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Pandemic).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COVID-19)를 지구적 대유행을 뜻하는 팬데믹으로 선언하건 안 하건 중요치 않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까지 번져 이미 지구촌 차원의 재앙이 됐다. 각국 전문가들은 그럼에도 아직 ‘최악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2월 26일자 WHO 상황보고서 37호에 따르면 지난해 12월8일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첫번째 확진환자가 발생한 이후 이날까지 8만1109명의 감염환자가 확인돼 2761명이 사망했다.
이날자 상황보고서는 하루 동안 중국 밖에서 확진자가 459명 늘어 중국 내 확진자(412명) 수를 처음 넘어선 점을 특이사항으로 꼽았다. 바이러스 방역 대상이 ‘숙주 국가’ 중국에서 세계 각국으로 바뀌는 변곡점이 된 날인 것이다.
26일은 주요 2개국(G2) 지도자들이 시차를 두고 각각 코로나19에 대한 입장을 내놓은 날이기도 하다. 바이러스 발원국인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여유를 보였고, 일관되게 사태를 낙관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처음으로 방역 대책에 국가적 역량을 쏟아부을 것을 선언했다. 시 주석은 이날 중국 최고지도부 회의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현재 전국의 코로나19 방역 상황이 호전되고 있고, 경제 사회 발전도 회복에 속도를 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모든 국민이 편안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리는 샤오캉(小康) 사회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애써 평상을 유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미국민에 대한 코로나19의 위험은 여전히 매우 낮은 수준”이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총괄 책임자로 지명하며 총력 대응 선언을 했다. 미국은 그나마 이달 초부터 자국민의 중국 여행 및 중국 체류 외국인의 입국을 모두 금지했기에 대응시간을 벌 수 있었다. 바이러스의 전파를 막는 것은 바람을 막는 것처럼 가능하지 않다. 다만 전파를 지연시키는 데는 초기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 본격적인 방역전쟁에 앞서 대응 시스템을 완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발 팬데믹이 입증한 것은 권위주의 국가의 스트롱맨들일수록 초기 대응이 단호했다는 점이다. 각국의 대응에는 중국 영향력과 자국민의 안전 사이에서 중간지점을 찾으려는 고민이 엿보인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자타가 공인하는 ‘필리핀의 트럼프’이다. 하지만 통치스타일이 트럼프와 닮았을 뿐 외교적으로는 중국에 밀착해왔다. 미국의 군사동맹국이면서도 2016년 취임 이후 ‘차이나 머니’의 실익을 좇았다.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필리핀 보건의료계가 중국 본토 방문객들의 입국을 제한해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지난달 말까지 묵살했던 이유다. 프란시스코 두케 보건장관은 중국 관광객의 입국금지는 “정치적, 외교적 보복을 당할 수 있다”면서 거부 이유를 밝혔다. 두테르테 정부는 마지못해 1월31일자로 중국 내 코로나19 감염지역 출신 중국인 여행자들에 한해 입국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지난 2일 우한 출신의 중국인 여행객이 중국 밖에서 처음 바이러스 사망자가 되자 입국금지령을 모든 중국인 여행객으로 즉각 확대했다. 중국인 입국금지령을 촉구해온 현지의 보건의료 전문가는 “각국은 자국민을 구하기 위해 외교적 프로토콜을 깨야 한다”면서 “필리핀은 제1세계의 (선진)국가들처럼 (바이러스 방역에) 준비가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26일 현재까지 필리핀 확진자는 3명에 그쳤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남아의 대표적인 친중 지도자다. 일관되게 중국발 팬데믹의 위험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중국 방문을 앞둔 이달 초 훈센은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한 자리에서 “총리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는데, 당신들은 왜 하고 있느냐”면서 대범함 또는 무모함을 내보였다. 캄보디아는 이달 초부터 WHO에 확진자를 계속 1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캄보디아 보건부의 설명처럼 고온에 약한 바이러스의 특성상 기후가 최선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캄보디아 민간항공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우한에서 귀국한 캄보디아 국민만 3000명에 달한다. 촘촘한 방역 시스템으로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는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그보다는 자국민의 해당국 입국금지령을 내리는 것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해온 중국의 압력을 고려한 조치로 의심된다.
중국 외교부는 미국이 중국인 출입금지령을 내리자 WHO의 권고사항을 들먹이며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양국 간) 우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반발했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조심스러운 대응을 하는 것은 일견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자국민의 안전에서조차 중국 눈치를 보는 현실의 냉혹함을 새삼 일깨운다. 각각 1000㎞가 넘는 육상국경을 중국과 맞대고 있는 북한과 베트남은 각각 국경을 폐쇄하고 엄격한 대중국 방역을 하고 있다. 북한은 아직 확진자 발생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베트남은 19명의 확진자가 전원 완치됐다고 밝혔다. 인도네시아 역시 지난 5일부터 14일 내 중국 본토 방문자 입국을 제한하고, 중국 본토를 오가는 모든 여객기 운항을 중단했다. 인도네시아 주재 중국대사가 강하게 경고했지만, 2억7000만 국민의 안전을 우선했다. 여기까지가 중국발 팬데믹의 Ⅰ막이다.
초기 대응이 단호했다고 마지막까지 성공적인 방역을 할 수 있을런지는 미지수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장기전이기 때문이다. 26일 현재 코로나19 확진자의 10% 수준인 8273명에 불과했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은 2003년 7월 가라앉기까지 8개월이 걸렸다. 2009년 4월 발생한 신종플루는 163만여명의 확진자가 확인되고 1만9633명이 사망하기까지 13개월이 걸렸다. 아직 각국의 방역 성적을 매기기엔 성급하다는 말이다. 팬데믹의 Ⅱ막은 각국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방역 시스템의 수준이 좌우한다. 이 점에서 한국의 보건의료 인프라는 나쁘지 않다.
미국 존스홉킨스 보건안전센터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글로벌 보건안전지수(GHI)에 따르면 한국은 ‘팬데믹에 가장 잘 준비된 10개국’에 포함된다. 전염병 예방 및 탐지, 대응 능력 등을 종합, 1~100점으로 표시한 GHI는 미국(83.5)을 1위로 꼽았다. 트럼프가 이날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최고라고 자랑한 근거다. 이어 영국(77.9), 네덜란드(75.6), 호주(75.5), 캐나다(75.3) 순이었다. 아시아에선 태국(73.2)이 가장 높았으며 한국은 스웨덴과 덴마크에 이어 70.2점으로 9위를 차지했다. 10위는 핀란드(68.7)이다. 안타깝게도 북한(17.5)은 기니(16.2)와 소말리아(16.6)에 이어 조사 대상 195개국 가운데 밑에서 3위였다. 하지만 아무리 완비된 보건의료 시스템일지라도 급속히 퍼져나가는 팬데믹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국 미네소타대 마이클 오스터홈 감염질병연구센터 국장과 다큐멘터리 작가 마크 올셰이커에 따르면 코로나19 감염자 1명은 평균 2.6명에게 전염시킨다. 10번 정도 감염이 진행되면 며칠 내로 대부분 경증이거나 무증상이지만 3500명의 인체에 바이러스를 옮긴다. 일본 요코하마 앞에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를 방치한 아베 신조 내각의 ‘잔인한 실험’으로 확인된 것은 놀라운 전파 속도뿐이었다. 바이러스와의 싸움도 전쟁이라면, 그 대비책은 자명하다. ‘실탄’을 비축하고, ‘병사’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 백신 개발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에 필요한 게 국제협력이다.
지구의 북반구는 이미 계절독감이 유행하고 있다. N95 마스크와 장갑, 눈 보호장비, 1회용 방역복은 이미 각국에서 공급이 달려간다. 제한된 물품과 장비는 보건의료 인력에 우선적으로 공급돼야 한다. 병원 응급실에서조차 바이러스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사회 전체가 패닉에 휩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싸워야 할 주적은 환자마다 다르다. 오스터홈과 올셰이커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우한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재연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코로나19 환자가 밀려들면서 병원은 결국 중증환자만 받게 되고, 그 때문에 심장발작이나 치명적인 부상 또는 암 환자들의 입원이 어려워지면서 또 다른 인명피해가 우려된다는 말이다.
팬데믹 Ⅱ막에서조차 특정국을 격리하면, 스스로 격리된다. 우한을 비롯한 바이러스 창궐지역을 봉쇄한 중국의 조치는 일단 확산 속도를 지연시켰지만, 한 지역을 봉쇄하면 결국 각각 고립돼 바이러스 및 온갖 질병과 싸울 실탄을 확보하기 어렵게 된다. 글로벌 공급체인은 질병과의 전쟁에도 해당되기 대문이다. 세계 복제약 제조사가 몰린 중국과 인도와 단절한다면, 코로나19에 살아남는다고 해도 다른 질병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산 마스크의 원자재 40% 정도는 중국산이다.
코로나19는 올 11월 미국 대선의 향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재선에 나선 트럼프가 늘 내세우는 ‘경제 실적’이 월스트리트 주가 폭락으로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26일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준비된 의료체계를 자랑했다. 하지만 올 회계연도에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예산을 16%나 삭감한 장본인도 그다. 복지부 예산은 10% 깎았다. 애시당초 그의 안중엔 보건의료나 환경,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국제협력이 없었다. 이 와중에 러시아에 기반을 둔 소셜미디어들이 코로나19와 관련한 가짜뉴스를 유포해 미국 제도와 사회를 흔들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향방뿐 아니라 한바탕 코로나19가 휩쓸고 지나간 뒤 세계가 어떻게 바뀔지 역시 안갯속에 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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