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국민이여, 지난 3년 반 동안 우리는 하나의 국가로 위대한 진보를 이룩했다. (…) 당신들의 대통령으로 일할 수 있었던 건 내 인생 최고의 영광이었다. 재선 추구할 생각이었지만, 내가 물러나 남은 임기 동안 대통령의 의무를 완수하는 게 당과 국가에 최선의 이해라고 믿는다. (…) 우리가 함께할 때 미국은 할 수 없는 게 없다고 늘 믿어왔다. 우리는 우리가 미합중국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이든의 적'은 바이든
바이든 미 대통령이 21일 대국민 편지를 발표하고 대선 레이스에서 전격 사퇴했다. 민주당 전당대회 D-29에 이뤄진 전례 없는 후보 사퇴였다. 바이든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공식 지지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대선후보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우리는 함께 싸우고, 함께 승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의 전반적인 우세 속에 진행돼 온 미국 대선은 격랑에 휩싸이게 됐다.
'바이든의 적'은 바이든이었다. 81세 노구를 이끌고 끝까지 승리를 장담하던 그를 쓰러뜨린 건 트럼프도, 코로나19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인지력과 건강을 무한 신뢰했지만, 그 믿음은 트럼프와의 첫 대선후보 토론회 이후 갈수록 고립됐다. 코로나19 확진 탓에 격리된 뒤에는 건강 문제에 대한 우려가 더 확산됐다. 이미 취임 1년에 즈음하고부터 사퇴론이 불거졌었다. 지난해 4월 25일 재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나이는 숫자가 아니다"라면서 "지금까지 출마했던 누구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명예롭고 유능하다는 점을 증명하겠다"고 결의를 내보였다. 2020 대선 때만 해도 "신세대 민주당원들에게 다리가 되겠다"라면서 '중간계투'를 다짐하며 "트럼프주의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몸은 신념을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그의 신념을 지지하되, 몸은 믿지 않았다. 직무수행에 문제가 없다는 주치의 소견서와 바이든의 인지능력을 "기억력이 좋지 않은 정도"로 평가한 지난 2월 특검보고서도 소용이 없었다. 말을 더듬고 초점 없는 눈을 보인 지난 6월 27일 트럼프와의 첫 TV 토론은 재앙이었다.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등 우군마저 등을 돌렸다. 리얼클리어 폴리틱스의 여론조사 집계에서 바이든의 대선후보 선호도는 평균 -17%를 기록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코로나19 확진은 결단의 시간을 앞당긴 걸로 보인다. 백악관 관계자는 CNN에 "대통령의 사퇴는 건강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해 바이든에 예를 보였다.
혼돈의 미 대선
바이든의 해리스 선택에도 불구하고, 대선후보를 정하는 건 민주당 전국위원회이다. 바이든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겠지만, 절차가 있다. 당 규약과 주·연방 선거법 8월 19~22일, 시카고 전당대회(DNC)를 앞두고 지난 6월 중순 50개 주에서 예비선거가 종결됐다. 따라서 후보 궐위 상황에서 DNC에서 새로 결정, 지명해야 한다. 민주당 지도부가 바이든 사퇴 발표 뒤 긴급회의를 열어 숙의에 들어갔다. 관심은 해리스의 본선 경쟁력이다. TV 토론 뒤 각종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해리스 대 트럼프' 여론조사는 해리스가 대선에서 바이든과 비슷하거나 더 못한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
바이든 사퇴론이 거셌던 지난주 CBS 뉴스/유고브 조사에서 해리스는 트럼프에 3%포인트(48 대 51%) 뒤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바이든(47 대 52%)보다 2%포인트 그나마 나은 수준. 18일 발표된 이코노미스트/유고브 조사에선 바이든(41 대 43%)이 해리스(39 대 44%)를 앞섰지만, 트럼프에 뒤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트럼프 피격 뒤 로이터/입소스 조사에선 바이든과 해리스가 동률을 이뤘다. 지난 2일 발표된 로이터/입소스 조사에서 유일하게 '바이든 대 트럼프'가 같은 지지율을 보였지만, 해리스는 되레 트럼프에 1%포인트 뒤졌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유력한 해리스에 대해 기대가 크지 않은 이유다. 트럼프 선거 캠프는 이미 해리스에 대한 저급한 공격을 시작했다.
해리스가 교외(suburban) 여성들의 지지를 받을 건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여성은 유색인종(무슬림, 히스패닉 등)과 마찬가지로 혐오와 구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그러나 여성 혐오주의를 노골적으로 내보이면서도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트럼프를 꺾었다. 미국은 아직 여성 대통령을 맞을 준비가 안 됐음을 입증한 선거였다. 바이든에 대한 동정론과 전당대회 컨벤션 효과가 어우러져 민주당 대선후보의 승률이 높아질 가능성은 있다. 바이든에서 해리스로 주자가 바뀌더라도 민주당의 승세가 확 달라지기는 힘든 게 현실이다. 민주당에는 주지사와 상원의원 등 당장 대선주자로 나서도 손색이 없을 후보군도 두텁다. 그러나 바이든의 뒤늦은 사퇴는 민주당 잠재 후보들이 유권자들에게 다가갈 기회를 빼앗았다. 선택지를 해리스로 제한한 꼴이다.
바이든이 남긴 세계, 한반도
바이든은 미국민에게 위대한 대통령이었다. 그가 편지 앞부분에서 강조했듯이 재임 중 미국을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경제로 만들었고, '더 나은 재건'에 기록적인 예산을 투입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외국 기업의 공장을 유치, 미국 중산층에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했다. 특히 반도체 산업을 한국에서 회수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내세운 치적이었다. 그러나 성과는 코로나19 이후의 높은 인플레율로 상쇄됐다. 미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바이든이 실패했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 더 문제는 그가 남긴 세계이다.
바이든은 편지에서 "(미국민과) 함께, 우리는 한 세기에 한 번 올 팬데믹과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극복했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보존했다. 전 세계 동맹국들에 활기를 불어넣고 강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바이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사실상 방관했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민간인 학살을 방조했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2027년 중국의 대만 침공을 기정사실로 하며 전쟁 분위기를 조성, 전쟁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바이든 임기 내내 유럽(우크라이나)과 동아시아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한 외교적 노력도 없이 군사주의로 일관했다. 역대 최대 규모, 최장기간의 훈련이 곳곳에서 이어져 왔다. 러시아와 북한, 중국과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어떠한 대화 노력도 없었다. 그럼에도 운이 좋았다. 일본의 역사적 범죄와 국민적 정서를 깡그리 무시한 윤석열 대통령 덕에 한미일 군사협력 구도를 만들었고, 이를 주요 치적으로 강조했다. 미국은 트럼프와 바이든 계승을 다짐하는 해리스 간의 갈림길에 섰고, 한반도는 2025년 '바이든 2' 또는 '트럼프 2.0' 행정부 중 하나를 대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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