진 쓸쓸한 이산가족의 행사가 아니라 고향땅에서 모일 생각만 해도 감격이 용솟음친다”라면서 “(적절한)운동과 식사로 통일의 그날까지 건강 유지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4차 코로나 백신도 꼭 맞으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이진규 지사도 “다음 시민회는 원산 명사십리에서 흩어진 가족들과 함께 열자”고 제안했다. 이 지사는 “1924년 낙원동에서 출범한 시민회가 오늘에까지 이르렀다”라고 술회하면서 “실향 4세까지 포함해 함남도민들이 200만 명에 달한다”고 소개했다.
롯데관광개발 제주 드림타워 복합리조트 회장을 겸하고 있는 김기병 이사장은 고향의 미래비전을 제시했다.
김 이사장은 "2018년 방북 당시 평양에서 노동당 고위인사를 만나 (북한이 개발한) 원산 갈마지구와 마식령 관광지를 ‘남쪽 사람들이 아니면 누가 가겠는가’라고 물었다”라면서 “북한이 얼마못가 문을 열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산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은 벤토에 고구마를 싸온다고 들었다. 결국 원산에서 돈을 쓰는 건 남쪽 사람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9세 때인 1946년, 철원까지 열차 편으로 이동해 산을 타고 38선을 넘어온 김 이사장은 “노동당 고위인사는 그런 나를 ‘원산에서 이사 간 사람’이라고 표현하더라”고 회고했다.
총회가 길어지자 함남도 내 다른 시군 대표들 사이에서 “아니 원산 사람들은 사람을 굶기오?”라는 볼멘소리가 나와 웃음을 자아냈다. 구기동 입구 한옥마을 2층에서 열린 오찬에는 원산인들의 모임답게 가자미식해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