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의 한반도 리서치]대북지원 빵은 돼도 밀가루는 안 된다
ㆍ박근혜 정부 인도적 방침의 허상, 지원 대상을 일부 계층으로 한정
“대북 (식량)지원을 허가하는 데에 밀가루와 옥수수는 왜 안 되는가.”(민주당 원혜영 의원)
“지금 상황에서 밀가루와 옥수수는 (승인)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갖고 있다.”(류길재 통일부 장관)
올해 국회 국정감사 도중 지난 10월 15일 통일부 장관을 상대로 한 대정부 질의의 한 토막이다. 박근혜 정부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북 인도적 지원의 본질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논란이 된 것은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가 신청한 밀가루 1000톤과 옥수수 1200톤의 반출을 통일부가 불허했기 때문이다.
류길재 장관은 정부의 방침이라는 점을 강조했을 뿐 자세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북한이 핵실험을 하든, 미사일을 쏘든, 대남 위협을 하든 상관없이 무조건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게 국민 여론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상황에서까지 지원하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말해 속내의 일단을 드러냈다.
지난 2012년 9월 21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에서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의 관계자들이 북한측에 지원하는 밀가루 포대를 들고 손을 흔들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
“(대북 지원을) 기계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듣다 못한 원혜영 의원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내용을 인용해 “피 안 나게 고기 한 근을 끊어보라”고 되받으면서 통 큰 행정을 촉구했겠는가.
류 장관이 인도적 지원을 정치·군사적 상황과 연계시킨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공약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인도적 지원의 기준은 ‘정치적 상황’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공약을 통해 대북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구분하여 지속적으로 해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유엔아동기금(UNICEF), 세계식량기구(WFP) 등 국제기구를 적극 활용해 영유아를 비롯한 취약계층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겠다고도 했다.
류 장관의 발언은 박 대통령의 약속과 달리 정부가 인도적 지원을 정치·군사적인 상황과 연계하고 있다는 점을 공식 천명한 꼴이다. 국민 여론을 빌미로 들지만 핑계일 뿐이다.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조치로 남북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었던 지난 4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3.9%가 대북 인도적 지원에는 찬성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은 남북관계가 냉랭했던 이명박 정부 때도 유지됐던 정책이다. 2011년과 2012년에 걸쳐 9000여톤의 밀가루가 민간단체에 의해 북한에 전달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 인도적 지원이 이명박 정부보다 못하다는 비판여론이 제기되는 이유다.
대북 인도적 지원마저 명맥이 끊길 지경에 몰리고 있는 가운데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는 식량난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세계식량정책연구소(IFPRI)가 ‘세계 식량의 날’이었던 지난 16일 발표한 올해 세계 굶주림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100점 만점에 18점으로 심각한 수준이다. 연구소측은 북한 전체 인구의 32%가 영양실조 상태라고 밝혔는데, 이는 식량사정이 악화되기 이전인 1990~1992년 당시의 25.4%보다 악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는 대북 인도적 지원의 대상을 5세 이하 영유아와 산모, 장애인으로 한정시켜놓고 있다.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을 전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분의 계층만을 돕겠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취임 이후 정부 차원에서 지원키로 한 것은 135억원에 불과하다. 올해만 2조411억원의 공적개발원조(ODA)를 제공키로 한 것에 비하면 대북지원 실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UNICEF와 WHO 등 국제기구를 통해 영유아나 산모 영양식 및 보건 지원을 한다는 명목에서다.
지난 9월 2일 12개 민간단체의 지원 신청 품목들도 영양식과 어린이 운동화, 학용품, 보건 지원 관련 물품들이다. 승인 품목 중에는 밀가루 600여톤이 포함돼 있지만 이는 중국 단둥이나 북한 내에 빵공장 설비를 갖추고 있는 민간단체들이 영양빵 제조 명목으로 신청한 밀가루이다. 영양빵은 돼도 포대에 담겨 누가 먹을지 모르는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는 반출해줄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편협하기 짝이 없는 방침이다.
5세 이하 영유아·산모·장애인 한정
그렇다면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5세 미만 영유아의 영양상태는 어떨까. 북한의 중앙통계국이 WFP와 UNICEF, WHO의 기술지원을 받아 지난해 9월부터 10월까지 한 달간 실시한 조사 결과 북한의 5세 미만 어린이 170만5000명 가운데 30만5195명(27.9%)이 만성영양장애를 앓고 있었다. 이 중 7.2%는 심각한 상태로 조사됐다.
같은 조사에서 북한 어린이 3명 가운데 1명(29%)은 대부분 영양결핍에 따른 빈혈을 앓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럼에도 정부의 지원 방침은 5세 미만 영유아 중심이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보수주의의 대부격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조차 “배고픈 아이는 정치를 모른다”(A hungry child knows no politics)고 했다. 정부의 대북지원 방침은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 중에서도 영유아에게만 초점을 두고 있지만 굶주림의 재앙은 연령을 구분하지 않고 덮친다. 이를 정치적인 목적에서 애써 외면하겠다는 것은 인도적 나눔이라고 볼 수 없다.
정부는 2008년 이후 매년 쌀 40만톤과 비료 30만톤의 지원 예산을 잡아 왔다. 올해도 6200억원이 계상돼 있다. 하지만 그림의 떡이다. 정부 당국자는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거나, 북한 핵문제 해결의 가닥이 잡히기 전에는 집행되지 않을 예산”이라고 잘라 말한다.
민간 차원의 지원액마저 2004년 1558억원을 정점으로 2007년(909억원)을 제외하곤 매년 하락 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지난해에는 118억원에 불과했다. 올 들어 41억원에 그친 것을 보면 100억원을 밑돌 수도 있다. 민간 차원의 대북지원 규모가 줄어든 데는 류 장관의 말대로 북한 탓이 크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무력도발 또는 도발 위협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북한을 바라보는 민심이 식어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군사 상황과 별도로 지원하겠다는 인도적 지원마저 ‘피 안 나게 고기를 끊어가라’는 식으로 막는 것은 인도적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 뿐이다.
다행히 올해 북한의 작황은 지난해에 비해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를 비롯한 국제기구의 실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북한의 올해 식량 생산량이 530만톤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태풍이나 홍수, 집중호우 등 자연재해가 적었던 덕분이다. 지난해는 492만톤에 그쳤다.
북한 당국이 목표로 하는 1인당 하루 식량 공급량은 570g(국제 기준은 700g)이다. 인구규모를 감안하면 한 해 최소 식량 소요량은 545만~550만톤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의 김영훈 선임연구위원은 “예상대로 풍작을 거둔다면 부족한 15만~20만톤의 식량은 북한 정부가 수입해 조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작황이 좋았다고 개개인의 식량사정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북한 당국은 갈수록 국가배급량을 줄이고 부족분은 자체 조달토록 하고 있다. 지역별로 배급량도 다르다. 평안도 지역은 하루 500g도 배급하지만 함경남북도와 자강도, 양강도, 강원도 북부지역에는 170g만 배급하는 곳도 태반이다.
지난해 말 ㎏당 7000원까지 올랐던 장마당의 쌀 시세가 최근 5000원 정도로 안정됐다지만 지역 및 소득수준에 따라 배고픈 가정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한 원칙을 다시 정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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