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위치에 이렇게 싼 집이 있었나.” 한여름이었다. 옮겨갈 집을 찾는 과정에 백악관에서 북쪽으로 고작 대여섯 블록 정도 떨어진 위치였던가. 주차공간이 딸린 염가의 타운하우스를 발견했다. 한 채도 아니었다. 워싱턴 시내 웬만한 주거지에는 주차공간이 없었다. 도보 또는 자전거로 시내 주요기관과 대학, 연구소들을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의 위치였다. 기대에 부풀어 현장을 찾아갔다가 초현실적인 광경을 목도했다. 20세기 초에 조성된 듯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것까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널찍한 도로 양편 건물 20여채 중에서 유리창이 제대로 달린 집이 거의 없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유리창이 깨져 있거나, 비닐로 대충 막은 집이 대부분이었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모퉁이에 놓인 드럼통 주변에는 흑인과 히스패닉 남자들이 몇명 둘러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흡사 갱영화 촬영장을 방불케 했다. 10여년 전 워싱턴 근무 당시의 경험이다. ‘트럼프의 미국’이 1968년을 소환하고 있다.
미국 내 주요 도심에서 흑인과 섞여 살던 백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도시 외곽의 교외(suburban)에 새집을 짓고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문화가 막 생겨나던 시점이다. 단순한 문화의 변화가 아니었다. 탈출이었다. 이른바 ‘백인 대탈출(White flight)’. 흑백차별과 베트남전을 둘러싼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도심은 시위무대가 됐다. 특히 1968년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피살된 뒤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흑인들의 시위와 방화, 약탈이 집단이주에 불을 붙였다. 대도시 중심에는 유색인종이 살고 백인 중산층이 교외에 거주하는, 지극히 미국적 풍경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1960년대 미국은 인종차별과 베트남전을 둘러싸고 양 진영으로 갈려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반전시위와 애국시위가 동시에 열렸고, 흑인과 백인이 거리에서 맞붙었다. 최상의 세월과 최악의 세월이 교차했다. 린든 존슨 행정부와 의회 민주당은 기념비적인 업적들을 남겼다. 민권법(1964)을 통과시켜 인종차별을 막기 위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고, 이듬해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남부 11개 주 흑인 수백만명을 유권자로 만들었다. 초·중등학교에 대한 연방 예산 지원을 이뤄냈고, ‘빈곤과의 전쟁’을 벌이면서 건강보험제도를 개혁했다. 미국의 열악한 건보제도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두 개의 프로그램이 있다. 메디케어(65세 이상 노인 대상)와 메디케이드(저소득층 대상)이다. 이를 탄생시킨 것도 존슨 행정부였다.
킹 목사 역시 베트남전 반전시위에 나섰지만, ‘위대한 사회’를 건설하려 애썼던 존슨 행정부의 업적을 평가했다. 1968년은 암살의 해이기도 했다. 킹 목사는 4월에, 베트남전에 반대하며 대권 도전에 나섰던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은 6월에 각각 피살됐다. 그해 11월에도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진 존슨은 결국 재선을 포기했다. 최악의 순간은 유난히 ‘법과 질서’를 강조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 발생했다. 1970년 오하이오주 켄트주립대 학생들의 평화로운 시위에 주방위군(내셔널 가드)이 발포해 4명이 숨지고 9명이 다쳤다.
미국에서 퇴역군인들 특히, 참전용사들은 각별한 대우를 받는다. 더구나 무공훈장을 받은 참전용사들은 말 그대로 미국 사회의 ‘영웅’들이다. 1971년 4월23일 반전 구호를 외치며 연방의사당으로 향하던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을 경찰이 원천봉쇄했다. 길이 막히자 참전용사들은 저마다 베트남전에서 받은 무공훈장을 내던졌다. 의사당 서쪽 현관 앞에 버려진 훈장은 무려 700여개였다. TV 카메라를 포함해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광경은 미국 사회에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국가가 부여한 최고의 영예를 의회민주주의 본산에 내버림으로써 ‘미국 정신(American Sprit)’에 사망선고를 내린 사건이었다.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은 기실, 이 순간에 끝났다.
미국은 넓게 펼쳐진 지리적 특성에 낮은 인구밀도로 인해 전국 규모의 시위가 벌어지기 어려운 사회구조를 갖고 있다. 1960년대 반전시위 및 민권운동 이후 대규모 시위가 없었던 이유다. 2004년 대선 당시 이라크전 반전시위 역시 찻잔 속 돌풍으로 끝났다. 그런 미국 대도시들이 다시 시위와 방화, 약탈로 얼룩지고 있다. 지난달 25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무릎에 눌려 사망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46)의 죽음이 촉발시킨 분노의 물결이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연대시위가 옮겨붙고 있다.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드물게 공감력이 떨어지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우악스러운 대처다. 플로이드의 사망에 “충격적이며 동영상을 보고 불쾌했다”고 짤막한 유감을 표명한 트럼프는 시위가 격화되자 곧바로 “약탈이 시작되면, 총격이 시작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지난 1일 백악관 로즈가든 회견에서는 시위대를 ‘인간쓰레기’이자 “미국이 직업적 무정부주의자와 폭력적인 군중, 방화범, 약탈범, 범죄자, 폭도, 안티파(Antifa·반파시즘 극좌 연대)에 붙잡혔다”고 말했다. 그 끝에 주방위군뿐 아니라 연방 정규군을 투입할 수도 있다고 공언했다. 자국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대통령은 이번에도 군의 반발을 사고 있다. 퇴역 군인 중에서는 군 수뇌부 출신인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과 마이클 멀린 전 합참의장이 나섰다.
2018년 트럼프의 시리아 철군 방침에 반발해 물러난 뒤 침묵을 지켜온 매티스 전 국방장관은 3일 애틀랜틱에 발표한 성명에서 나치독일을 언급하며 트럼프를 독하게 비난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앞두고 미군 지휘부가 병사들에게 전달했던 메시지를 상기시켰다. 성명은 “우리를 파괴하려는 나치의 슬로건은 ‘분리해, 정복하라(Divide and Conquer)’였다. 우리 미국의 답은 ‘뭉쳐야 힘이 된다(In Union There is Strength)’였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를 나치에 비유한 것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표현이다.
‘영원한 해병’ 매티스 전 장관은 “도널드 트럼프는 내 평생 미국민을 뭉치게 하려고 하지 않고, 하는 시늉도 하지 않는 첫번째 대통령”이라며 “그 대신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고 성토했다. ‘뭉쳐야 힘이 된다’는 그가 발표한 성명 제목이기도 하다. 멀린 전 합참의장 역시 같은 날 ‘나는 침묵할 수 없다’는 제목의 애틀랜틱 기고문에서 “우리의 동료 시민들은 적이 아니다. 결코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그는 “너무 많은 국내외 정책의 선택들이 군사화되고 있고, 너무 많은 군사적 임무들이 정치화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묘기(를 부릴) 시기가 아니라, 리더십(을 발휘할) 시기”라고 단언했다.
매티스의 뒤를 이은 마크 에스퍼 현 국방장관도 보조를 맞췄다. 에스퍼 장관은 3일 브리핑에서 “법 집행에 병력을 동원하는 선택은 최후의 수단으로, 가장 다급하고 심각한 상황에만 동원돼야 한다”면서 ‘군 통수권자’의 정규군 동원 방침에 선을 그었다. 트럼프의 방침에 순종한다는 평을 들어온 그로서는 이례적인 입장 표명이었다.
5년제 군사기숙학교 출신이라 그럴까. 트럼프는 '군사놀이'를 좋아한다. 취임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군과 국방력을 강조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전시 대통령'을 자임했다. 지난해 독립기념일에는 지난 세기의 유물인 군사퍼레이드의 부활을 추진했다가, 여론이 반발하자 퍼레이드 성격을 완화해 열었다. 중국과 러시아를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해 냉전 당시의 군비경쟁에 착수한 트럼프다. 매티스나 멀린, 에스퍼처럼 전·현직 군 수뇌부만 들고일어난 게 아니다. 시위대와 진압군의 대치 영상은 미국인들에게 ‘훈장 투척사건’ 못지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에서 시위는 애국이다(In America, Protest Is Patriotic)’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미국 사회가 1968년과 다른 점은 많은 백인들이 탈출하는 대신, 흑인들과 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티스의 지적이 정확하다. 미국은 국명부터가 ‘각 주의 연합(United States)’이다. 역대 모든 대통령은 실제로 구현하지는 못했을지언정 미국민의 단합을 강조해왔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유세과정에서 “백인의 미국, 흑인의 미국이 아닌, 유나이티드 스테이트”를 강조했다. 트럼프는 그러나 2016년 유세 때부터 남성과 여성, 남부와 북부, 백인과 흑인 등 가능한 한 모든 가치를 분리하면서 득세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국들과 한·미동맹을 군사분담금 납부 실적을 기준으로 분리했다. 2017년 가을에 버지니아주 샬럿츠빌의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앞에서 벌어진 극우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시위를 두둔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군을 이용한 것은 자신의 남성다움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1968년이 그랬듯이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다. 대통령에 취임한 2017년 1월20일자로 연방선거위원회(FEC)에 재선 운동본부를 등록한 트럼프다. 선거와 무관한 짓을 할 리가 없다. 트럼프의 모든 결정은 오는 11월3일 대선 투표일을 겨냥한다.
플로이드 사건은 그의 셈법에선 위기이자, 기회였을 게다. 일단 이번 선거의 최대 승부수로 지난달 20일 발표했던 ‘중국 카드’의 빛이 바랜 반면에 2016년 대선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법과 질서’의 수호자로서의 이미지가 눈에 들어왔을 법하다. 그가 지난 1일 백악관 뒤편 라파예트 사각정원을 지나 우정 세인트 존스 교회 앞까지 걸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트럼프는 성경책을 들고 국가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공화당 내에서조차 ‘사진촬영쇼’나 ‘묘기(stunt)’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까닭이다.
이 와중에 중국은 홍콩보안법 제정을 강행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혐중 에너지를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트럼프에게 좋은 빌미를 주고 있다. 주요 2개국(G2)이 G0가 됐다는 한탄도 낡았다. 뉴노멀은커녕 여전히 어정쩡한 ‘세미 노멀(semi normal)’의 시기다. 세계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분리된 채 코로나19의 뿌연 안갯속을 행군하고 있다. 트럼프가 잇달아 터뜨리는 연막탄의 연기가 가라앉고 난 뒤 미국은, 또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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