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podbbang.com/ch/6644?e=22697101




지난 18일 남측 방문단을 실은 버스 행렬이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에서 터널을 지나고 있다. 140여㎞ 구간에 18개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물리적인 길은 이미 놓여 있다. 하지만 서울이 평양으로 가거나, 평양이 서울로 오려면 창의적인 생각의 길을 놓아야 할 것 같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우리도 아이들에게 좋은 옷 입히고, 좋은 신발 신기고 싶다.” 


2005년 7월 북측이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서울에서 열렸던 제10차 경제협력추진위(경추위) 회담장에서다. 북측은 지하자원 개발 투자를 보장하고 광산물을 제공할 테니, 남측이 경공업 원자재를 제공해달라고 제안했다. 평양 방문길에 누구나 아이들의 남루한 입성을 보던 시절이었다. 북측의 안타까움이 밴 말이자, 민생경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북측은 그동안 남측이 해외에서 수입하는 광산물을 조사했다면서 그중 아연·마그네사이트·인회석 정광·석탄 등 5가지 광물의 제공을 약속했다. 남측이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이른바 서로 갖고 있는 것을 융통해 부족한 것을 채우자는 유무상통(有無相通) 거래가 실현됐다. 개성공단 개발이나 철도·도로 연결과 같은 메가 프로젝트보다 의미 있는 관계맺기 방식이었다고 본다.


그 이듬해부터 남측은 의류·신발·비누의 원자재를 넘겨주었고, 북측은 그중 3%에 해당하는 아연괴를 먼저 건넸다. 나머지는 5년 거치 10년 상환을 하기로 하고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업 자체가 중단됐다. 


지난 10일부터 18일까지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제4회 아리스포츠컵 15세 이하 유소년 축구대회를 계기로 열흘간 평양을 다녀왔다. 뜬금없이 13년 전 경추위 합의를 떠올린 것은 평양을 돌아보면서 뇌리를 떠나지 않은 의문 때문이다. 


평양~개성 고속도로 중간쯤 은정휴게서 앞마당에서 본 황해북도 서흥군의 풍경.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다.  서흥군은 사과산지로 구릉지역에 과수원도 많이 보였다. 들판 풍경에 카메라를 대자 30대 중반의 북측 보장성원은 "뭐, 찍을 꺼리가 있습니까"라며 의아해 했다. "남측에 계신 어르신들 중 서흥군을 고향을 두신 분들은 이 평범한 사진 한 장만으로 아련한 향수를 달래시지 않겠나"라고 답해주었다. 그도, 나도 짐작만 할 뿐 겪어보진 실향의 아픔이 아니겠는가. 김진호국제전문기자


평양은 ‘표정’과 ‘풍경’이 모두 바뀌었다. 표정에선 미래에 대한 낙관과 자신감이 읽혔다. 깔끔해진 입성과 현대식 고층빌딩, 많은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도로…. 적어도 도시의 외관은 놀랍게 바뀌었다. 북은 그리 변했는데 남도 변했을까. 태극기 집회로 상징되는, 더욱 심해진 보혁 갈등 문제는 차치하자. 북측과의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분들만 보아도 그리 변한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북측은 과거 그토록 갈구하던 경공업 부문 발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대부분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6년 동안 이룬 변화다. 남측의 도움 없이 옷과 신발은 물론, 식료품 등 인민생활에 필요한 기초 물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평양의 밤거리는 더 이상 암흑이 아니다. 불 밝힌 매대가 북적이고 새 자동차들이 다닌다. 평양 시내 곳곳에 나붙은 ‘인민경제의 주체성’이란 구호가 빈말로 읽히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북핵 대치국면을 대화국면으로 돌려놓기 바쁘게 화장품 공장으로 발전소로 뛰어다니며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발품을 팔고 있다. 


과거 북측이 아쉬웠던 필요의 상당 부분을 자력 해결하고 있는 지금, 남북관계는 어떻게 진화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남측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번 방북길에 갖게 된 의문이다.


생활수준의 변화는 많은 것을 바꾼다. 10여년 전 평양에서 만났던 북측 보장성원(안내원)에게 세대주(가장)의 권위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아무리 밤늦게 귀가해도 마누라가 기다리지 않고 누워 있으면 옆구리를 차서라도 밥상을 차려오게 한다”고 말했다. ‘아니, 밖에서 밥 잘 먹고 왜 또 상을 차리라 하나’라고 물으니 “그래도 세대주가 숟가락을 한번 들어야 집안에 질서가 잡힌다”고 답했다. 북측의 가정 내 여성인권 수준을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이 역시 과거지사일지 모른다. 


곳곳 ‘인민경제의 주체성’ 구호 
경공업 발전 기본물품 현대화
남측 의존 않고 자력 해결 수준 

북, 제재 뚫고 변화 견인 자신감

인도적 지원·개발 ·대북사업 등

 
9년 ‘교류 공백 메우기’ 매몰돼남측, 방법론 한계 경제 치우쳐 

북측 가르치려 착각 빠지기도


30대 보장성원 대부분 자녀 1명 
남측 인구 감소 해결 발상 ‘무색’


방북단과 일정을 같이한 10명 남짓한 북측 보장성원들 중 30대 남녀는 대부분 아이가 1명이었다. 한 보장성원은 “하나 더 낳고 싶기는 한데 첫애 가졌을 때 처가 입덧으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득하다”면서 가능성을 낮게 잡았다. 성장한 두 자녀를 둔 50대 초반의 한 여성은 “우리 때만 해도 아이 셋은 나야 한다고 교양받았는데 이제는 대부분 1명”이라면서 “집안에서 세대주의 위치도 많이 달라졌다”고 귀띔했다. 남측의 프리즘으로 북측을 보면 허방을 짚기 십상이다. 남측의 인구감소 문제 역시 북측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발상도 수정이 필요한 것 같다. 


평양~개성 고속도로 위에 설치된 온정휴게소. 지난 18일 귀로에 휴게소에 들른 남측 방문단을 상대로 북측 봉사원들이 야외 매대에서 잡화류를 팔고 있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적지 않은 분들이 끊어진 남북관계를 다시 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방법론으로 들어가면 곧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많은 경우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의 공백을 메우는 일에 매몰돼 있다. 대표적인 착각이 북측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이다. 인도적 지원 또는 개발지원에 나서려는 분들이나 대북사업을 희망하는 기업인들까지 갖고 있는 생각이다. 환상에 가깝다.


지난 60여년 동안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으면서 이 정도 변화를 이끌어낸 북측이 수긍할까. 이번에 만난 북측 인사들은 대부분 “어차피 제재하에서 자력으로 발전해왔다. 제재를 풀건, 풀지 않건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물론 현재 누리는 생활수준이 흔들린다면 북측 사회에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제재하에서도 로켓을 대기권에 성공적으로 올려놓고, 인민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북측이다. 과거처럼 식량·비료를 대량으로 지원하거나, 눈앞에서 현금다발 흔들면 따라올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박흥렬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 고문은 “과거엔 경제 분야가 우리의 레버리지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북측 인사들과 대화를 나눠온 정치학자는 “우리가 가르친다는 생각을 북쪽은 수용하지 않는다. 자기들 모델을 찾고 있다. 외부에 의존한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단언했다. 북측은 과거처럼 외부의 일방적 지원에 기대려는 생각을 버렸다는 말이다. 북은 남을 넘어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인민경제 발전에 그치지 않고 국가경제를 단번에 도약시키기 위해선 지원이 아닌 투자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라는 말이다. 핵을 파는 것이 아니라, 핵을 버림으로서 더 큰 기회를 바라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물론 북측 사회가 현재의 경제적 성공을 유지하면서 더 큰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당장 옆걸음질을 하고 있는 비핵화와 체제보장 협상이 가닥을 잡아야 한다. 가닥을 잡더라도 이행 과정에서 굴곡이 없을 수 없다. 핵을 놓고 극한대치했던 작년 상황이 반복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방향을 잡은 북한의 진화는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촬영해 제모습을 담지 못했다. 지난 18일 평양~개성 고속도로 상에서 본 황해북도 금천군 중심부. 다리 난간 밑으로 흐르는 강이 예성강이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혁명 또는 혁명적 변화는 잃을 게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물질생활의 편의에 익숙해지면 더 많은 것을 기대하기 마련이고, 현 수준이 떨어진다면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편의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주려는 게 김정은 위원장의 우선순위일 게다. 지난해 전쟁 직전까지 갔던 한반도 상황이 올 들어 대화국면으로 전환한 배경을 두고 “북의 변화, 특히 경제적 변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이라고 보는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은 틀리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그다음 북측과 관계맺는 방식은 미지의 영역이다. 


서울에서 평양 가는 길 못지않게, 평양에서 서울 오는 길 역시 녹록지 않다.

평양 체류 사흘째인 지난 12일 저녁. 숙소인 양각도 호텔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북측 보장성원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남측 방북단이 전날 김일성 주석 생가인 만경대 고향집을 다녀오던 길, 작은 공사현장을 지나면서 군인 또는 보안원 두세 명이 웃옷을 벗고 작업하는 현장이 있었던 것 같다. 하필 그 장면을 누군가 찍어 남측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것이 화근이 됐다. 북측 안내원들이 남측 대표단을 상대로 심각하게 문제 삼지는 않았다. 하지만 좌불안석의 안색이 역력했다. 


한 보장성원은 “사진을 찍힌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해달라. 기분이 좋았겠나. 너무 더워서 잠시 웃옷을 벗고 일하는 장면이 만방에 공개됐는데…”라며 분을 삭였다. “그 시간에 지나간 버스행렬이 남측 방문단 버스들밖에 없었기에 해당 조직에서 항의를 해왔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소동은 북측의 별다른 조치 없이 끝났다. 남측의 5060 이상 세대는 그 기분을 경험한 세대다.


양각도 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내. 양의 뿔을 닮은 형상이라고 하여 양각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1980년대 초까지 서울을 방문한 외신기자들은 하필 판자촌이나 종로 뒷골목 등 구질구질한 광경을 콕 집어 소개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과민반응 아닐까. 한 북측 동료에게 “왜 그러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시기도 지나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상대는 수긍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 때문이었는지 방북 첫날부터 사진촬영을 제지하는 정도가 강했다. 과거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발전할수록 더욱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려는 강박관념이 커졌는지도 모른다.


상점 점원은 무료한 시간 손전화로 영화를 보고, 젊은 보장성원은 버스 이동 중 기자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주기 위해 손전화로 사전을 검색했다. 컴퓨터 통신이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인터넷이 아닌, 인트라넷일 뿐이다. 포털사이트 광명망은 내부에서만 유효하다. 찻집이나 안경점에서도 범용 전자결제카드 ‘나래’를 10분 만에 뚝딱 만들어준다. 양각도 호텔 바텐더부터 유소년 축구대회 조직위 젊은 구성원까지 유럽 프로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북측 인사들에겐 어떤 질문을 던져도 같은 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평양교원대학의 교수법이 북유럽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냐’고 묻거나 ‘핵 문제 해결되고 경제발전하면 중국처럼 당의 통제 속 개방이 되지 않겠나’라고 물어도 각각 “우리식이다. 우리식대로 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 18일 남측 방문단을 실은 버스 행렬이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황해북도 서흥군을 지나 금천군으로 향해 가는 길이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공식 환율이 1달러당 100원이지만, 장마당에선 몇 천원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전까지 축구 이야기를 화제로 유쾌한 대화를 나누던 호텔 봉사원은 대뜸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더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십쇼. 욕먹습니다”라면서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라고 못 박았다. 호텔 봉사원들에게 주 52시간은 없었다. 호텔 방문객이 많을 때는 퇴근도 하지 않고 호텔에서 잠을 자며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활기가 넘치고, 대단히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의 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를 부인하는 이중성이 전환기 평양 사람들에게서 감지됐다. '우리식'의 내용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 틀은 갖춰가는 것 같았다. 10여년 만의 방북이었지만 평양만 네 번째였다. 그럼에도 유독 이번에는 북측을 읽기 어려웠다. 기자 역시 평양의 경제적 낙후성에 못 박혔던 고정관념 탓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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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241651005&code=970100&sat_menu=A074#csidx5435d4ef7b72d88a6de5666426aa0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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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df 2019.01.17 15: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10여년 만의 방북이었지만 평양만 네 번째였다. 그럼에도 유독 이번에는 북측을 읽기 어려웠다. 기자 역시 평양의 경제적 낙후성에 못 박혔던 고정관념 탓이 아니었나 싶다.

http://tv.jtbc.joins.com/clip/pr10010365/pm10030346/vo10248328/view




만경대선 학생들의 공연 지난 16일 평양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공연을 마친 학생들이 모두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10여년 전 본 공연에 비해 인위적으로 전달하는 정치적 메시지는 사라졌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여기가 무슨 최고 수준이라고 자랑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 그게 어린이들이니까 보여드린 거다.” 


지난 16일 평양 도심에서 꽤 떨어진 만경대구역 장훈2동의 평양교원대학. 박금희 학장은 방북단에 “입학생들의 실력은 김일성종합대학보다 낫다”고 했다. 교원대학은 유치원(2년)과 5년 과정의 소학교(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북측 사회는 고등교육보다 지능의 80% 이상이 형성되는 12세 이하 교육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유치원 교양원이 대학교수보다 지식과 경험이 많아야 한다는 게 ‘최고 존엄’의 뜻이라고 했다. 


대학에는 가상현실·증강현실을 포함해 최첨단 교육시설이 설치돼 있었다. 아이들 교육의 핵심 주제는 종합지능과 과학기술이다. 로봇의 경우 유치원 높은반에선 장난감처럼 갖고 놀면서 조립만 시킨다고 했다. 소학교 1학년은 두발 로봇, 2학년은 세발 로봇을 만든다. 3학년은 로봇의 과학·공학 원리를 깨닫게 하고 4학년이 되면 그 원리를 발표하게 한다. 5학년생들에게는 같은 내용을 영어로 발표시킨다. 의무교육은 유치원 높은반부터 고급중학교까지 12년. 어린아이들의 교양원을 키우는 교원대학에는 여학생이 많았다. 


어린이는 북측이 9박10일간 방북단에 보여준 가장 큰 테마였다. 과학기술이 그다음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6년간 신축·개건한 시설들을 보여준 참관 일정엔 교원대학과 류경아동병원, 1989년 건립돼 3년 전 신축건물처럼 개건된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이 포함됐다. 위민·위락시설인 문수물놀이장과 릉라곱등어관의 주 고객도 어린이였다. “아이들은 왕”이라던 김일성 주석의 훈령이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북남이 합해 좀 세졌으면…근데 북측이 잘살면 남측이 좋아할까요?”

<b>릉라도엔 돌고래, 대동강엔 유람선</b> 지난 17일 평양 대동강 릉라도의 곱등어관(돌고래관)에서 돌고래쇼를 본 관중들이 방북단을 보자 반갑게 손인사를 하고 있다(위쪽 사진). 지난 15일 밤 평양 대동강에서 유람선 대동강호가 운항하고 있다. 뒤로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릉라도엔 돌고래, 대동강엔 유람선 지난 17일 평양 대동강 릉라도의 곱등어관(돌고래관)에서 돌고래쇼를 본 관중들이 방북단을 보자 반갑게 손인사를 하고 있다(위쪽 사진). 지난 15일 밤 평양 대동강에서 유람선 대동강호가 운항하고 있다. 뒤로 주체사상탑이 보인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북한 체류 열흘간 북측이 유일하게 특정 참관장소가 아닌 거리에 내려 20분 정도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 곳이 평천구역 미래과학자거리였다. 과학기술 전문가들에겐 살림집 배정부터 무형의 존경과 대우까지 제공됐다. 지역마다 ‘과학자거리’가 조성돼 있다고 했다. 현 단계 북측이 이뤄낸 과학기술의 정점은 ‘로켓’이다. 아이들과도 과학기술이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의 넓은 홀에 대륙간 로켓(탄도미사일) 모형이 놓여 있다. 릉라도 곱등어(돌고래)쇼 안내 전광판에도 로켓이 그려져 있다. 1960년대 말 미국인들에게 달탐사선 아폴로 11호가 그랬을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핵무기와 함께 국제사회의 제재를 불러온 대량살상무기(WMD)지만, 북측에선 첫손에 꼽는 국가적 자랑이었다. 10년, 20년 뒤 북측이 어떻게 변할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교육과 과학기술에 역량을 집중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새로 들어선 거리·공공시설 
김정은 시대 ‘변화 속도’ 빨라
교육·과학기술에 역량 집중 
곳곳에 ‘ICBM’ 로켓 모형


3년 전 평양을 방문했던 남측 대표단 사람들은 그사이 획기적으로 많아진 4가지가 있다고 꼽았다. 불빛·손전화·자동차·거리매대였다. 손전화는 대략 250만대. 아이들을 제외하면 300만 평양 시민 한 사람당 1~2대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과거에도 북측은 꾸준하게 변화해왔다. 하지만 속도가 빨라졌다. 한 북측 인사는 “원수님(김정은 위원장) 들어 속도가 달라졌단 말입니다”라면서 “1년에 하나씩 새 거리가 일떠섰다”고 소개했다. 김 위원장 집권 첫해인 2012년 창전거리에서 시작해 1년 사이로 문화과학자거리, 미래과학자거리가 들어섰고 2016년엔 여명거리가 새롭게 단장됐다. 공공시설들은 대부분 6개월 안팎 짧은 기간에 신설·개건됐고, 문수물놀이장 건립 기간이 10개월로 오래 걸린 편이라고 했다. 지금도 곳곳에서 건물 신축공사가 벌어지고 있고, 국립교예극장과 여러 시설들이 개건 중이다.


지난 16일 촬영한 평양 만수대 창작사 경내의 김일성 주석-김정일 국방위원장 기마상. 평양 시내에선 유일한 기마상이다.   김진호 기자 



포전제(농가책임생산제·일부 생산물은 징수하고 나머지는 임의처분하게 하는 제도) 도입으로 식량 사정이 좋아지고, 개인·집단 비즈니스로 돈이 돌기 시작했다. 위락·위민시설과 고층 살림집(아파트)들이 늘어나고, 선대부터 허리띠를 조여가며 개발해온 로켓이 핵탄두를 싣고 대기권을 돌파할 수 있음도 만방에 입증했다. 북한 사람들은 세계 최강대국 수뇌가 싱가포르에서 ‘최고존엄’에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왔다고 했다. 활기가 없으면 외려 이상할 일이다. 


2000년대 초반 평양을 세 차례 방문하면서 ‘박물관 도시’로 읽었다. 낮이면 사람들로 붐비다가 저녁이면 텅 빈 공간만 있는 박물관이나 쇼윈도처럼 보여주고 싶은 것을 전시해놓은 도시로 보였다.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나 평양에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지방에서는 같은 수준의 특혜와 특전을 누리지 못할 게 분명하다. 일행 중 1주일 늦게 베이징에서 항공편으로 도착한 사람들은 순안공항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는 가도에서 목격한 주민들의 생활이 여전히 어려워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인구 2500만명 중 300만명이 사는 평양은 ‘박물관 도시’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변화의 폭과 깊이도 예전과 달랐다. 일회적인 변화라기보다 지속적인 진화라고 해야 할 듯하다. 여전히 9·9절 기념행사를 위해 휴일을 반납하고 뙤약볕 아래 집단체조 연습을 해야 하는 동원사회지만, 시민들의 표정에서 보이는 여유와 낙관은 북측 사회가 내적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웅변했다. 순간순간 우리 식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자신감이 보였다. 


지난 16일 양각도 호텔에서 바라본 평양 시내. 오른쪽에 주체사상탑이 보이고 그 건너편에는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 광장이 있는 중심지다.   김진호 기자 


이번에도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은 북측의 오늘을 읽는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지난 16일 오후 평양 아이들의 종합공연을 보고 나오는 길, 북측 인사가 소감을 물어왔다. “훨씬 아이들 공연다워졌다”고 답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에 뼈가 있단 말입니다”라고도 했다. 대화가 길어졌다.


충격의 시작은 2000년대 초 금강산에서 본 평양교예단 공연이었다. 서커스는 늘 혼을 빼놓는다. 단원들의 묘기에 정신놓고 있던 순간, 높은 사다리 위에 있던 단원이 아래로 무언가 툭 던졌다. 펼침막이었다. ‘조국은 하나다!’ 붉은 천에 쓰인 검은 글씨들이 머리를 강타했다.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프로파간다의 파괴력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어린이 공연 이념색 옅어져 
경제 개선에 시민들도 활기
지도자 신격화 여전하지만 
남북 호전 땐 투자자 줄 설 듯


만경대 학생소년궁전 공연은 그 결정판이었다. 같은 공연을 두 번, 세 번 보면서 깨끔치 않은 인상이 굳어졌다.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누선을 자극하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전달하려는 정치적 메시지도 사라졌다. 바로 그 점이 신선한 변화였다. 싱거웠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5번째 평양을 찾았다는 최문순 강원지사 

역시 “과거에 비해 이념적 색깔이 엷어졌다”며 공감을 표했다. 공연을 처음 본 방북단 인사들 사이에선 “너무 기계적으로 아이들을 훈련시킨 것 같다”는 촌평도 많았다. ‘최고존엄’을 그리워하는 노랫말과 기계적인 동작이 곳곳에 여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사상과 집체생활이 몸에 배인 북측의 실상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정상으로 비쳤다. 기자의 공연평에 실망한 북측 인사에게 개인적으로 축적된 경험들을 설명해주자 어느정도 이해하는 눈치였다. 


지난 16일 평양교원대학에서 박금옥 학장이 남측 방문단을 상대로 유아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박 학장은 유치원 교양원을 최고 학부에서 최고 수준의 학생들을 상대로 교육하는 나라는 북측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 동영상에 그의 설명이 담겨 있다.  김진호기자 



양각도호텔 상점이나 음식점에는 가격이 북측 원화로 표시돼 있다. 공식 환율은 1달러 100원. 달러로 결제하겠다고 하면, 북측 원화를 유로화로 환산한 뒤 다시 유로화 대 달러화 환율을 계산해 가격을 알려준다. 복잡할 것 같은 계산을 순식간에 해냈고, 친절했다. 환경이 좋아지면 북한에 투자하려는 기업들이 줄 설 게 분명하다. 정치적 안정과 인건비가 낮은 우수한 인력, 여기에 시장 선점 효과까지 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북측이 인민경제 개선 단계를 넘어 국가경제 발전단계에 돌입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걸 미리 예상하고 있어서일까. 50대 초반의 한 시민은 “북남이 합해 우리나라가 좀 세졌으면 좋겠습니다”면서도 “북측이 잘살게 되면 남측이 좋아할까요?”라고 물었다.


수령님(김일성 주석), 대원수님(김정일 국방위원장), 원수님(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을 소개할 때마다 북측 해설사들의 눈빛은 진지하다 못해 꿈결을 더듬는 것 같았다. 감정이입이 완벽에 가까웠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기도 했다. 접촉할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북측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돌고래쇼 중에 관람객을 불러내 돌고래의 키스를 받게 하는 장면이 재미있었다고 하자, 북측 인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원수님께서 바로 그 장면을 보시고 ‘인간과 곱등어의 교감이 좋다’고 말씀하셨단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눈빛이 진실돼 보였다. 백두의 혁명정신 같은 거창한 선언에서부터 문수물놀이장에 대형시계 2개를 하사한 일상적인 말까지 최고존엄의 말은 알파요 오메가다. 변화든, 진화든 그 점만은 바뀔 수 없다. 우리는 평양을 경제적 타산이나 안보적 고려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어느 한쪽만 보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이번에도 ‘가슴’과 ‘머리’ 사이를 오가는 10일간의 여정이었다.


가깝고도 먼 평양 체류를 마치고 개성행 고속도로에 오른다. 예성강과 어우러진 황주평야의 매혹적인 풍광과 송악산 품에 안긴 개성을 다시 만난다. 서울 홍제동에서 북쪽으로 산골고개에 접어들면 통일로 길가에 '평양까지 227'라는 현수막이 여러곳에 있다. 그곳으로 돌아간다. 양각도 호텔 리발사 선생의 인삿말이 떠오른다.  “선생님, 건강해서 평양에 꼭 다시 오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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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평양 개선문 인근 모란봉 기념품상점 앞의 거리. 수삼나무 가로수가 늘씬하게 서 있다. 오래전 한반도에서 사라진 수삼나무를 다시 살려 평양 시내 곳곳에 가로수로 심어 놓았다.   김진호기자



‘조국해방(8·15) 경축’ ‘항일전쟁 승리’. 평양은 축제 분위기다. 8·15를 시작으로 9월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기념일인 국경절, 9·9절이 있다. 이어 10월10일 조선노동당 창건 기념일이 3대 명절의 끝을 장식한다. 북한에선 광복절을 ‘조국해방기념일’ 또는 ‘8·15’로 불렀다.


73돌 광복절인 15일 평양 시내 곳곳에선 조직별, 단위별 8·15 경축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5년 단위로 꺾어지는 정주년이 아니어서 국가 차원의 행사는 없었다. 올해 3대 명절의 중심은 단연 70주년을 맞은 두번째 명절이다. 평양 시민들은 휴일인 이날 저녁 늦게까지 9·9절 대집단체조 준비가 한창이었다. 김일성광장과 인접한 대동강변에서는 오후 7시 넘어 행사 연습 중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도 보였다. 이번 대집단체조의 주제는 ‘빛나는 조국’이다. 김일성경기장에서 만난 한 시민은 “올해 8·15엔 국가행사가 없어 개별적으로 만수대 언덕을 찾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에) 인사를 드릴 뿐, 주로 가족 단위로 쉰다”고 설명했다. 


평양 시내 곳곳에 나붙은 조국해방기념일(8.15) 기념 플래카드.     김진호기자



남북은 9월 안에 평양에서 올해 3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지난 13일 합의했다. 낙랑구역 초급중학교 교원이라고 밝힌 최일룡씨는 “판문점 선언이 잘 풀려 풍요로운 가을을 맞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일성경기장에서 만난 평양시 인민위원회 복무원 림현철씨(41·평천구역)는 “평양 수뇌회담에서 그동안의 부진을 벗고 더 실질적인 조치가 취해져 우리 민족이 번영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란다”고 했다. 양각도 국제호텔 1층 서점의 복무원 김혜영씨(46)는 “노무현 대통령이 오셨을 때 평양 4·25문화회관 앞에서 열렸던 환영행사에 나갔었다”며 “정확히 며칠인지는 몰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오시면 또 환영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로 부르는 광복절인 15일 평양 시내 김일성광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기념일(9·9절)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북한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로 부르는 광복절인 15일 평양 시내 김일성광장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기념일(9·9절)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한 북측 보장성원은 “문재인 대통령이 9·9절에 오시면 더할 나위 없지. 거기다 트럼프까지 함께 오면 좋은데…”라면서 “(오면) 놀러오는 건 아닐 테고, 종전선언을 기대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라며 기대를 표했다. 


하지만 많은 북측 인사들은 정상회담 전망을 묻는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잘돼야죠. 잘되겠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14일자 노동신문은 정상회담 소식을 4면에서 4개 문장으로 짧게 전했다. ‘정상회담’과 관련된 제목을 따로 붙이지도 않았다. 남측 언론이 3차 정상회담 소식을 대서특필한 것과 대비된다.


북측의 생각은 지난 14일 만수대 의사당으로 예방한 김영대 북측 민화협 의장 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의장의 말에서도 확인됐다. 김 의장은 “남측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오는데 성과는 하나도 없다. 서울에 돌아가 그 얘기를 전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미국에 일일이 물어보고 그래서 되겠나. 우리 민족끼리 뭉치면 위대한 조국이 된다”고도 했다. 맞다. 4·27 판문점선언과 6·12 북·미 싱가포르 정상회담 뒤에도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 북측의 불만이 전달된 게 처음도 아니다. 최근 방북했던 김홍걸 남측 민화협 의장에게도 비슷한 메시지를 들려 보냈다. 


하지만 ‘실질적 진전’을 위해선 북측도 할 일이 있다. 이를 생략하고 남측의 역할만 강조하는 것이 남북관계에 과연 도움이 될까. 아니면 당장 남북이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을 넓히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게 좋을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외식하러 나왔어요 평양 대동강 수산물식당에 엄마를 따라 나들이 나온 어린이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외식하러 나왔어요 평양 대동강 수산물식당에 엄마를 따라 나들이 나온 어린이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14일 점심시간. 대동강구역 대동강 수산물식당은 외식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1층에 마련된 여러 개의 수조에서는 철갑상어와 ‘룡정어’, 잉어, 연어 등 각종 어류가 헤엄치고 있었다.

지난달 26일 문을 연 수산물식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유희장과 물놀이장 등 주민 편의시설을 확대해온 노력의 일환이다. 2012년 4월 집권 첫 연설에서 “다시는 인민의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던 김 위원장이다. 김일성대 출신의 30대 북측 보장성원은 “인민 생활의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짧은 기간 동안 수산물식당을 두 차례(6월8일, 7월26일) 현지지도하면서 큰 관심을 보였다. 


환하게 빛나는 대동강변 
아파트 베란다엔 태양전지판
점심시간 수산물 시장엔 
외식 나온 시민들로 ‘북적’

 

SNS로 평양 실시간 공유 
‘페친’들은 신선한 충격


‘최고 존엄’은 북한 주민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크고 작은 의문의 종착점이었다. 왜 북에는 유독 ‘은정’이라는 간판이 많을까. 개성~평양 고속도로 휴게소 이름과 양각도 호텔 찻집 이름도 ‘은정’이었다. 찻집의 20대 여성 복무원에게 이유를 묻자 “그걸 모르셨습니까”라며 되레 의아해했다. 이어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평양 시내 22개 구역은 물론 지방에도 지역별, 단위별 ‘은정원’이 있다고 한다. 찻집은 물론 식당과 이발소, 목욕탕 등 주민 편의시설을 모아놓은 건물이라고 했다. ‘은정차’도 있다. 황해남도 강령군에서 재배한 강령녹차의 다른 이름이다. 평양은 질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평양 야경 맞나 양각도 호텔에서 12일 밤에 본 평양의 야경이다. 오른쪽 유난히 환하게 빛나는 높은 탑이 주체사상탑이다. 건물마다 환하게 불을 밝혀놓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력 사정이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평양 야경 맞나 양각도 호텔에서 12일 밤에 본 평양의 야경이다. 오른쪽 유난히 환하게 빛나는 높은 탑이 주체사상탑이다. 건물마다 환하게 불을 밝혀놓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력 사정이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밤마다 양각도 호텔 34층의 강변 창문으로 내다본 평양 시내 건물들은 불빛으로 환했다. 전기 사정이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이 분명하다. 북측 보장성원들은 “평양, 동평양 화력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는 데다 곳곳에 발전소를 짓고 있다”고 말했다. ‘제재 탓에 전력 생산에 어려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대비를 잘해왔기 때문에 전기 사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시내 아파트에는 가구마다 베란다나 창틀에 태양전지판을 설치해놓은 곳이 많았다. 화력발전소와 함께 대체에너지가 평양의 전력난을 완화시키고 있음을 말해준다. 평양 물가로 보아 요금(㎞당 0.49달러)이 녹록지 않은 택시를 이용하는 시민들도 자주 눈에 띄었다. 


전력 사정뿐이 아니었다. 산뜻한 신축 빌딩, 도로 위의 자동차와 무궤도전차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차창 밖 평양 시민들의 표정이 대체로 밝아보였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이고 산다고 믿기 힘들었다. 대체 이 도시의 활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30대 초반의 세대주(가장)에게 ‘제재가 풀리면 살림살이도 좀 나아지지 않겠냐’라고 묻자 “우리야 늘 제재를 받으며 살아와서 별 신경을 안 쓴다. 지금도 잘산다”고 답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본 소감이 어땠느냐는 질문에는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이 굽실거리는 것 보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73년 전 8·15, 그날은 분명 벅찬 감격의 날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기쁜 날이다. 하지만 한반도 현대사의 ‘BC’와 ‘AD’가 갈린 날이기도 하다. 바로 그날, 분단의 징한 여정이 시작되지 않았나.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북한의 한 신혼부부가 ‘조국해방기념일’로 불리는 15일 평양 만수대에 자리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평양 | AP연합뉴스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북한의 한 신혼부부가 ‘조국해방기념일’로 불리는 15일 평양 만수대에 자리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평양 | AP연합뉴스 



서울을 떠나기 전만 해도 평양 한복판에 앉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평양 도착 뒤 페이스북에 “여기는 평양”임을 알리고, 대동강변의 풍광과 옥류관 ‘평양랭면’ 사진을 올리자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단순히 부러움을 표하는 분도 있었지만, 평양에서 페이스북을 통해 실시간 교신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서울은 평양을, 평양은 서울을 바라보는 지독한 모순. 늦은 밤 숙소로 돌아와 조선중앙TV 채널을 선택하니 <방탄벽>이 방영되고 있었다. 해방 직후 인민 속으로 숨어든 친일파와 첩자를 찾아내기 위해 역시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던 여성 혁명가의 이야기다. 인기 여배우 리수경이 주연으로 나와 북측에서 꽤 인기 있는 연속극이다.


15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선 남과 북의 축구 꿈나무들이 격돌했다. 스탠드를 빼곡하게 메운 4만여명의 관중은 대부분 흰색 상의를 입은 학생들이었다. “잘한다, 잘한다”는 함성이 들렸다. 금빛 응원도구를 활용한 파도타기 응원도 선보였다. 북측 4·25 여자팀과 남측 하나은행 클럽 간 유소년 축구 친선경기는 북측의 1-0 승리로 끝났다. 잠시 후 제4회 아리스포츠컵 15세 이하 국제유소년축구대회 개막 경기가 벌어졌다. 북측 4·25팀과 남측 남강원도팀(강원도FC 유소년팀)이 입장하자 관중석의 열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지난 14일 평양 중구역 만수대 의사당(최고인민회의 의사당)에서 김영대 북측 민화협 의장을 예방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동안 접견실 앞에 서 있는 안내원들의 모습을 담았다. 


서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치다가도 쓰러진 상대방 선수를 부축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보였다. 북측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남강원도팀이 좋은 경기를 보일 때마다 관중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북측의 4-1 승리. 경기가 끝나자 남북의 선수들은 서로 어깨를 겯고 그라운드를 돌며 관중석에 머리를 숙였다. 남북이 잠시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경기장이 떠나가도록 박수와 격려가 쏟아졌다.


대형 스크린에는 ‘반갑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선율이 흘러나왔고, 학생 응원단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40대의 남자 관중은 “서로 힘합해 국제경기에 나서면 경쟁력이 있을 것 같다. 다 형제 아닌가”라며 “북남을 함께 응원했다”고 말했다. 


전날 일기예보는 최저 25도, 최고 32도. 불볕더위가 약해지고 흐린 날이었지만, 온종일 후덥지근했다. 조국해방기념일의 불꽃놀이(축포)는 없었다. 평양에서 처음 8·15를 맞았다.



지난 11일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바라본 미래 과학자거리 모습.    김진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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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북한 평양 김일성경기장을 둘러본 남측 방문단이 인근의 개선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jh@kyunghyang.com



지난 10일 오후 군사분계선 너머 개성 초입의 북측 출입사무소(CIQ).

검색대 앞에서 다소 긴장한 채 대기하고 있는데, 검색벨트에 먼저 올려보낸 카메라가 막 떨어질 뻔했다. 반사적으로 검색대 너머로 발을 들여놓아 간신히 붙잡았다. 순간 “카메라 떨어뜨리면 골 때리는데…”라는 말이 들렸다. 머리가 희끗한 북한 검색원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10여년 만의 방북을 앞두고 전날 잠자리를 설친 끝이었다. 더구나 어느 나라 관문에서건 긴장하기 마련인 CIQ 검색대 앞이 아닌가. 검색원의 무심한 한마디에 마음이 풀렸다.

평양에서 열리는 제4회 국제유소년축구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단과 함께 방북했다. 남측 남북체육교류협회(이사장 김경성)와 북측 4·25체육단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대회는 오는 15일 김일성경기장에서 개막, 18일까지 열린다. 선수단과 임원단을 합해 164명이 방북길에 올랐다.


남측 방북단이 개성에서 육로로 평양을 방문하는 기회는 흔치 않다.

평양에서부터 마중 나온 북측 보장성원(안내원)들에 따르면 2003년 류경 정주영체육관 준공 기념행사 당시 1000여명이 방북한 뒤 처음이다. 2011년에는 소규모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단이 이 길을 이용했다. 


평양으로 가는 길은 온통 초록의 바다였다. 비무장지대를 지나 북측 출입사무소에 도착하는 동안 길 오른편으로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자리 잡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맨 왼쪽의 송악산부터 천마산까지…. 개성의 산들이다. 인공기를 단 높은 철탑의 기정동 마을도 보였다. 개성공단을 지나면서 번듯하게 지어진 공장 건물들을 보자 착잡했다. 2016년 초 박근혜 정부의 폐쇄조치로 문을 닫은 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 재개할 제반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늦은 밤 찾은 호텔 24시간 찻집 “온커피 한 잔에 네 딸라” 

<b>북으로</b>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참가단을 실은 버스들이 지난 10일 오후 경기 파주시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고 있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북으로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참가단을 실은 버스들이 지난 10일 오후 경기 파주시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지나 군사분계선을 통과하고 있다.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산림복구 노력 결실 역력 
송악산은 그림 같은 풍광


오후 5시20분쯤, 개성 외곽을 지나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이제 평양까지는 고작 140여㎞. 개성~평양 고속도로는 관목을 심어놓은 중앙분리대 양쪽으로 각각 아스콘 포장의 2차선 도로와 갓길이 있다. 승용차로는 얼추 1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버스 행렬은 시속 70~80㎞로 천천히 운행됐다. 그 느림이 오히려 고마웠다. 고속도로 진입 전 보이는 송악산 아래 개성 시가지는 한폭의 그림이었다. 작품집을 넘기듯 ‘풍경화’가 이어졌다. 마침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떠 있어 도로 양편의 풍광이 맑은 가을날처럼 선명했다. 


과거 북녘에는 민둥산이 많아 안타까움을 자아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옷’을 갈아입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전국적으로 펼친 산림 복구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게 역력했다. 산하가 모두 초록으로 뒤덮였다. 길 양편의 녹색 물결 속에 옥수수밭, 수수밭도 펼쳐졌다.


간혹 북측 보장성원들이 4·27 판문점선언의 이행 등과 관련한 질문을 던졌지만 흘려들었다. 시선은 가급적 차창 밖을 향했다. 

버스가 금천굴(터널)을 지나 구릉지역을 천천히 올라가자 황해북도 금천군 시가지가 오른쪽으로 펼쳐졌다. 굽이쳐 흐르는 예성강 물줄기와 나지막한 산 아래 안겨 있는 금천군의 풍경은 개성~평양 구간의 제1 장관으로 꼽아도 좋을 것 같았다. 옥천굴, 룡궁굴, 주포굴, 삼봉굴, 정방굴…. 10여개의 터널을 지났다. 전부 쌍굴이다. 대동굴을 지날 때 표지판이 ‘평양 53㎞’를 가리켰다. 높은 산을 지날 땐 수백m에서 수㎞ 길이의 터널을 빠져나왔고, 야트막한 구릉지역을 오르내렸다. 그 도로의 경사각이 오히려 멋진 풍광에 재미마저 더했다. 아쉽게도 유일한 휴식시설인 은정휴게소에는 정차하지 않았다.


남과 북은 이날, 각각 축구공을 둘러메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남북노동자통일축구대회에 참가하는 북측 방남단이 이날 오전 같은 서해 육로로 내려왔다. 조선직업총동맹 선수단과 대표단 등 64명이 오전에 밟은 길을, 남측 방북단이 오후에 거슬러 오른 것이다.


검은 연기를 내뿜는 황해제철의 높은 굴뚝이 멀리 보이는 사리원시 외곽을 지날 무렵엔 평야가 펼쳐졌다. 황주평야에는 논과 밭이 섞여 있었다. 드문드문 풀을 뜯는 소, 자전거를 타고 농로를 지나는 주민들이 보였다. 낮은 구릉과 평지가 섞인 황주평야는 한반도 남녘에선 보기 드문 경치다.



지난 10일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촬영한 예성강. 황해북도 금천군 지역을 통과할 때 예성강 물줄기와 산자락에 안긴 금천군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이었다. 아쉽게도 그 장면은 담지 못했다.  김진호기자


20㎞, 10㎞, 5㎞…. 평양이 서서히 다가오면서 붉은 노을이 서쪽 하늘을 물들였다. 차창 밖으로 평양화력발전소 굴뚝이 보였다. 

평양 방문은 6·15 제5주년 기념행사를 취재한 2005년 이후 처음이다. 을밀대, 만수대, 만경대 등 ‘대(臺)’자 돌림의 지명이 많은 평양은 대동강 양안 곳곳에 낮은 경사의 너른 땅이 펼쳐진 도시다. 주체사상탑과 김일성경기장, 평양 개선문, 인민문화궁전, 만수대 의사당 등 역사적·정치적 의미 등을 녹여낸 모뉴먼트들을 곳곳에 배치한 ‘쇼윈도’이기도 하다. 

평양을 읽는 방식은 두 가지다. 적지 않은 경우 가슴으로만 읽거나, 머리로만 읽는 우를 범한다. 많은 경우 처음엔 가슴으로 만난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노래 ‘반갑습니다’의 가사에서 내비치듯 ‘민족’ ‘동포’ ‘조국통일’이라는 말과 정서가 범벅이 되면 목울대가 뜨거워지기 십상이다. 발레, 고전무용, 태권도, 서예 등 소조(동아리)별로 어린 학생들의 장기를 둘러보고 마지막에 종합공연을 관람하는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북녘이 고향인 한 분은 역동적인 농악으로 풀어낸 종합공연의 끝자락에 결국 무대로 뛰어나가 어린 학생을 껴안으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기자 역시 눈물샘을 자극하는 공연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가슴으로 경험한 첫 만남이었다.


지난 10일 개성~평양 고속도로상에서 석양을 맞았다. 평양을 20킬로미터 정도 남긴 곳으로 평양시 강남군으로 생각된다. 

김진호기자



2003년 가을, 평양을 처음 방문한 뒤 보름 정도 간격으로 두 번째 방문을 할 수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의 앳된 어린 학생들을 다시 만났다. 소조별로 같은 학생이 같은 선율에 맞춰 같은 춤을 추거나 같은 장기를 펼치는 장면을 다시 보면서 ‘거리 두기’가 가능해졌다. 일종의 ‘소격 효과’였다. 이번에도 북으로, 징으로 보는 이의 가슴을 난타하는 공연이었다. 하지만 같은 레퍼토리를 다시 접하면서 차분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머리로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평양의 진면목을 만나는 여정은 이처럼 가슴에서 출발해 머리에 이른다. 사람마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가슴과 머리가 타협한다. 방문 횟수가 잦아질수록 머리 쪽에 가까워진다. 4번째 평양을 만난다. 하지만 그런 기자에게도 10여년의 공백은 컸던 것 같다. 생각의 행로를 되짚어 가슴 쪽으로 향했던 게 분명하다. 


버스는 어느새 평양에 진입하고 있었다.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을 막 지났다. 한복 차림의 남한 여성과 북한 여성이 도로 위로 양손을 맞잡아 달덩어리 같은 한반도를 맞들고 있는 기념탑은 평양의 남쪽 관문이다. 아쉽게도 해가 막 넘어가고 있었다. 오후 8시쯤. 숙소인 양각도 국제호텔 앞에는 직원 20여명이 도열해 남측 대표단을 환영해주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호텔 로비는 남측 대표단과 중국인,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잡화점과 서점을 비롯한 대부분의 호텔 내 상점들도 손님을 맞았다. 커피와 음료를 판매하는 은정찻집 여성 봉사원에게 물으니 “찻집은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며 열어놓는다”면서 “다른 점포들도 자정까지는 근무한다”고 했다. 필터로 거른 ‘온커피’ 한 잔에 “네 딸라(4달러)”였다. 잡화점 유리벽 너머로 물건을 쳐다보자 승강기 앞에 서 있던 벨보이가 다가와 닫힌 문을 두들겼다. 어느새 자정이 넘었다. 안에서 걸어나오는 여성 복무원의 얼굴에 피곤이 역력했다. “어차피 구경만 하려고 했다. 내일 다시 오겠다”며 간신히 문 여는 것을 만류했다. 중년의 벨보이는 “그래도 그렇지 손님이 오셨는데…”라며 못마땅해했다. 폐점시간을 묻자 “손님이 계시는 한 어떤 상점이건 문을 여는 게 맞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평양의 낮 기온은 33도 안팎이라지만, 밤에는 창문을 열어놓으니 으슬으슬할 정도로 선선했다.

<b>평양 미래과학거리 빌딩들</b> 지난 11일 평양 평천구역에 위치한 미래과학자 거리 인근에 고층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광경. 비슷한 높이로 보이지만 왼쪽의 하얀 탑이 있는 건물은 70층으로 평양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이다. 대동강에는 모래 준설선이 떠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평양 미래과학거리 빌딩들 지난 11일 평양 평천구역에 위치한 미래과학자 거리 인근에 고층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광경. 비슷한 높이로 보이지만 왼쪽의 하얀 탑이 있는 건물은 56층의 고층 살림집(아파트)이다. 대동강에는 모래 준설선이 떠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양각도 호텔 관광객 북적 
김일성경기장도 새 단장
9·9절 축전 준비 곳곳 분주
 


11일 아침 평양 시내로 나섰다. 산과 들만 ‘옷’을 갈아입은 게 아니었다. 평양도 그새, 많이 달라졌다. 특히 평천구역의 미래과학자거리에는 50여층 높이의 아파트를 비롯해 세련된 디자인의 고층빌딩들이 빼곡했다. 행인들의 옷차림 역시 세련되고 깔끔했다. 여명거리에도 최근 건립한 수십층 높이의 아파트들이 즐비했다. 북측 안내원은 “과학자와 연구사, 대학교수 등이 몰려 사는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국제유소년축구대회 장소인 10만석 규모의 김일성경기장도 말끔히 단장됐다. 그라운드와 좌석은 물론 1층의 선수 대기실, 탈의실 등이 잘 준비됐다. 평양 개선문, 만경대 등도 참관했다. 오랜만에 ‘평양랭면’을 먹으며 옥류관 테라스에서 바라본 대동강변의 풍경은 화창했다. 김일성경기장 앞 광장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는 9월9일 정권 창립(9·9절) 70주년 기념 군중대회를 준비하는 젊은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12일 평양은 비교적 맑은 날씨를 보이더니 오후 늦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b>옥류관 앞 거리의 평양 시민들</b> 지난 11일 오후 평양시 경상동에 있는 평양랭면 전문식당인 옥류관 앞길을 평양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옥류관 앞 거리의 평양 시민들 지난 11일 오후 평양시 경상동에 있는 평양랭면 전문식당인 옥류관 앞길을 평양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평양 | 김진호 국제전문기자 


유소년축구대회는 만 15세 이하의 중학생 선수들로 구성된다. 남측에선 경기 연천과 남강원도 남자팀이, 북측에선 국제축구학교팀과 4·25남자팀이 출전한다. 하나은행 여자팀은 북측 4·25여자팀과 친선경기를 치른다. 6개국 8개팀이 참가했다. ‘남강원도팀’은 북측에도 강원도가 있는 만큼 북측 관중들을 배려해 팀명을 바꿨다. 방북단은 개막 전날인 14일 만수대 의사당으로 김영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 의장을 예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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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ino's gino's 2018.08.24 16: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정은, 과학자 중시 … 평양 새 명물 고급식당엔 전용룸까지
    [중앙일보] 입력 2018.08.23 00:02 수정 2018.08.23 21:04


    김 위원장 집권 7년 … 평양을 가다
    김책공대 교수 등에 무상 아파트
    미래거리는 ‘북한판 판교’로 불려

    대북제재 속에도 대규모 건설 붐
    60~70층 빌딩, 스카이라인 바꿔

    평양 가는 길은 낯설지 않았다. 버스 창문 밖으로 펼쳐진 농촌의 모습은 어릴 적 봤던 우리 농토와 너무 닮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온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기자가 평양을 방문한 건 지난 10~17일. 제4회 아리스포츠컵 축구대회 취재단의 일원으로다. 첫 평양 방문이었다.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서 북측이 내준 대형 버스로 갈아타고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3시간여 달리자 우뚝 솟은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낙랑구역(구역은 우리의 구에 해당) 통일거리 입구에 건설된 30m 높이의 거대한 석탑은 6·15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이듬해인 2001년 지어졌다. 폭이 61.5m에 달하는 아치형 석탑엔 남한과 북한의 여성이 한반도 지도를 마주 들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다.

    확 뚫린 대로변 양편에 우뚝 선 알록달록 형형색색으로 채색된 아파트와 초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단번에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세히 보니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들엔 주홍, 분홍, 코발트, 비취, 그린 같은 형광색상의 페인트를 입혀 새 단장을 했고, 최근 건설된 신형 아파트와 60~70층짜리 초고층 빌딩들은 유선형이나 타원형 건축기법을 써 세련미를 더했다.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후 형성된 초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평양 시내의 명물로 떠오르면서 스카이라인을 바꿔놓고 있었다.

    대동강수산물식당 2층에 있는 과학자 전용룸. 과학자들에겐 음식값도 깎아주고 예약도 우선적으로 받아준다. [이정민 기자]

    숙소인 양각도 호텔에서 만난 30대 여성 안미경 씨는 “세대주(남편)가 김일성대 교원(교수)여서 지난해 여명거리의 살림집(아파트)을 무상 배분받았다. 배분받은 날 온 식구들이 같이 울었다”고 소개했다. 딸을 포함, 세 식구가 살고 있는데 방 4개와 화장실 2개가 있는 아파트를 배정받았단다.

    2015년 건설된 미래과학자거리의 아파트도 김책공대 교수와 연구원 등 과학자들에게 무상 분양됐다. 미래과학자거리는 북한의 과학자 중시 정책의 상징이다. 레지던스 은하 타워, 미래과학자거리 트윈 타워 등이 잇따라 완공돼 하나의 타운을 형성하고 있고, 단지 내에 상점들이 입주해 있어 편리하게 돼 있다. ‘북한판 판교’라 불리는 이유다.

    유례없는 고강도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의 수도에서 이처럼 대규모 건설 붐이 일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북측 안내원에게 “대규모 건설사업을 하려면 자재 등을 수입해야 할 텐데 제재의 영향을 받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재와 기술이 100% 국산화돼서 제재와는 관련이 없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또 다른 안내원은 “지금 제재가 있다고 하지만 인민들이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은 이렇다.

    “고난의 행군 때는 평양에도 배급이 끊기고, 전기 공급이 제대로 안 돼서 열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때 자력갱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또 재래식 무기론 안 된다, 핵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도 우리가 핵을 갖고 있으니까 인정하고 대접해주고 있지 않은가.”

    안내원이 안내하는 곳만 제한적으로 볼 수 있을 뿐 일반 주민들과는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볼 수는 없었지만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형성된 자신감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이와 관련,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표면적으로는 대북 제재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듯한 모양새지만 최근 외환보유고가 줄어드는 등 제재가 장기화하면서 그 효과도 가시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옥류관에 이은 평양의 신흥 명물이라는 대동강수산물식당에서도 달라진 평양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달 문을 연 이 식당은 1층에 철갑상어, 연어, 대게, 털게 등이 담긴 대형 수조가 여럿 있고 2, 3층은 1500석 규모의 식당을 갖추고 있다. 수산물과 식재료를 파는 2층의 마트에서는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수입해온 간장, 식초, 마요네즈, 참기름, 캐비어 같은 고급 식재료가 판매되고 있었다. 가격표를 보니 일제 참기름이 1077원, 이탈리아산 비인코 식초는 700원이다. 북한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4000원가량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고가다.

    북한이 자체 기술로 양식에 성공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철갑상어회는 이 식당의 대표 메뉴인데 1㎏에 14.5달러라고 표시돼 있었다. 외국인 전용 상점이 아닌데도 메뉴판에 달러로 가격이 표시돼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평양 전역에서 달러와 유로,중국 위안화가 통용된다) “북한이 최근 개인들의 거래와 시장경제 활동을 허용하면서 대규모 재력가(돈주)도 생기고, 월급 이외에 생기는 수입이 상당하다”는 게 북한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북측 안내원은 "과학자들에겐 음식값도 깎아주고 전용 식사칸까지 제공한다”고 소개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북한 제품의 포장기술과 디자인. 훈제 햄이나 소시지, 수산물들이 진공 포장돼 있었고 과즙을 함유한 다양한 탄산단물(탄산 주스) 캔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10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동료 기자는 “포장기술과 디자인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며 놀라워했다. “국산화 노력의 결실”이라고 북측 안내원은 설명한다.

    경제 제재 속에서도 국산화에 어느 정도 실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은 위원장의 과학중시, 과학인 우대 정책에 기인한다는 게 북측 인사들의 공통적인 얘기다. 북측 안내원 김 모 씨는 “과학자들에겐 고급 살림집을 우선적으로 무상 제공하고 과학자 전용 상점이 있어서 생필품도 싸게 살 수 있다”며 “그러니 다른 걱정 없이 과학 기술 연구에만 열중할 수 있다”고 했다.

    핵, 경제 병진 정책을 표방한 김 위원장은 지난해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핵 무력을 완성,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4·27 남북, 6·12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를 약속한 북한은 지금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비핵화 샅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가 공언한 대로 핵을 내려놓고 과감한 경제 개혁 개방으로 나설지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평양=이정민 기자 lee.jungmin@joongang.co.kr

  2. gino's gino's 2019.06.01 15:1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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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에 직항로로 다시 가 본 평양, “달라졌다” 기사입력 2018.09.29.

    ·10년 만에 직항 경로로 다시 가본 평양, 두 정상의 이해와 신뢰 깊어져


    나는 그동안 서너 차례 서해 직항로를 통해 방북한 경험이 있다. 남북관계가 정체되거나 악화되었을 때는 직항로는 굳게 닫혀버린다. 직항로는 남북관계의 맑음과 흐림을 재는 일종의 가늠자인 셈이다. 9월 18일 서해 직항로를 따라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만10년 만이었다.


    평양 정상회담 사흘째인 9월 2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김정은 국무위원장 내외가 백두산 천지에서 남측 특별수행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문 대통령 부부 옆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홍석현 중앙홀딩스 그룹 회장 사이에 있는 이가 필자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공식수행원과 특별수행원, 그리고 기자단을 태운 공군 1호기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평양국제비행장(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대통령 전용기의 항로는 과거 특별전세기의 항로와 동일한 듯 보였다. 평양 인근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북녘 지형은 같았지만 마을의 집과 논밭의 모습은 10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신축한 집들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주택의 외관과 지붕들은 과거보다 깨끗해졌다. 논밭도 잘 정비되어 보였다.

    평양국제비행장 청사는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현대식 건물로 면모를 일신했다. 과거의 칙칙했던 순안공항의 모습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공항이 한 나라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중요 얼굴 중의 하나임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공항에서의 환영행사는 2000년 정상회담 때와 비슷했다. 이미 두 차례나 정상회담을 한 후인지라 양 정상과 부인들은 자연스럽게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았다.

    리설주 여사의 답가는 끝내 사양

    2001년 마지막으로 투숙했던 고려호텔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과거보다 깨끗하고 밝아진 느낌이었다. 방에는 김일성 주석의 초상도 없었다. 예정된 행사(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면담) 참석차 호텔을 나서면서 불현듯 한 기억이 떠올랐다. 2000년 8월 남북 공동행사 참가차 갔을 때 고려호텔 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우리 일행은 3대 헌장 탑 준공식 참석 여부를 놓고 북측 보장성원들과 치열하게 논쟁했다. 논쟁 끝에 말문이 잠시 막힌 북측 성원은 우리를 향해 “남조선 특무 아니냐”고 공격했다. “특무는 아니고 특무를 가르친 선생”이라고 되받아쳤다. 그때의 다소 살벌했던 분위기는 이번에는 완전하게 달라졌다. 예민한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삼갔다.

    저녁엔 평양대극장에서 평양 정상회담 환영 공연이 있었다. 양 정상이 입장할 때 평양 시민들은 일제히 기립했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수준의 박수를 치며 만세를 연호했다. 북녘 땅에 와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공연 후 목란관에서 환영 만찬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남과 북의 인사들이 동석해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소통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특히 남측 경제계 인사들에 대한 북측 인사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현송월 삼지연악단 단장은 2박3일간의 오찬과 만찬석상에서 계속 경제인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특히 이재용 삼성 부회장 옆자리에 앉아 이 회장을 대접하고 있었다. 북한의 경제개발에 대한 관심의 크기를 엿볼 수 있었다.

    목란관 만찬장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김정숙 여사가 무대로 나와 박태준이 작곡한 ‘동무생각’을 불렀다. 남측 참석자들은 일제히 리설주 여사에게 답가를 요청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눈치를 보던 리 여사는 열화와 같은 요구에도 끝내 노래를 하지 않았다. 아마 북한식 의전상 최고 존엄의 부인에게 그런 청을 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일 듯했다.

    오랜만의 평양 방문에서 온 흥분 탓인지 9월 19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호텔 문을 나섰다. 2000년에도 아침에 고려호텔 밖을 나선 적이 있었다. 그때는 평양역도 못가서 제지를 받았었다. 이번엔 달랐다. 역전 백화점을 끼고 돌아서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점심은 옥류관에서 했다. 9월 평양 공동선언을 발표한 남과 북의 정상도 동석했다. 자연스럽게 오찬장의 화제는 공동선언 내용이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김정은 위원장과 동석했던 남측 인사의 전언에 의하면 김 위원장은 측근들의 태반이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강력하게 계속 답방을 요청해서 서울을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 내외분이 잠깐 대동강 주변을 보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이때 남측 인사는 재차 김정은 위원장에게 방문 여부를 확인했다. 김 위원장도 다시 한 번 가겠다는 확약을 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답방이야말로 남북관계 발전의 또 다른 한 획을 긋는 일이다.

    저녁에는 5·1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빛나는 조국’을 관람했다. 나는 과거 같은 장소에서 ‘아리랑’ 공연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리랑 집단체조 때와는 내용이 현저하게 달랐다. 체제 선전이나 군사력을 과시하는 장면은 거의 없었다.

    백두산 등정 기대가 마침내 현실로

    공연의 절정은 특별장인 ‘평화·번영의 새 시대’와 종장인 ‘통일 삼천리’였다. 아마 남측 대표단을 위해 특별히 구성한 듯했다. 공연은 15만 평양시민들 앞에서 한 문 대통령의 짧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연설로 절정을 이루면서 끝났다. 문 대통령은 남과 북이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판문점 선언과 9월 평양 선언의 핵심 내용을 힘주어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백두에서 한라까지 우리 강산을 영구히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의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자고 김정은 위원장과 합의했다고 말했다. 잠시 침묵했던 평양시민들은 곧 열렬한 박수로 화답했다. 남북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실감했다.

    고려호텔에 돌아오자 새로운 희소식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20일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백두산 등정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을 출발할 때 혹시 백두산에 갈 수도 있다는 희망 섞인 기대를 했었다. 경등산화와 가벼운 우모복을 챙겨온 것도 그 때문이다. 막연한 기대가 현실이 된 셈이다. 새벽녘에 우리 일행은 평양공항으로 출발했다. 호텔 로비에는 전날 저녁 서울에서 공수해 온 방한복이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가져온 우모복의 빛이 그만 바래 버렸다. 호텔을 나서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연도에는 평양 들어 올 때처럼 수많은 평양시민들이 환송을 위해 도열해 있었다. 순간 반가움보다는 연민이 앞섰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고려항공에 탑승했다. 과연 이런 날에 천지를 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런데 삼지연 공항의 날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화창했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9월 하순인데 춥지도 않았다. 공항에서 백두산 가는 길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과거 지금과 비슷한 계절에 두 차례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칼바람과 칼비, 짙은 안개로 한 번도 천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천지에 오르니 백두산이 자신의 속살을 다 내놓고 있었다.

    2박3일의 짧은 평양 방문 일정을 끝내면서 몇 가지 상념들이 내 머리를 스쳤다. 우선 김정은 위원장 체제의 북한은 체제 생존과 경제발전을 위해서 과거와 다른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또한 남과 북의 두 정상이 자주 만나서 대화하고 신뢰를 쌓아 가면 어려운 국제환경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번 정상회담 과정에서 두 정상은 16시간 이상 만났고 오찬·만찬 자리에서도 쉴 사이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과 신뢰가 그만큼 깊어졌을 것이다. 키신저는 ‘모든 업적은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비전에 지나지 않는다. 뛰어난 업적은 불가피한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굳게 확신하고 몸을 던지는 데서 이뤄진다’고 했다. 두 정상이 몸을 던져 우리 민족이 공감할 수 있는 비전을 업적으로 만들어 주길 기대한다.

    최완규 신한대학교 설립자·석좌교수 기자

애국가 첫구절의 '동해물'에 처음 발을 적신 것이 중학교때이니 14세쯤 된 것 같다. 두번째 '백두산'을 밟아본게 40줄에 들어서니 30년 가까이된 세월이 걸린 셈이다. 백두산만 4박5일의 여정이었다.


[경향신문]|2003-10-06|07면 |45판 |특집 |기획,연재 |4442자

분단 50여년의 세월은 남북간 이질감을 심화시켰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두 한국간 정치.경제 분야의 교류협력은 활발해졌지만 사회.문화 분야에서의 동질성 회복작업은 아직 더디다. 이러한 가운데 남북 역사학자들은 지난 9월 20∼27일 백두산.평양에서 항일투쟁 역사를 주제로 한 학술토론회를 가졌다. 토론회에 참석한 남측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북측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국 옌볜대 소속 학자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공유할 수 있는 '중간 주제'를 선택, 접점을 마련한 뒤 장차 상고사와 발해사 등의 영역으로 학술교류의 접촉면을 넓혀나가기로 했다. 남북 모두 미완성 상태인 '절반의 항일역사'와, 북한 젊은이들을 통해 본 '오늘의 북한'을 세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주


지난 9월23일 백두산 삼지연의 광활한 침엽수림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이깔나무(낙엽송)의 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민족의 영산(靈山)' 한 기슭에서는 의미 깊은 모임이 열렸다. 삼지연 베개봉호텔 2층 세미나실에 내걸린 주제는 '일제의 아시아 침략과 조선민족의 반일 투쟁사 연구에 관한 국제학술토론회'.


분단 60년이 다 되도록 하나의 근.현대사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던 남북 및 중국 교포 학자들이 모처럼 친근하게 공유할 수 있는 주제를 택했다. 학자들은 아직은 체제와 이념이 다른 현실적인 제약을 의식한 듯 기조발언에서부터 조심스러웠다. 첨예한 갈등을 피해가기 위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도 해석됐다.

"오늘은 비록 북과 남이 갈라져 있지만 역사는 반드시 제골(길)로 흘러 백두산에 근간을 둔 이 땅이 멀리 한라산 백록담에까지 다시 하나의 지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북측 단장 최진혁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의 인사말에 남측 단장 장을병 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은 "우리가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 하는 까닭은 민족이 함께 살아갈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말로 화답했다.

이어 남측 학자들은 홍익인간과, 일본의 교과서 왜곡, 일제의 묘향산 보현사 유물 훼손 등을 주제로 비정치적 논문을 발표했고, 북측은 백두산 일대에서 전개된 김일성 주석의 항일 유격대활동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에 초점을 맞췄다. 오전 8시부터 저녁 무렵까지 진행된 이날 세미나에서 남북 학자들은 단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고 시종 진지한 자세를 보였다. 남측 9개, 북측 6개, 조선족(최문식 중국 옌볜대 민족연구원장) 1개 등 모두 16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북측 김병선 사회과학자협회 부국장은 "민족해방 투쟁에 여러 갈래의 투쟁조류들이 얼마나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는가가 그 지위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기준의 하나"라며 "백두산 일대 빨치산 무장투쟁은 해방된 그때까지 견지되고, 투쟁이 중단없이 지속됐다는 것이 명백하게 판명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고등외사월보'와 옛 소련의 국제정치잡지 '태평양' 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일본에 대한 성토는 남과 북이 따로 없었다. 북측 정치건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장은 "최근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를 보면 일제의 위협이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세기 전반기에 감행된 일제 침략사를 다시 한번 냉정히 되돌아보면서 새세기에 그런 피의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고 역설했다.

'일제하 좌우합작론의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발표한 남측 권희영 정문연 교수는 "일제강점기 유일한 좌우합작의 중심에 위치했던 신간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가 항일 투쟁 측면에서 일정한 기여를 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전략을 전환함에 따라 좌우합작이 끝내 붕괴됐음을 지적하며 역사적으로 좌우합작은 상대편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시도될 때 그 한계가 명백한 것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정문연 정연순 교수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현상과 남북공동대처방안'을 통해 남북간 초.중.고교 역사교과서 통합을 제안했다. 그는 "통합 교과서를 통해 분단 이후 남북 학생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바라봤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객관적, 과학적, 주체적 인식을 갖도록 유도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한 남북협의회 구성과 교사들의 공동연수, 인터넷상 홈페이지 구축 등을 제안했다.

정문연 이길상 교수는 일본과의 역사교과서 충돌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북간 역사의식의 공유라며 일본뿐 아니라 최근 강화되는 중국의 우리 상고사 및 고대사 왜곡 현상을 지적했다.

남북 학자들의 진지한 논문발표에도 불구하고 이날 학술토론회에는 어딘가 알맹이가 빠진 듯한 인상을 남긴 게 사실이다. '학술토론회'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공격적 문제제기와 활발한 토론이 생략된 것이다. '함께 한 과거, 함께 할 미래'라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남북 학자들이 서로 자기들의 논리만 설파한 셈이다.

유영옥 경기대 교수는 "남한 학자들은 남에 관한 발표를 많이 했고, 북 학자들은 북에 관한 연구를 주로 했는데, 이를 바꿔서 연구했으면 더 많은 것을 배우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場外 토론회' 마음 연 남과 북
남북 학술회의는 엄연한 체제와 이념 차이로 치열한 토론문화가 자리잡기 힘든 한계가 있다. 이번 백두산 학술회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북학자들은 일단 장외(場外)로 나서자 한층 자유롭고 활발한 토론을 벌여 '남북이 함께하는 역사'의 가능성을 열었다.

세미나 중간 휴식시간이나 만찬장은 물론, 1주일간 함께 한 답시기간 동안 양측 학자들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특정 분야에서는 공감대가 이뤄지기도 했다. 북측 최진혁 부위원장과 남측 김호일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소장간의 장외 토론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자들의 항일투쟁의 간극이 화제에 오르자 최부위원장은 "우리나라 반제국주의 운동에서 민족주의운동이 공산주의보다 먼저 시작했으니 맏형이나 마찬가지"라고 정의내렸다.

김소장이 "스칼라피노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의 항일운동은 공산주의건, 민족주의건 이념과는 상관이 없었다"고 말하자 최부위원장은 전격적인 공감을 표시했다. 그는 "어느 분의 글인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민족주의 운동은 맏형같고 공산주의 운동은 자유분방한 막내같다'고 규정한 것이 생각난다"면서 "이념적으로 대립한 것도 있고, 투쟁방법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로서야 다같이 우리 민족을 위한 것이 아니었느냐"고 말했다.

김소장이 일제 강제연행자 42만명의 명단과 관련 공동대응을 제안하자 최부위원장은 "일제와 싸울 적에 우리가 절반 땅만 광복하자고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맞장구를 쳤다.


■보천보.무산지구 답사
남북 학술토론회 참가자들이 묵은 삼지연 베개봉 호텔에서 양강도 보천군까지는 줄잡아 120리(48㎞)길. 해발 1,420m의 삼지연 일대 고원에 뻗은 길들은 정연하게 머리 가르마를 탄 듯 침엽수 밀림 사이로 일직선으로 내뻗었다.

길가 감자밭에는 군데군데 수확해놓은 붉은 감자가 쌓여 있었고 보천읍이 가까워지면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가림천에는 따사로운 햇살 아래 아낙네들의 빨래하는 모습이 보였다. 북측은 세미나를 앞둔 지난 9월 21∼22일 일제 강점기 김일성 유격대의 대표적인 전적지인 보천보와 무산지구 전투현장으로 남측 학자들을 안내했다.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4일 밤 10시. 김일성 유격대가 조국광복회 갑산 지부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당시 함경북도 갑산군 혜산진 보천보 읍내를 기습한 사건이다. 국경 경비에 자신하던 일제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박영태 북한 양강도 혁명사적관 실장은 "일제 경찰 희생자는 7명에 불과했지만 이는 혼비백산한 일제 경찰이 민가에 숨어들자 인민 피해를 우려, 적극 추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인용하며 "보천보 전투의 의미는 일제에 입힌 피해규모보다는 조선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보천보 전투는 남측 학계에서도 의미를 인정받게 된 반면 양강도 대홍단군 무산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는 남측에서 아직 '공증'되지 못한 사건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오다가 처음 만나는 양갈래 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비포장길 40여㎞를 달리면 대홍단군 신사동 일대가 나온다. 이 지역은 일제시대 한인 벌목노동자들이 감자와 소금, 산배추김치로 연명하며 중노동에 시달리던 한맺힌 장소다. 김일성 유격대는 39년 5월23일 일본군 부대를 나도그늘사초가 무성하게 자란 들판으로 유인, 일거에 30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정치적 선전효과에 치중했던 보천보와 달리 '치고 빠지는' 유격전의 위력을 입증해보인 곳이다. 북측은 전투일을 기념해 39.523m 높이의 대형 승전기념탑을 당시 전투현장 한 복판에 건립해놓았다.

최근까지 한국전쟁 때 이재민들이 모여살던 682㎢ 면적의 대홍단군은 대단위 감자 및 밀재배 단지로 육성되고 있다. 현지 안내원(강사) 이청미씨(21)는 "평양에서 2000년 1,200명의 제대군인을 보내줘서 감자 밭 개간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2003-10-07|08면 |45판 |특집 |기획,연재 |4055자

`우리는 이천만 인민을 불러 일으켜, 우리 힘으로 나라를 독립해야 한다' `내 고향 떠나올 때, 옷자락에 매달리며 꼭 왜놈치고 돌아오라던, 귀여운 누이동생 부탁 잊지 말자' `너와 내가 떨쳐나가 조국 광복 이룩하자'1930년대 후반기 백두산 일대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벌인 항일 빨치산 대원들이 나무에 써놓았다는 글들이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으로 써놓은 글은 대부분 유실됐지만 북측은 이를 화학적인 방법으로 발굴, 복원한 뒤 보관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묵었던 귀틀집 병영 안에는 '우리 모두가 공부하자, 지식은 황금보다 유력하다'는 구호가 걸려 있다.

지난 9월22일 방문한 삼지연 인근 사자봉 밀영(密營)을 비롯한 빨치산부대의 유적지에는 이같은 '구호나무'가 상당수 보존돼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탄생지로 성역화된 백두밀영 등에도 6각형 유리기둥 안에 약품처리 해놓은 구호나무는 심심찮게 눈에 띈다. 물론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입혀진 정치구호가 주류를 이룬다. 이 구호들에 대해 "조작됐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있게 나오고 있지만 구호에 담긴 의미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풍찬노숙하던 독립군들의 활약상에 대해 남이건, 북이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의 질곡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조차 기록에서 지워버리거나, 희미하게 처리하고 있다.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은 그렇게 과거 속에서도 완전한 화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장을병 정신문화연구원 원장은 "보천보와 무산지구 전투는 비교적 중간자적 관점에서 기술한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알고 있었다"면서 "역사적 사실은 사실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국내 항일무장투쟁이 1920년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운동 진영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인해 사실상 중단된 상태에서 김일성유격대가 벌인 보천보 전투와 그 의미는 이미 학술적으로 검증, 평가가 끝난 사건이다.

남과 북의 역사학자들은 일본 우파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하는 데는 같은 의견이면서도 정작 자신들의 교과서에는 관심이 낮은 것도 사실이다. 남측에서는 작년 여름 '보천보전투'를 기록한 고등학교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자 일부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교육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난이 빗발치기도 했다. 남북이 공유해야 할 항일 투쟁사에서도 냉전의 그늘이 여전히 드리워진 상태임을 보여준 경우였다.

무산지구 전투는 아직까지 우리 학계에서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어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도 검색할 수 없는 상태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김호일 소장은 "무산지구 전투는 이번 방북기간 처음 접했다"면서 "국내외 문헌을 뒤져 확인이 되면 학술적으로 공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북측도 '반쪽 역사'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백두산 일대 항일유적은 100% '백두산 3대장군(김일성.김정숙.김정일)'의 발자취뿐이다. 20년대까지 백두산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여러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던 홍범도 장군의 유적지도 괄호 속에 처리됐다. 남측의 한 학자는 "역사에서 어느 한 부분만 잘라낼 수는 없다"면서 "김일성유격대의 활약도 이전 홍범도 장군을 비롯해 면면하게 이어지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봐야지 더욱 빛이 날 것"이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일제 강점기 종교단체 가운데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던 천도교도들에 대해서도 그 흔한 기념탑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남측에선 전투지역 중심으로 기념비를 만들어놓은 동학혁명의 유적조차 단장해놓지 않았다. 북측이 생생한 기록으로 남겨놓은 천도교 함경남도 도정(道正)이었던 박인진 선생(상자기사 참조)의 경우는 예외였다.

3.1운동도 어느 지역보다 평안도와 함경도 등 북선(北鮮)지역에서 활발했지만 적어도 평양 시내에는 이를 기념하는 어떠한 유적도 없었다.

같은 사안을 놓고 해석을 달리하는 사례도 있었다. 우사 김규식박사연구회의 김재철 회장 대행은 이번 학술토론회에서 50년 9월17일 우사의 납북과정에 대해 "평화옹호대회에 참석하라는 이승엽 당시 서울시 인민위원장의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가 그 길로 북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측의 한 학자는 이후 사적지 답사 과정에서 "우사가 납치된 것처럼 발표한 것은 유감"이라며 "실제로는 전황이 불안정해지면서 남측 민주인사들의 신변안전을 위해 북행을 권유했고, 본인들 의사를 좇아 모셔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규식.조소앙 선생을 비롯한 전쟁중 납북자들은 이후 '재북 평화통일 촉진회'를 결성, 지식인으로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는 게 북측의 주장이다. 남측 학계에선 한학의 대가였던 조소앙 선생 등 일부 납북자들이 북쪽의 조선왕조실록 번역작업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남북의 동질성은 이데올로기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된 역사기록과 사적지보다는 오히려 정서적인 측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광복회는 작년에 이어 올해 8.15행사 때도 문화관광부측에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의 참배를 공식 요청했다. 한국전쟁 도중 북으로 간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오하영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10여명의 묘역을 참배하기 위해서다.

남북 학자들은 백두산 천지지역을 함께 답사하며 일제가 만주사변때 백두산 정계비를 훼손함에 따라 이후 북.중간의 국경분쟁에서 우리땅을 빼앗긴 데 대해 울분을 나눴다. 하지만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정서적인 공감을 나누는 것과, 항일운동사를 비롯한 과거 역사를 정확하게 복원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김호일 소장은 "반일 반제투쟁의 이념과 정책, 사상을 떠나서 남북이 공통분모를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오랫동안 헤어져 연구를 달리해온 게 사실이지만 잦은 학술교류를 통해 벽을 허물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납북인사들의 후일담처럼 정확한 기록을 교환하지 못함에 따라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면서 "그 때문이라도 잦은 학술교류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北 황만청 보천보 혁명사적관 부관장
북한에도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항일운동을 한 사람의 족적은 있었다. 천도교 지도자로 많은 천도교 소속 청년들을 항일투쟁으로 이끈 고 박인진(朴寅鎭) 선생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남쪽에서는 천도교 내부 기록을 제외하면 그에 대한 공식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박선생이 현재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모셔진 게 주요한 이유가 된 듯하다.

지난 9월22일 백두산 밀영 방문길에 만난 북측 황만청 보천보 혁명사적관 부관장(61)은 "박선생은 비록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일제에 항거하고 조국 광복 성전에서 높은 위업을 달성한 분"이라고 평가했다.

황부관장은 "박선생은 1930년대 후반 김일성 유격대의 항일투쟁에 적극 호응, 휘하 천도교 청년들을 대거 합류시킨 인물로 빨치산 간부급 100명의 유해만을 모셔놓는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치돼 있다"고 소개했다.

황부관장에 따르면 박선생이 백두산 일대에서 항일유격대 활동을 하던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은 1936년 11월15일 밀영에서였다. 이 자리에서 당시 중국 장백현과 갑산, 풍산, 삼수, 혜산 등 5개 종리원(宗理院.군단위 천도교 조직)을 관할하던 박선생 휘하의 천도교 교인들과 김일성유격대의 인연은 시작된다.

황부관장은 "김주석이 이 자리에서 '천도교도들은 하늘을 믿되 민족의 하늘을 믿어야 한다'면서 항일 무장투쟁에의 동참을 권유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50대였던 박선생은 '내가 직접 산에 들어가 싸울 수는 없지만 천도교도들을 항일전선에 많이 동원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박선생은 이후 장백현 종리원대표회의를 갖고 관내 교인 및 청년들 대부분을 그해 5월5일 발족한 조국광복회에 가입시켰다. 일제 경찰의 '사상휘보'에 따르면 조국광복회는 창립 1∼2년만에 함경도와 평안도 및 만주일대 20만명의 조직원을 확보, 위협적인 무장투쟁단체로 성장했다.

황부관장은 "이중 조국광복회 함경남도 풍산.갑산.혜산지구는 순수 천도교도들로만 구성됐다"고 말했다. 박선생은 일제가 37년 10월과 38년 5월 두차례에 걸쳐 독립투사들에 대한 대규모 검거선풍을 일으켰던 '혜산사건' 당시 장백현에서 체포, 구금돼 심한 옥고를 겪은 뒤 병보석으로 출감해 39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항일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였으면서도 단지 김일성부대와 연합했다는 이유로 남측 독립운동사에선 배제되거나 축소됐다.

 

[김진호기자의 訪北 취재기]‘변화의 北韓, 오늘의 北韓’

북한의 변화는 백두산 관광의 거점인 삼지연읍에서도 이뤄지고 있었다. 남북 학술토론회와 역사유적 답사를 위해 들른 백두산 일대 곳곳에서 경제재건을 위해 부심하고 있는 흔적이 엿보였다.

백두산 관광의 거점인 삼지연읍에 위치한 베개봉호텔은 작년말부터 시작한 증축·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호텔 관계자는 “3층 건물이던 1호동(객실 48개)의 보수공사와 2호동(4층·객실 80개)의 신축공사가 연내에 마무리될 것”이라며 “공사가 완공되면 최대 245명의 손님을 투숙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삼지연읍에서 10㎞ 가량 떨어진 ‘리과수 노동자구’에는 수십채의 주택 겸 숙박용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2~3층짜리인 이 건물들은 현지 주민들의 거처뿐 아니라 관광객들의 민박 장소로도 쓰이고 있다. 민박을 할 수 있도록 취사도구와 이부자리 등이 완비돼 있었다. 이 건물들은 “외국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수준으로 지어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우선 1단계로 2000년 11월부터 삼지연읍 일대에 3,000채가 지어졌으며, 앞으로 이같은 대단위 건물들을 더 많이 지을 계획이라고 북한관리들은 설명했다.

이밖에도 삼지연에는 300명분의 객실을 보유하고 있는 ‘제1여관’과 내무반식 숙박시설 100동이 마련돼 있어 외국관광객들이 몰려와도 숙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북측인사들은 홍보했다. 1동당 평균 200명의 숙박이 가능하다고 하니 이 시설 하나만 해도 한꺼번에 2만명의 관광객들을 소화할 수 있는 셈이다.

대표적 위락시설로는 해발 1,621m의 베개봉 한쪽 능선에 있는 스키장을 꼽을 수 있다. 이 스키장은 과거 제대로 사용되지 않다가 “국제경기를 열 수 있는 수준으로 확장하라”는 김위원장의 지시로 시설이 확충돼 사용중이다.

삼지연으로 가는 도로와 열차, 항공로도 북한 전체 수준에 비하면 꽤 잘 돼 있는 편이다. 삼지연에서 60리 떨어진 양강도 혜산까지 열차가 다니고 있고, 삼지연엔 중형 활주로가 갖춰져 있어 평양에서 비행기로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밀영을 비롯, 백두산 일대에 널린 혁명사적지들을 방문하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북측 당국이 일찍부터 수많은 도로를 닦아 놓아 육로 교통길도 비교적 양호하다.

주요 관광자원으로는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백두산 천지와 차로 4시간 운행하는 동안 계속되는 울창한 원시림 지대, 천지 아래의 광활한 화산암 지대와 사구의 이국적 풍경, 밀영을 비롯한 혁명사적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찻집이나 노래방 등 외국인 및 남측 관광객들이 필요로 하는 위락시설만 갖춘다면 백두산은 국제규모의 관광단지로 거듭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북한 변화의 신호는 베개봉 호텔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의 태도에서도 묻어났다. 이 호텔 1층 기념품점에서 5년째 판매원으로 일하고 있는 정경선씨(27)는 “월급 2,500원에 판매목표 초과달성시 지급되는 성과급을 합하면 월 수입은 4,000원이 넘는다”며 “외국인들이 오면 수입이 더 늘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씨의 월 소득은 북한 생산직 근로자의 평균 월 급여 2,000원의 2배가 넘는다. 정해진 업무에 정해진 급여만 받던 북한에 인센티브제가 도입된 셈이다.

2002년 도입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가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백두산 일대에서도 시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사례였다.

외부인들을 대하는 북한 당국자들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었다. 기자 일행은 방북기간 동안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북한 주민들과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남측 방문객마다 안내원이 따라붙고 예정된 장소 외에는 방문할 수 없도록 하던 과거에 비하면 큰 변화였다.

( 경향신문.2003-1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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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30. 10:29

"여기는 평양 비가 내린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1972년 어름에 처음 평양을 방문한 남측 기자들이 전한 평양 모습 가운데 아직도 회자되는 명 신문기사 제목이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남북 지도부의 정치적 셈법이 맞아 이뤄진 일시적인 해빙이었을지언정 ‘여기’와 ‘평양’이라는 공간적 무대와 ‘비’라는 정서적 짠함이 섞이면서 묘한 울림을 만들어냈을 법하다. 기자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른들이 지켜보시던 흑백TV 화면에서 처음 판문점을 넘어 육로로 개성을 지나가는 남측 대표단의 자동차행렬을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가는 길도, 오는 길도 유난히 비가 많았다. 평양은 세 번째 방문길이었다. 이산가족 상봉행사와 적십자 회담이 열리는 금강산과 개성공단 지역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러면서도 유독 이번 평양 취재 중에 위의 한 구절을 주머니 속 동전처럼 계속 들고 다닌 것은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냉전 시절의 잔재와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 상황이 종종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만큼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남긴 취재였다.

인천공항로 막 진입하는 길목에는 3~4명의 반북단체 회원들이 북측 최고지도부를 비난하는 피켓을 들고 대표단을 태운 버스 코 앞에서 흔들어댔다. 불길한 전조였을까. 남측 당국대표단을 태운 대한항공 전세기 KE9815 편이 인천국제공항 주기장을 떠나 활주로로 진입하던 순간 기장은 기내방송을 통해 “북측에서 비행훈련이 많아서 출발시간을 늦춰줬으면 한다는 요청이 왔다”고 안내했다. 기장은 20여분 뒤 다시 기내방송을 통해 “평양지역에 뇌우가 오고 있어 출발을 1시간 30분정도 늦춰야 할 것 같다”고 정정방송을 했다. 정부 당국자들 중에는 두가지 방송 중 어느것이 맞는지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서해직항로에서 디귿(ㄷ)자로 들어가는 남포 인근 해역부터 비구름이 잔뜩 몰려 있는 위성사진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취재진의 결론은 둘 다 맞다는 것이었다. 우중에 훈련을 할 가능성은 없지만 그 역시 북측에서 전한 말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북측은 이미 남북해외 민간부문이 우여곡절 끝에 합의한 대표단 규모를 민간 615명에서 300명으로, 당국 70명에서 40명으로 줄인 바 있다.

언뜻 비 오는 평양을 떠올렸고, 실제로 비행기가 인천을 이륙한지 50여분 만에 도착한 순안공항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인 권호웅 내각 책임참사를 비롯해 최영건 건재공업성 부상, 이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등은 보장성원들과 함께 우산을 챙겨들고 그야말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남측 대표단 영접준비에 열심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에도 남측 대표단은 북측 기자들의 요청으로 정부대표단, 자문단 등으로 나누어 활주로에서 단체로 포즈를 잡기도 했다. 전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환대를 받고 있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출발 전 불길함은 덜해졌다.

일행은 마이크로 버스에 몸을 싣고 수양버들 가로수가 허리를 굽힌 ‘유경(柳京)’으로 들어갔다. 백화원 초대소로 가는 길은 금수산기념 궁전에서 좌회전을 해야했다. 오른쪽은 평양시내로 가는 길.

2년 전 평양을 처음 보았을 때 고대 로마와 비슷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곳곳에 기념비적인 건축물과 조형물이 많아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 또는 전시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꼭 체제선전을 위해 건설한 ‘쇼윈도우라’고 까지 잘라 말하지는 않더라도 정치적 상징이 어린 모뉴먼트로 가득 찬 도시임에는 분명한 듯하다. 주체사상탑과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인민문화궁전, 4.25문화회관, 청년문화회관, 김일성경기장, 개선문 등은 처음 찾는 남측 방문자의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다만, 밤이 되면 관람객이 떠나고 적막이 감도는 박물관처럼 평양시내도 밤이 되면 텅 빈 무인공간이 된다.

 

남측 당국대표단을 태운 버스는 금릉동굴과 구구절 다리를 거쳐 대성구역에 위치한 백화원 초대소에 도착, 2각에 짐을 풀었다. 떠날 때 만해도 주암, 흥부 초대소였던 숙소가 갑자기 영빈관급으로 격상돼 있었다. 남측 언론에서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깜짝 회동’ 가능성이 집중 부각된 배경이기도 하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예상 면담 성사 가능성은 채 10%가 안돼 보였다. 언론의 예상은 억측일 수밖에 없었다. 남북관계에선 한 개의 행사 또는 회담을 치르면서도 수없이 돌출변수가 생겨나지만 이번엔 드물게 기분 좋은 변수였다. 따지고 보면 이번 행사 자체가 ‘6.15로 돌아가는 여로’였던 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 일행이 정상회담차 머물렀던 백화원을 숙소로 잡은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북측 김기남 조선노동당 중앙위 당비서는 7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훤칠한 키에 눈빛이 형형했다. 북측의 오랜 대남라인인 림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작은 키와 검은 뿔테 안경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갖고 있어 대비가 됐다. 그는 국민의 정부 시절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남북정상회담을 일궈냈던 임동원 세종재단 이사장과 오랜만에 해후하면서 “(정상회담 준비차) 처음 평양에 왔을 때도 비가 왔었죠?”라고 묻고는 “항상 비를 몰고 다니는군요”라고 말했다. 남북 대표들은 만날 때마다 비를 화제로 삼으면서 “올해 농사에 좋은 비”라고 입을 모았다. (기실 6.15공동행사 기간에 내린 폭우는 ‘나쁜 비’였다. 어렵사리 남측으로부터 지원받은 금싸라기 같은 비료 20만 톤을 모내기철 밑거름으로 뿌렸건만, 상당부분 폭우에 씻겨 가버렸기 때문이다. 농업 전문가들에 따르면 모내기 뒤 열흘 간 생육기간에는 10센티 정도만 물이 차 있는 상태에서 농약 기운을 벼가 흡수해야 하는 데 이때 비가 내리면 묽어져서 비료효과가 반감된다. 현실은 악수하는 정치인들과 동떨어져 늘 이리 냉정하다)

 

짐을 풀고 달려간 김일성경기장 입구에서는 북측 소학교, 중학교 여학생들이 무용복에 양말도 신지 않은 채 빗속에서 남북해외 민간대표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비옷을 입고 천리마 동상에서 개선문 옆 경기장까지 1킬로 정도 거리를 행진해온 대표단이 도착하면서 대회장은 달아올랐다.

정장관과 임동원 세종재단 이사,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등 당국 대표단의 원로들은 이때부터 각종 행사 참관시 주석단에 자리를 잡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민간잔치에 ‘객(客)’이 끼어 주인행사 한다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6.15공동선언 이후 지난 5년 간의 역사는 민과 관이 어우러져 써온 것. 공동행사에 어느 한쪽이 배제돼야 한다는 고집 자체가 부질없는 문제제기가 아닌가 싶다.

북측은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과 김영대 조선사회민주당 위원장 류미영 천도교 교무 등 중량급 인사들이 정장관 일행을 맞았다.

 

6.15공동선언 및 남북정상회담은 민간이 아닌 당국이 주도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후 6.15공동행사 또는 8.15공동행사가 민간주도로 이뤄진 데는 남측 당국의 조심성 때문이었다. 남측 당국은 정부가 참가할 경우 정당, 사회-종교단체 등과 한 묶음으로 분류됨으로써 남측 사회를 아우르려는 북측의 통일전선전술에 이용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참가하지 않았었다. 이번엔 상황이 달라졌다. 무엇보다 지난 5월 차관급 회담을 시작으로 10개월 동안 동결됐던 당국간 대화가 재개되고, 북핵 위기가 중요한 고비를 맞으면서 남측 당국은 6.15공동행사를 중요한 계기로 판단, 참관단을 보내게 됐다. 북측 최고지도부와 남북관계와 북핵위기라는 두가지 핵심의제를 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서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대는 마지막 날인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장관 및 6.15 정상회담의 주역을 대동강 초대소로 초청, 전격 회동을 가짐으로써 성사됐다.

 

북한 취재를 하면서 늘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원칙중 하나는 ‘균형감각’이다. 두개의 첨예하게 다른 체제, 반세기를 다른 토양에서 자란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치우칠 경우 최소한의 객관적 사실마저도 왜곡해서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반북-친미시위를 벌이는 사람들도,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 뿐 아니라 정신까지 말랑말랑해지는 정서적 친북도 경계 하고 싶다. 사실, 이 분야 취재를 하기 전에는 햇볕정책의 심정적 동조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햇볕정책을 지지하되 냉철한 관찰자이자 평가자이고자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적지 않은 의미를 남긴 6.15민족통일대축전이었지만 남북이 아직도 냉전시대의 징한 연대기를 끝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 소동도 있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연회장에서 부른 북측 영화 ‘이름 없는 꽃’의 주제곡 ‘기쁨의 노래 안고 함께 가리라’가 야기한 파장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14일 평양 만수대예술극장 연회장은 남북 내각 요인들이 대면식을 갖은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1990년대 초반 문화유적 답사차 한달여 동안 북측에 체류했던 유청장은 당시 안내를 맡았던 동료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떠올렸고, 북측 김수학 보건상의 청으로 부르게 됐다. “남모르는 들가에/남모르게 피는 꽃/ 그대는 아시는가/이름 없는 꽃”. 일부언론은 이 영화가 한국전쟁 말기 음지에서 일하는 북측 스파이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 착안, “북한 전쟁영웅을 찬양하는 노래”라는 레테르를 붙였다. 5~6개 중앙일간지가 사설로 비난했고 유청장은 17일 오전 “본의 아니게 물의를 일으켰다”면서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유청장 본인은 구성진 가락을 기억해 노래를 불렀고, 일부 언론은 영화의 배경에만 확대경을 들이댔다. 정장관-김위원장의 ‘깜짝 면담’으로 다행히 제2의 강정구 교수 사건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청장 파문’에서 볼 수 있듯이 남북이 만나는 접점에는, 여전히 ‘지뢰’가 매설돼 있다. 멜로디만을 좇아 노래를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비겁하게 판단을 미루는 양비론이 아니다. 두가지를 모두 끌어안기 위해서는 뜨거운 가슴만으로 안된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이라는 점이다. 어느 한쪽만 고집하면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은 그만큼 적어진다.

 

북측 동료에게 ‘여기는 평양, 비가 내린다’는 말이 자꾸 생각난다고 하자. “반복은 죽음”이라고 한마디 던졌다. 무릇 글을 쓰는 사람은 반복을 하면 안된다는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반복하겠어. 그러면 ‘여기는 평양, 또 비가 내린다’고 할까”라며 웃어 넘겼다. 농담에도 진실은 있다. 반복은 죽음이다! 또다시 지난 반세기간의 대립과 반목을 반복하면 우리 민족에는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역사의 수레바퀴를 역진시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낭만적 가슴’ 만으로 덤빈다면 1mm도 전진시키지 못한다. 같은 논리로 차가운 냉전논리만으로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정치적 목적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건성으로 돌리는 시늉만 한다면 그 역시 역사의 징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평양에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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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9. 01:57------------------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마음 속에 늘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곳이 어딜까?

고교 동창으로 시께나 끄적였던 한 친구는 '금강'이라는 습작시를 보여주며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그 금강을 보았다. 2박3일 일정. 하지만 외금강 아랫마을 온정리(따뜻한 온천마을)를 다녀왔다는 게 정확한 말일듯 싶다. 고작 5~6시간 동안 산행을 했지만, 수십개 금강산 자락의 한귀퉁이를 밟고 왔으니까. 훗날 금강산에 갈 친구들을 위해 참고삼아 말하면 2박3일 코스에서 산행은 단 하루다. 이중 기암괴석과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는 망양대가 있는 만물상 코스 또는 폭포가 장관이라는 구룡연의 두개 뿐이다. 만물상+천선대 코스를 택했는데 그나마 날씨가 흐려서 조망권을 박탈당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많은 생각을 갖게 됐다. 북녘 남자 안내원들의 정치색 짙은 천편일률적인 대남비방 발언과 하나같이 곱고 아리따운 북녘 여자 안내원들의 눈웃음. 관광객 전용도로(현대아산이 건설했단다)와 구분해 놓은 주민전용 도로. 관광객 도로 양쪽에는 철조망이 설치돼 주민과 접촉을 막았다. 온정리의 현대식 온천사우나와 평양 모란봉 교예단( acrobat)의 공연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난생 처음 본 교예는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누선을 자극할만큼 감격적이었다. 높은 사다리에 올라간 교예단원이 느닷없이  '조국은 하나다'라고 쓰인 펼침막을 내리펼치는 순간에 가장 선전효과가 높았다. 의도된 기획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관람객들은 찔끔찔끔 눈물(여기에도 정서적 함정과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을 짜내며, 공연이 끝나자마자 실황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했다. 정치색을 배제한다면 교예 자체는 볼만했다. 아마 남북한을 통틀어 공연예술분야에서 세계를 제패한 것은 북한 교예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금강산관광은 이제 3박4일코스도 생겼다. 현대 아산이 영업권을 부여받은 장전항 관광특구지역에는 조만간 세계최고의 골프장(9홀은 병풍처럼 둘러선 금강산의 장관을 보면서, 9홀은 seaside의 수려한 풍광을 보면서 즐길 수 있다고 한다)이 들어설 예정이고, 곱디고운 백사장의 금강산 해수욕장은 이미 개장했다. 현재 가격 50만원대+현지식사, 온천, 교예관람등 요금 100여달러면 누구나 갈 수 있다. 아마 현대드림투어가 전문여행사인듯 싶다.


2002.07.20. 15:54-------------------

"앗, 선생님 어디서 많이 뵌 얼굴입니다?!"

그들은 이런 말을 건네며 불쑥 목걸이 형식으로 달고다니던 '금강산 관광증'을 들춰 읽었다. (관광증엔 내 사진과 생년월일, 직업, 주소지가 적혀 있었고, 여행이 끝나고 장전항에서 출국수속을 밟을때 조금이라도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반납해야 하는 쯩이다. 훼손됐을 경우엔 20달러가 얼만가 하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

30전후의 남자+20대초반의 여자의 1조 이거나 남자 2명1조로 움직이는 북측 안내원들은 만물상 6시간 코스와 해금강 산책 코스에 4~5개조가 있었다. 신분을 확인한 한 남자 안내원은 댓바람에 "기자는 시대의 조산원"이라고 추켜올리더니 "하지만 잘못하면 시대의 쓰레기장!(이게 제대로된 댓구가 되려면, '시대의 화장터'가 돼야되지 않는가)"이라고 깎아내렸다. 남측 언론의 문제점을 집중부각하곤 "통일사업에 도움이 되는 글을 써야 하지 않겠습네까"라고 은근히 가르침을 주었다. 서른 안팎의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상대를 제압하기 좋은 지식으로 무장돼 있었다. 경수로 건설일정(월,일까지) 및 최근 파주에서 발생한 여중생 압살사건 등을 언급했다. "제 나라에서 그런일을 당했으면서 왜 꼼짝 못합니까"에서 시작해서 "남조선은 지나치게 외세의존적"이라고 단정해버리면 그만 할 말을 잊게 되곤 했다. 말로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측에서는 가급적 정치적 화제를 담지말라는 주의와 함께 잘못하면 어떤 해악질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대꾸하는 것을 아예 포기해버렸다. 다만, '사회주의 형제국'인 쿠바와 베트남, 중국, 구 유고슬라비아 등 내가 가보았던 나라들의 나라이름만 꺼내는 것만으로 효과는 있었다. 올가미 안의 먹이를 보듯 총총 빛나던 그들의 눈이 갑자기 멍해진다. 또 한가지, "교류 하자는데 왜 조선기자동맹에서는 오지 않았습네까?"라고 하니 그만 "안내원이나 하고 있는 제가 어떻게 알겠습네까"라고 꼬리를 내렸다. 

현대아산 관계자에 따르면 안내원들은 전원 온정리를 비롯한 산아랫마을에서 당성이 좋고, 똑똑한 사람을 뽑은 것이라고 한다. 내가 화가 난 것은 그들의 말이 터무니 없어서가 아니다. 체제경쟁의 끝에서 유일하게 이니셔티브를 잡고 있는 '주체성'을 강조하는 심리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파주 여중생 사건 만해도 할말이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화법에서 남의 약점만 바늘로 콕콕 찌르는 못된 심성, 정확히는 그들에게 교육을 시킨 북측 엘리트 집단의 의도에 화가 났을 뿐이다. 그정도라면 전라, 경상, 충청도로 나뉘어 물구 뜯구 하는 '이남것들' 보다 나을게 무어란 말인가.

한두번 이야기를 나눠보곤, 그들을 이해시킬 필요도 없고, 깊은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장가는 갔읍네까" "고저, 고 피부관리는 어떻게 합네까(여자 안내원에게)"라는 질문을 툭 던지고, 문화어(북한의 표준어로 평양말씨. 이것도 이상했다. 분명 어눌한 말투의 강원도 또는 함경도 억양이 들려야 하는데...)로 답하는 그들의 억양을 즐겼다. 그리곤 슬쩍 시선을 산하로 돌려버리곤 했다....

사실 분노는 어젯밤부터 쌓여 있던 것이었다. 도착 첫날밤 세미나장의 우울한 기억이 살아났다....

2002.07.25. 22:15-----------------

사실, 3편이 가장 쓰기 망설여졌다. 너무 직업냄새를 풍기는데다, 종이업계 내부에서나 화제가 될 사안이 아닌가 해서. 어쨋든 시리즈 숫자를 매기다 보니 마감을 해보겠다.

선상호텔 2층 세미나실에 마련된 세미나룸은 아담했다. 배 안이다보니 면적인 좁았지만 그렇기에 더 가깝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참가인원은 30명쯤. 행정요원들을 빼면 25명 정도.

거창하게 말하면 '남북기자교류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사실은 약간 썰렁한 자리였다. 분명 우리끼리 하는 결의이면서 동시에 언젠가 한반도 북쪽 동업자들도 공람하게 될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북측은 지난 6월 인편으로 세미나 개최사실을 알리고, 간접적으로 참여를 유도했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문제는 서해교전이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결의문 머릿말에 "서해교전으로 숨진 우리 장병들의 희생을 애도하며..."로 되는 구절이 문제였다. 상반된 입장을 정리하면 두가지.

-"아직 교전의 진상은 물론, 북측 사상자의 유무 또는 규모도 밝혀지지 상황에서 우리측 희생자만 위로하면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나. 교류하자면서 우리측 입장 만 강하게 내비치면 저쪽이 어떻게 수용할 수 있겠는가" 1개방송과 2개중앙지, 서너개 지방지 기자들이 동의했다.

-"(북쪽의 계획적인 도발이라는 전제하에)아무리 교류를 하더라도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하지 않은가. 명백하게 우리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으니 이를 먼저 추도해야하지 않은가. 또 조중동이 안보상업주의를 자행하고 있다는데 다양한 의견이 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결론은 그 구절을 들어내자는 것으로 났다. 이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하게 비칠수도 있겠지만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고 판을 깨지는 말자는 합의에 도달하기 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진지했다. 이로써 까치발로라도 한발자국을 내디딘 것이 아니냐는 자위도 있었다. 10여년간 대북 협상을 담당해본 발제자가 "과거 남북관계가 깨진 것은 대부분 잣구에 서로 매달리다가 결국 판 자체를 깼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도 주효했다. 밤새 협상하면서, 잣구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결국 돌아섰던 것이 지난 수십년간 몇차례 있었던 남북관계의 요체라고 한다. 인간관계가 간혹 사소한 말싸움에서 시작돼 결국 인간 자체를 증오하게 되는 것과 같은 구조라고나 할까. 물론, 2시간여에 걸친 치열한 토론이 끝나고 나오는 모두의 마음이 개운치는 않았다. 우리 내부에서도 의견통일을 못하는데, 어찌 저쪽과 대화를 나눌수 있을까 하는 찜찜함. 시원한 생맥주 한잔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산행을 걱정하면서...

토론과정에서 나의 포지션은 노 코멘트다. 한가지, DJ의 햇볕정책이 남긴 가장 큰 결실중의 하나는 남도, 북도 이제는 서로 의견이 달라도 결코 대화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란다. 밤새 싸우고, 또 다른 밤을 새워도, 결국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 정신. 새로운 화해와 협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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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은 오전 11시~12시사이 속초항출발-4시간 30분 뒤 북한 장전항 도착-부두앞 해상호텔 해금강 투숙-온정리 온천<1일>

호텔-산행-하산 및 온정리 점심-교예공연(오후 4시부터 1시간 30분정도, 이시간은 꿈결처럼 금방간다)-온정리 온천<2일>

호텔-해금강(관동팔경 중 하나인 삼일포등) 육로산책-온정각 점심-출국-저녁 7시30분쯤 속초 도착<3일>

**주의:소수의 훈련된 안내원들 외에는 현지 주민+현지 음식과 어떠한 접촉도 허용되지 않는 박제된 여행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동행한 동료 한사람은 버스를 타고 스쳐 지나가는 주민풍경을 보면서 용인 자연농원의 사파리 코스가 생각난다고 했다.


P.S.1 약간 시니컬하게 썼지만, 비록 한귀퉁이라도 금강은 여전히 설렘이다. 발목만 슬쩍 훔쳐본 기분이었지만, 언젠가 치마폭에 안겨 이곳 저곳을 둘러볼 날을 기다리게 한다. 금강을 봤지만, 금강은 아직 우리 곁에 없었다.

지난날 금강산 유람기에서 본대로, 육로로 철원인가, 인젠가 어디서 출발해서 내금강에 도착한뒤 길게쉬는 절(장안사)에서 두다리 쭉뻗고 쉰 다음에 차분히 치마폭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몸도 마음도 서서히 선경에 젖어들다가, 마침내 동해와 만나는 그 장엄한 과정을 언젠가 경험해볼날을 기다리며...
(장안사는 육이오때 소실됐다지만, 자연친화적인 아늑한 휴게소 한채 새로지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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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경향신문 기자의 백두산 답사기


 2003년에 다녀온 백두산 방문기를 2년 뒤에 다시 쓴 까닭은 그만큼 북한 쪽에서 백두산을 두루 둘러본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현정은회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백두산 관광에 합의함에 따라 백두산관광의 현주소와 개발 가능성을 짚어본 글이다. 

백두산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기자가 북한 쪽에서 백두산 지역을 답사할 기회를 얻은 것은 2003년 9월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과 북측 사회과학자 협회가 공동 주최한 남북학술회의 취재차 백두산 지역에 4박5일간 머무르면서 삼지연과 천지, 보천보, 대홍단군 등 주요 관광명소와 사적지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다.

백두산 일대의 주요 관광자원으로는 천혜의 비경을 자랑하는 천지와 승용차로 몇시간을 달려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울창한 원시림, 천지 아래의 광활한 화산암 지대와 사구의 이국적 풍경, 밀영을 비롯한 독립군 유적지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기에 찻집이나, 호프집, 노래방 등 외국인 및 남측 관광객들이 필요로 하는 위락시설만 갖춘다면 백두산은 국제규모의 관광단지로 거듭날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일행은 인천공항에서 중국 선양(瀋陽)을 거쳐 북한 땅을 밟았다. 하루가 온전히 걸리는 길이었다. 평양 순안공항에서 곧바로 프로펠러 소형 비행기로 갈아타고 삼지연을 향했다. 순안공항에서 비행기에 오른 뒤 한시간이 채 되지 않아 량강도 삼지연 공항에 도착했다. 북측이 군사용 비행장으로 건설한 삼지연 공항 활주로는 콘크리트였다. 드문드문 패어 보수공사가 시급해 보였지만 소형·중형 항공기가 이·착륙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최소 4~5㎞의 직선적인 길 인상적

삼지연 공항에서 삼지연읍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이었지만 길 양편에 70~80m 높이의 침엽수들이 늘어서 운치가 있었다. 40여분 소요됐는데 아스팔트 포장을 할 경우 30분 안쪽으로 운행이 가능해보였다. 하지만 주변 풍경을 찬찬히 살피기에는 비포장 그대로가 나을 듯했다. 이깔나무, 문비나무, 가문비나무, 접지나무가 도열한 길은 시원하게 뻗어 있었다. 한번 길이 뻗으면 최소 4~5㎞는 직선으로 연결된 것이 백두산 지역 도로의 특징이다.

북한의 변화는 백두산 관광의 거점인 삼지연읍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삼지연읍의 베개봉호텔은 2002년 말에 시작한 증축·보수공사가 한창이었다. 3층 건물이던 1호동(객실 48개)의 보수공사와 2호동(4층·객실 80개)의 신축공사가 막바지 단계였다. 완공 뒤 최대 투숙객은 245명.

삼지연읍에서 16㎞ 떨어진 ‘리명수 노동자구’에는 수십채의 주택 겸 숙박용 건물이 들어서 있다. 여기는 천지에서 직선거리 70리를 지하로 흘러와 아담한 폭포를 이룬 리명수 폭포로 유명하다.

온도는 사철 내내 4℃이며 초당 0.8㎥의 수량을 유지한다는 게 당시 북측 안내인 강화숙씨(37)의 설명이었다.


2~3층인 이 건물들은 현지 주민들의 거처로 쓰다가 ‘유사시’ 관광객들의 민박 장소로도 쓴다는 게 북측 관계자들의 전언이었다. 민박을 할 수 있게 취사도구와 이부자리 등이 완비돼 있다는 얘기다. 이 건물들은 “외국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수준으로 지어야 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우선 1단계로 2000년 11월부터 삼지연읍 일대에 3000채를 지었으며, 앞으로 더 많이 지을 계획이라는 설명이었다. 삼지연군 외곽에는 전국에서 몰려들어 각종 건축사업을 벌이고 있는 ‘돌격대’들이 야영을 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삼지연에는 300명이 묵을 수 있는 ‘제1여관’과 내무반식 숙박시설 100동이 마련돼 외국관광객들이 몰려와도 숙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북측인사들은 홍보했다. 1동에 평균 200명이 묵을 수 있다고 하니 이 시설 하나만 해도 한꺼번에 2만명의 답사객을 소화할 수 있는 셈이다.

북측 답사객들을 위한 숙소로는 근로자각, 대학생각, 소년단각 등 3동의 건물이 함께 건설돼 있다. 지금도 사용하는 시설이어서인지 내부 상태도 깔끔했다. 한방에 6~8개의 침대가 놓인 백두밀영 인근의 숙소는 대학생각(300명), 근로자각(300명), 소년단각(250명) 등 8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북측으로선 ‘민족적 성지’ 답사객 숙소지만 정치색을 걷어내고 보면 울창한 원시림에 건설된 웰빙 숙소라고 해도 무방할 듯했다.

난방문제만 해결된다면 당장 남측의 대규모 관광객이 몰려와도 너끈하게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북한 전역에서 몰려드는 답사객은 주로 삼지연에서 70㎞ 떨어진 혜산까지 열차로 와서 육로로 이동한다.



베개봉 앞에는 러시아형 펜션 즐비


삼지연군에는 백두산 지역 전체의 자연환경과 사적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백두관이 있어 백두산 일대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두었다. 북측 답사객들은 본격 행보에 나서기 전에 백두관에 들러 전체를 조망하고 설명을 듣는다. 백두관에서 나오면 해발 1621m의 베개봉으로 가는 길이 뻗어 있다. 베개봉에는 북측 최고지도부의 지시로 국제경기를 치를 수 있는 규격의 스키장을 만들었다. 산세가 베개를 닮았다는 베개봉 앞에는 러시아형 펜션이 즐비해 과연 이곳이 북한인지 잠시 착각을 하게 된다.

베개봉 앞에는 스키장 외에도 빙상, 하키 등 동계스포츠 시설이 늘어선 체육촌이 짜임새 있게 들어서 있다. 북측은 실제로 1995년 동계 아시안 게임을 삼지연에 유치하려다가 반납한 적이 있다.

베개봉 호텔에서 천지까지는 30㎞ 정도. 천지로 가는 길에 북측 관계자들은 일행을 ‘정일봉’으로 안내했다. 소백수골에 솟아 있는 해발 1797m의 봉우리 정상에는 100t 무게의 화강암에 붉은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써 놓았다. 이 부근은 김정일 위원장이 태어났다고 북측이 주장하는 고향집과 밀영, 사령부 귀틀집 등이 보관돼 있다. 북한 당국이 문화재처럼 보호하고 있는 ‘구호목’도 볼 수 있다.

1930년대 후반기 백두산 일대에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벌인 항일 빨치산 대원들이 나무에 써놓았다는 글들이다.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으로 써놓은 글은 대부분 유실됐는데 북측은 이를 화학적인 방법으로 발굴, 복원한 뒤 육각형 또는 원형 유리기둥 안에 보관하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색채가 입혀진 정치구호가 주류를 이루지만 풍찬노숙하던 독립군들의 활약상에는 남이건 북이건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천만 인민을 불러 일으켜, 우리 힘으로 나라를 독립해야 한다’ ‘내 고향 떠나올 때, 옷자락에 매달리며 꼭 왜놈치고 돌아오라던, 귀여운 누이동생 부탁 잊지 말자’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변하고 있는 것은 백두산 일대 풍경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변하고 있었다. 변화의 신호는 베개봉 호텔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에게서도 감지됐다. 이 호텔 1층 기념품점에서 5년째 판매원으로 일한다는 여성(27)은 월급 2500원에 판매목표 초과달성시 성과급을 합하면 4000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평균 월급 2000원의 갑절이었다. 한 여성 복무원은 식사 때는 식당 의례원으로 일하다가 밤이 되면 호텔 2층의 매대(간이 판매소)에서 주류를 파는 투잡스를 실현하고 있었다.

2002년 도입한 ‘7·1 경제관리 개선조치’가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백두산 일대에서도 시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삼지연을 중심으로 각각 70㎞ 거리에 위치한 보천보와 무산지구 전투탑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활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적지다. 곤장덕 산마루와 가림천 사이에 위치한 보천보는 일본경찰의 주재소와 우체국 등은 물론 당시 총탄자국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천지에서 잡아올린 산천어 회 별미

비포장 도로가 제법 험해서 적지 않은 불편이 따랐다. 보천보 가는 길에 일행이 탄 마이크로 버스 타이어가 펑크나 교체하는 데 한참을 소요하기도 했다. 일반 관광객이 방문하기에는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다.

천지변에서 즐긴 호사스러운 점심식사 이야기를 끝으로 백두산 답사의 추억을 닫았으면 한다. 이날 점심은 극진한 북한식 손님접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일행이 장군봉(병사봉) 답사에 이어 삭도(케이블카)를 타고 천지변에 내리니 넓은 자갈밭에 자리가 펼쳐져 있었다. 일행이 묵고 있던 베개봉 호텔 직원들이 일찌감치 나와서 음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조그만한 떡메를 갖고와 답사객들이 직접 치게 하는 시간이었다. 자리마다 백두산 들쭉술과 백로술 등 고급술이 놓여 있었다.



평양에서 파견된 백산탐험대 대원들이 천지에서 잡아올린 산천어 회와 어죽이 별미였다. 당초 어류가 살지 않던 천지에는 1984년 6월14일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어미 산천어 100마리를 방류한 결과 현재 4만마리가 번성하고 있다는 게 백산 탐험대 대원들의 설명이었다. 여기에 조그만 풍로에 구운 고기와 술을 즐겼다. 마지막으로는 백산 탐험대 소유의 고무보트에 삼삼오오 올라 천지를 한바퀴 도는 것으로 3시간여 지속된 ‘호사스러운’ 점심행사를 마쳤다. 저 너머로 보이는 중국측 천지는 어딘가 부족함이 많아 보였다. 천지만을 놓고 볼 때 북한측에서 보는 풍경이 백화점이라면 중국측에서 보는 것은 구멍가게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천지를 보는 각도와 천지변 자갈밭의 넓이, 주변 산세 역시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정치부 김진호 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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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내로 남측 주민과 해외동포 등 2,000여명이 서해 직항로를 통해 평양과 묘향산, 백두산 등을 관광할 수 있게 됐다. 통일부는 25일 평양 관광을 추진해온 (주)평화항공여행사가 신청한 남부경제협력사업자 및 협력사업 신청에 대해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승인했다고 밝혔다.

평화항공측은 연내로 남측 주민과 해외동포 관광객이 서울~평양간 직항로를 이용해 평양과 남포, 묘향산, 정주, 백두산(선택사양) 등지를 여행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관광계약서’를 지난 7월14일 북측 금강산관광총회사와 체결했다.

평화항공에 따르면 남북의 항공기가 교대로 서울과 평양간 직항로를 통해 관광객을 수송하게 된다. 관광요금은 4박5일에 1인당 2백20만원, 5박6일에 2백90만원으로 책정됐다. 1차 관광단은 100명 규모로 9월15일 출발할 예정이며, 오는 12월까지 2,000여명의 남측 및 해외동포 관광객을 모집할 계획이다.

통일부 관계자는 “금강산에 이어 평양과 묘향산 등지로 관광범위를 확대케 돼 남북교류 활성화에 기여하는 측면을 감안해 사업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평화항공측은 “이미 북한당국과 신변안전과 무사귀환 보장각서를 체결한 상태여서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면서 “1차 방북 인원이 이미 100명을 넘어섰다”고 전했다.

관광신청은 평화항공(전화 02-6383-4302∼3)에서 받고 있으며, 북측은 이 여행사가 통보한 관광객 명단으로 입국사증(비자)을 갈음할 방침이다. 평화항공은 (주)평화자동차가 관광사업 추진을 위해 지난 4월 설립한 업체다.

〈김진호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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