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은 2017년 3월 24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를 불과 1달 정도 남긴 시점에 그가 푸틴 대통령과 악수하는 장면을 내보인 건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터. 국민전선(현 국민연합) 대선후보였던 그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뒤 유럽연합(EU)이 가한 '멍청한' 제재의 해제를 촉구하고, 푸틴의 리더십에 경의를 감추지 않았다. 특히 이슬람 과격 세력의 테러에 대한 푸틴의 단호한 태도에 열렬한 지지를 표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후에도 침공 자체를 비난하면서도 우크라 지원과 러시아 동결자산 사용을 반대하는 등 친러시아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과 푸틴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두 줄 타기를 하는 셈이다.
반이민, 반무슬림, 민족주의는 유럽 우파 포퓰리즘의 공통점이다. 유럽 통합 및 세계화, 자유무역에 대한 반대 입장 역시 공유한다. 정확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세계관과 겹친다. '푸틴의 러시아'에 대한 호감도 공유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과 우방 지도자들에게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유독 푸틴 앞에서는 자세를 낮추는 경향이 있다. 2017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푸틴과 처음 만난 트럼프는 다소곳한 모습을 보였다. 많은 유로 포퓰리스트들이 반미 성향인 점을 감안하면 희한하다. 아메리카 퍼스트에 최우선 순위를 두는 트럼프와 미국과 거리를 두는 유로 포퓰리스트들이 함께 푸틴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얼핏 이해되지 않는 현상은 정치적으로 설명이 쉽지 않다. 문화, 종교적 코드로 읽어야 한다.
우파 포퓰리즘은 예외 없이 '정체성의 정치'를 지향한다. 유럽과 미국 포퓰리스트들은 그 정체성의 중심에 기독교적 가치를 놓고 있다. 르펜이 기독교 국가 프랑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트럼프 역시 기독교 국가, 미국을 지향한다. 지난 1월 20일 취임과 동시에 "미국에는 여성과 남성, 두 개의 젠더만 존재한다"라면서 행정명령까지 선포한 트럼프다. 취임 선서에 어머니의 성경과 함께 에이브러햄 링컨의 성경을 함께 사용했다. 이들이 꿈꾸는 나라는 무슬림을 배제하고 가부장적 가족제도를 수호하는 나라다. 정교회 국가인 러시아는 이 점에서 대서양 양안의 우파 포퓰리즘이 추구하는 가치의 모범사례인 셈.
프랑스 국민연합(RN) 뿐이 아니다. 독일의 독일대안당(AfD)과 헝가리의 피데스(Fidesz)는 우크라전 이후에도 푸틴의 입장에 공감을 표한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를 비난하고, 우크라에 대한 지원에 반대한다. 이러한 현상을 문화적으로 분석한 이는 프랑스의 인구통계학자이자 역사인류학자인 에마뉘엘 토드다.
토드는 2023년 말 펴낸 <서구의 패배(La Défaite de L'Occident)>에서 미국과 유럽의 성소수자(LGBTQ) 혁명을 바라보는 우파 포퓰리즘의 위기의식을 이유로 들었다. 탈세계화와 탈민주주의 경향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가 사회, 문화적 변화였다는 설명이다. 21세기 들어 서구문명의 영향권에 속한 거의 모든 나라가 동성애자 결혼과 성전환을 인정했다. 가족은 그에게 중요한 분석 대상. 기독교적 가치의 종말과 함께 가부장제 사회가 부모의 권위가 양립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우파 포퓰리즘이 기독교 문명의 위기로 보는 사안이다.
2000년 권좌에 오른 푸틴은 처음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하는 '비전통적 성관계 홍보'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뒤 2002년 말 성인에게까지 확대했다. 연방하원(두마)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법은 미디어, 문학, 공공 담론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긍정적 또는 중립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푸틴은 이러한 정책이 전통적인 가족 가치와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서구의 과도한 자유주의와 대비하고 있다. 토드는 이란과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등 이슬람 국가와 국민이 러시아에 호감이 가게 된 계기의 하나로 전통적인 가부장제를 꼽고 있다. 서구의 젠더 의식 변화에 반발하는 이슬람권에 푸틴의 반 LGBTQ 노선은 문화적 동질감을 주고 있다면서 "도덕 문제가 사상 처음으로 국제관계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다"고 짚었다.
젠더 문제로 세계의 변화를 포착한 토드의 설명이 새삼 떠오른 계기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취임 이후 대러시아 태세 전환을 보는 러시아의 해석을 접하고 나서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미국 블로거 저널리스트들과의 인터뷰에 담겨 있다.
라브로프 장관은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왜 180도 바뀌었다고 보는가'는 질문을 받고 댓바람에 "미국이 정상(normalcy)으로 돌아왔다고 본다"라고 답했다. 그가 말한 '정상'은 전통적인 기독교적를 의미한다. 민주당 지도부가 LGBTQ를 한계 없이 옹호한 탓에 크리스찬 가치로부터 떨어졌기 때문에 전통적인 민주-공화당의 양당 구조가 분열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엉뚱하게 화장실 표기를 예로 들었다.
언젠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장관 회의 참석차 방문한 스웨덴에서 남자 화장실을 찾지 못해 당황했던 경험을 전하면서, 미국에서도 남․여 사인이 없는 화장실이 등장할 참이었다는 것. 그는 "미국 사회 분열의 작은 부분일 수 있지만, 산업 황폐화 지역(Rust Belt)의 많은 유권자는 이러한(젠더 혁명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데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래서 트럼프를 찍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라브로프는 미국 정치의 심각한 분열을 세금와 낙태 문제와 함께 정상적인 기독교 가치를 둘러싼 민주-공화당의 갈등으로 해석했다. 서로 다투더라도 정치는 기독교적 가치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 새삼 "우리는 정교회 크리스찬들이다"라면서 "우리가 이해하는바, '정상'으로 미국이 돌아왔다"고 거듭 강조했다.
트럼프 귀환 이후 세계가 바뀌고 있다. 변화의 흐름은 단선이 아니다. 우크라전 종식과 미·러 관계 정상화라는 지극히 정치, 안보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저변에 서구 시민사회가 힘겹게 확대해 온 젠더 혁명을 되돌리려는 거대한 '반동'이 똬리를 틀고 있다. '집단 서방'의 일원인 대한민국도 무관하지 않다. 민주주의의 전제는 다양성의 존중이다. 아스팔트 극우 집회를 주도하는 목사들을 보면서, 또 정치집회에 소극적이더라도 LGBTQ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보수 기독교를 보면서 새삼 환기하는 게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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