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마다 위기에 처하면, 돌아보는 역사가 있다. 미국 정치에서 역사는 늘 휴대하는 손전화와 비슷한 것 같다. 워싱턴의 연방의사당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토론과정에서도 수시로 튀어나온다. 한쪽이 “조지 워싱턴은 단 한 번도 후퇴한 적이 없다”면서 법안 통과를 주장하면, 다른 쪽은 “무슨 소리냐. 워싱턴은 델라웨어강 전투에서는 물론, 필요하다면 늘 후퇴했다”고 반박하는 식이다. 역사 지식이 달리면 토론에서 말발이 밀릴 수밖에 없다.
현직 대통령이 대선 결과에 불복한 이례적인 상황에 미국 사회는 ‘새삼’ 충격에 빠졌다. 게다가 미국 민주주의 본당에 폭도가 난입하다니. 지난 1월6일 ‘의사당 폭동’은 대선 이후 가열됐던 역사 회고 성향을 심화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 취임으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겠지만 여진은 끝나지 않았다. 상원의 트럼프 탄핵재판과 트럼프가 아직 폐쇄되지 않은 소셜미디어 계정으로 내보낼 메시지가 불쏘시개가 될 게 분명하다. 트럼프는 백악관을 떠나며 지지자들에게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에는 성경 다음으로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 관련 책들이 많이 출판된다는 통설이 있다. 워싱턴과 링컨의 역사를 자주 여는 것은 ‘예외적인 국가’를 만들고 지켜온 자랑스러운 기억 때문일 게다. 링컨은 남북전쟁에도 불구하고 국가통합을 이룬 지도자로 끊임없이 칭송받는다. 불황과 경제적 불평등이 문제가 될 때 소환되는 지도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취임한 버락 오바마를 두고 ‘검은 루스벨트’라고 명명했던 것처럼 조 바이든 대통령이 코로나19 경제난 와중에 제2의 FDR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곳곳에 드러난다. 그러나 요즈음 미국 언론이 자주 환기하는 역사는 워싱턴과 링컨, FDR의 자랑스러운 기억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해 11월 대선 이후 유독 많이 소환된 역사의 장면들은 미국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물론, 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우선 공화당의 러더포드 헤이스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인정’된 1876년 대선이 주목받고 있다. 헤이스는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아니라, 타협의 산물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북부군이 남부 각주에 주둔하던 재건과정(Reconstruction)의 막바지 혼란 속에 치러진 선거였기에 결과가 명확하지 않았다. 새뮤얼 틸던 민주당 후보가 20만표 정도 더 많이 받았지만, 남부 지역에서 극심한 혼란이 계속됐다. 일부 주에서는 투표결과 보고가 복수로 올라왔다. 결국 연방 상·하원은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승자를 헤이스로 정하기로 합의했다. “대선을 도둑맞았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녹음기처럼 따라 하면서 1876년식 대통령 선출위원회를 구성하자는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공화·텍사스)의 제안으로 소환된 역사다. 공화당 상원의원 10명이 크루즈에 동조했지만 역사적 팩트를 무시한 주장이었다.
당시 남북전쟁에서 남부에 속했던 7개 주(Dixie Land·딕시랜드)에서는 광범위한 유혈 테러와 흑인들에 대해 선거 불참을 협박하는 일이 벌어졌다. 흑인들 아성이었던 사우스캐롤라이나 햄버그에서는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인근 조지아주에서 넘어온 백인 폭도들이 총으로 무장, 흑인들을 살해 또는 처형하고 흑인들의 집과 상점을 초토화했다. 또 의회는 비록 타협으로 헤이스를 선출했지만, 10년 뒤 대통령 선출위원회 구성의 법적 근거를 없앴다. 이번 대선은 총격과 방화, 폭행으로 얼룩진 선거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의회는 더 이상 대통령 선출권을 행사할 수도 없기에 크루즈의 주장은 어떠한 정치적 명분이나 법적 근거가 없었다. 다만 선거결과를 백지로 돌리는 인종 갈등의 폭력사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1876년 대선이 미국 사회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당시 공화당과 민주당 간 타협의 내용 때문이다. 남부는 대권을 양보했지만, 얻은 게 더 컸다. 공화당의 연방정부가 남부 각주에 주둔했던 연방군을 모두 철수키로 합의한 것이다. 재건과정은 미완으로 종결됐고, 남부는 1964년 민권법 제정까지 1세기 가까이 합법적으로 흑인차별을 할 수 있게 됐다. 링컨이 남북전쟁으로 이룩한 흑인 노예해방의 성과를 되돌린 꼴이다.
두 번째 역사적 사건은 1898년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에서 벌어졌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성공한 유혈 쿠데타’였다. 1876년 타협의 연장선상에서 놓여 있다. ‘윌밍턴 학살’ 또는 ‘윌밍턴 반란’이라고도 불린다. 이번 의사당 폭동은 “시위가 아닌 반란”이라는 바이든의 말과 함께 미국 언론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노스캐롤라이나 역시 딕시랜드이지만, 번성했던 윌밍턴에는 성공한 흑인들이 유독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미국 내에서 유일하게 흑인 신문 데일리 레코드가 발행됐다. 흑인들은 가난한 백인들과 함께 퓨전당을 창당해 1890년대 주정부의 주요 공직을 차지했다. 인종 분리를 고집했던 민주당은 1898년 주의회 선거를 앞두고 폭동을 조직했다.
2000여명의 백인 자경단 ‘레드 셔츠’는 흑인들에게 테러를 가함으로써 투표권 행사를 방해했다. 윌밍턴 시내에서만 수백명의 흑인을 학살하고, 흑인들의 집과 상점, 기업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데일리 레코드 사옥은 불탔고 발행인은 다른 주로 피했다. 선거에서 압승한 민주당은 문자해독 능력과 재산으로 투표권을 제한, 흑인 및 가난한 백인의 참정권을 사실상 박탈했다. 그 결과 1896년 12만5000명에 달했던 흑인 유권자는 4년 뒤 6000명으로 줄었다. 퓨전당은 해체됐고 노스캐롤라이나는 다른 딕시랜드 처럼 이후 오랫동안 백인 민주당의 세상이 됐다.
백인들은 당시 사건을 흑인들이 주도한 폭동이라고 교묘하게 왜곡했다. 레드 셔츠 주동자들은 되레 영웅으로 둔갑해 대학과 학교, 공공건물에 이름을 남겼다. 1901년 주지사에 당선된 찰스 아이콕도 그중 한명이다. 트럼프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휘젓고 다닌 연방의사당 스태추어리홀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윌밍턴 사건은 1990년대 들어서야 백인들의 인종반란이자 쿠데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의사당 폭동을 두고 “어떻게 미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는 개탄이 이어지는 가운데 뉴욕타임스 논설위원 브렌트 스테이플이 영광의 역사만 골라서 기억하는 미국민의 역사관이 “미국은 결백하다는 신화를 만들어 놓았다”고 질타한 까닭이다.
1876년 타협과 윌밍턴 학살이 각별한 조명을 받는 것은 의사당 폭동 바탕에 미국적 전통의 일부인 인종차별의 흑역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의 결과가 뒤집힌 선거구들이 대부분 흑인 밀집 도시지역이었던 게 화근이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흑인 거주 지역이 선거사기의 ‘열점’이라는 가짜뉴스를 집요하게 퍼뜨렸다. 그 결과 ‘남부군’이 의사당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의사당 폭동’ 하루 뒤인 지난 7일 워싱턴 연방의사당의 스테츄어리 홀에서 한 환경미화원이 동상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연방 상·하원이 바이든 당선을 공식 선언하는 날을 잡아 트럼프가 백악관 뒤뜰에서 시작한 ‘미국을 구원하는 행진(Save America March)’은 민주적 선거결과의 불복과 백인우월주의의 증오가 뒤섞인 기획이었다. 의사당에 난입한 폭도들이 성조기와 함께 남부동맹군의 전투 깃발을 들고 있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취임 첫해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난동을 벌인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좋은 사람들(fine people)’이라며 두둔했던 트럼프다.
바이든 역시 지난 20일 취임연설에서 링컨을 환기시켰다. 추상적인 단어들을 나열하는 방식의 밋밋한 내용이었지만 현실 속 역사는 정확히 담았다. 인종갈등의 흑역사와 이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바이든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월1일 링컨이 노예해방법에 서명하면서 했던 말을 소개하며 ‘인종 간 정의’를 이뤄내겠다고 다짐했다. “만약 내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일과 내 전 영혼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링컨의 말에 더해 “오늘, 나의 전 영혼이 그 안에 있다”고 말했다. 바이든은 모든 미국 지도자들이 중요 연설에 반드시 포함시키는 ‘아메리칸 드림’조차 생략했다. 미국을 규정하는 몇 개의 공동목표 가운데 ‘기회’를 맨 앞에 위치시켰을 뿐이다. 여느 때였으면 생뚱맞았을 ‘평화적 정권교체’가 대신 들어갔다. 미국이 비상시국임을 고스란히 드러낸 연설이었다.
미국 민주주의 시스템에 근본적 위기가 닥친 뒤 취임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바이든은 워터게이트 사건 뒤 백악관에 입성한 지미 카터와 비슷한 면이 있다.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리처드 닉슨의 잔여임기를 수행한 뒤였기에 충격은 덜했겠지만, 카터는 취임연설 첫마디에 “치유”를 담았다. 카터는 도덕주의를 선포했고, 바이든은 국민적 통합과, 민주주의의 복원을 되풀이 다짐했다. 치유의 언어가 복잡하면 안 된다. 두 사람의 연설이 추상적인 단어의 나열에 그친 이유인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에서건 역사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어진다. 겹치기도 한다. 바이든은 트럼프의 족적 위에 자신의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3박자로 흥한 트럼프는 3박자로 망했다.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가둬라(Lock Her Up)” 구호로 대권을 쥐었다가 “선거 도둑질을 멈춰라(Stop The Steal)”는 구호 속에 백악관을 떠났다.
트럼프 시대를 보내면서 정치는 결국 연기라는 생각이 굳어진다. 가난을 모르고 자란 트럼프가 중국산 제품에 일자리를 빼앗긴 가난한 중서부 백인들의 우상이 된 것은 그만큼 스스로 설정한 배역을 잘 소화했음을 말해준다. 딕시랜드의 좌절을 겪어보지 못한 뉴요커가 ‘남부군 총사령관’이 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바통을 넘겨받은 바이든은 ‘통합(unity)’을 외쳤다. 하지만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준다. 사심이 있었을지언정 트럼프가 뜨겁게 껴안고 달랬던 ‘잊힌 그들’을 바이든이 그만큼 포옹할 수 있을까. 버락 오바마의 통합 노력은 보건의료 개혁에서부터 좌절됐다. 보수주의 풀뿌리 저항이 티파티로 번지더니, 트럼프 집권으로 절정을 이뤘다. 오바마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주범이었던 월스트리트만 날씬하게 복원시켰다. 리버럴 정당의 한계였다. 민주당은 FDR 이후 근본적인 개혁을 이룬 적이 거의 없다. 트럼프는 흑역사의 연장(延長)이자, 시대의 소산이었다.
흑백차별의 근본적인 해법은 퓨전당 처럼 흑인의 정치세력화가 이뤄질 때나 가능하다. 하지만 '사상 첫 흑인 대통령'도 흑인의 정치세력화는 꿈도 꾸지 않았다. 바이든은 과연, 역사의 새 장(章)을 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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