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의 한반도 리서치]장성택 운명보다 ‘이후’가 중요하다
ㆍ정부 고위당국자들이 나서 추측 남발하지 말고 차분한 대책 세워야
연기가 자욱하다. 국가정보원이 돌연 공개한 ‘장성택 실각 가능성 농후’라는 소식이 삽시간에 국내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적어도 지난 주말까지는 국정원 개혁에 대한 여론의 관심을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일본의 집단 자위권 문제와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확대 발표로 미세먼지가 자욱한 한반도 정세에 또 하나의 연막탄을 터뜨렸다.
북한발 뉴스는 적지않은 경우 국내외 언론의 실체 없는 추측게임이다. 이번엔 그 발화점이 개혁 수술대에 오른 국정원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색채를 진하게 띤다. 안보문제보다는 남북한의 국내정치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이 안개를 걷어내는 지름길일지도 모른다는 잠정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까닭이다.
장성택 북한 국방위 부위원장. | AP연합뉴스 |
보위부 위에 행정부, 그 위에 조직지도부
장성택은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노동당 중앙위 행정부장이다. 국정원이 12월 3일 공개한 요지는 이렇다. “지난 11월 하순 북한이 장성택의 핵심 측근인 리용하 행정부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을 공개처형했다. 이후 장성택 소관 조직과 연계 인물들에 대해서도 후속조치가 진행 중이다. 장성택은 모든 직책에서 해임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에 따르면 리용하와 장수길이 공개처형된 죄목은 ‘월권’과 ‘분파행위’ 및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거부’ 등이다. “장성택의 등 뒤에 숨어서 당 위의 당, 내각 위의 내각으로 군림하려 했다”는 것이다.
12월 4일자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혁명적 신념은 목숨보다 귀중하다’는 글을 통해 “지난날 아무리 오랜 기간 당에 충실하였다고 하여도 오늘 어느 한순간이라도 당에 충실하지 못하면 충신이 될 수 없다.
충신은 99%짜리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100%짜리만이 있을 수 있다”고 명토를 박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오랜 기간 당에 충실했던, 1% 모자란 충신이 공개처형된 리용하와 장수길을 말하는 것인지 장성택을 지목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여기까지는 왕조시대를 방불케 하는 북한의 수령체제에서 항다반사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를 두고 최용해 인민군 총정치국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의 반란이라느니, 권력투쟁설이라느니 하는 식의 해석을 내놓는 것은 그야말로 추측에 불과하다. 북한 군부 내에서는 “바늘 하나가 떨어져도, 나뭇잎 하나가 떨어져도 당에 보고하라”는 격언이 있다고 한다. 일거수 일투족은 물론 말 한 마디까지 당에 노출된다. 장성택을 두고 ‘북한의 2인자’라고 칭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수령체제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기관을 꼽으라면 단연 당 조직지도부다. 노동당 중앙위의 다른 당기구와 달리 조직지도부 부장은 공석인 경우가 많다. 한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이 조직지도부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라고 한다.
행정부는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보안부, 검찰을 총괄한다. 당 간부들을 수시로 도청할 권한을 갖고 있는 보위부 위에 행정부가 있고, 그 위에 조직지도부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장성택 행정부장의 수하들을 처형할 수있는 기구는 조직지도부밖에 없다.
1980년대 말 한시적으로 존재했던 행정부를 정리한 것도 조직지도부였다. 김시호 당시 행정부장은 조직지도부의 지도에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숙청됐다. 김정일은 “행정부가 당 위의 당”이냐고 질타하면서 행정부를 조직지도부 내 행정과로 격하시켰다.
행정부와 장성택의 인연은 오래된다. 장성택은 1995년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됐다. 내용상으로는 행정과를 담당하는 행정담당 부부장 직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안은 김정은 체제 들어 20여년 만에 복권된 행정부가 조직지도부의 위상을 위협하면서 벌어진 국내정치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1980년대 행정부 숙청과정에서 공개처형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이번엔 외자유치까지 맡았던 장성택 측근들의 비리나 반당행위가 도를 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경향신문이 지난 6일 특종 보도한 장성택 최측근의 중국 도피 및 망명 요청은 상당한 개연성을 갖는다.
더구나 외자유치를 맡고 있었던 장성택의 자금을 관리해온 인물이 맞다면 북한으로선 정권의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날 수 있는 뇌관이 아닐 수 없다. 한 북한 전문가는 “김정은이 언젠가는 장성택을 칠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앞당겨진 데다 거칠게 진행하는 것으로 봐서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장성택 최측근 망명설 상당한 개연성
장성택 본인에게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라는 죄명을 씌웠다면, 그의 운명은 끝났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 북한 전문가는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라면 자기 아버지라도 죽여야 하는 것이 북한 체제”라고 말한다. 그의 부인이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의 고모인 김경희라도 감히 장성택의 구명을 요구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얘기다.
장성택의 운명보다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장성택의 숙청 이후다. 장성택 측근들에 대한 공개처형 사실을 전 북한군에 통지하고, 관영언론을 통해 절대충성을 강조하는 상황은 공포정치를 예고하고 있다. 김정은 체제 출범의 일등공신인 장성택의 위치는 “김정은 제1비서에게 현안과 관련해 수시로 보고 또는 자문할 기회가 굉장히 많은 자리(김의도 통일부 대변인)”였다.
직언이나 조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다는 말은 향후 북한이 김정은 1인의 결정에 따라 종잡을 수 없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짙어졌음을 말한다. 장성택은 압록강변의 황금평 및 위화도 경제지대를 중국과 공동개발키로 합의한 인물이다. 남북관계는 물론 중국과의 주요 대화통로가 없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 전문가는 “누군가 장성택의 역할을 대신하겠지만 중국 입장에서 누가 오더라도 장성택만큼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선순위가 다소 처지는 문제로는 북한 내부의 불안으로 자칫 한반도 정세가 흔들릴 가능성이다. 북한 체제 특성상 김정은 체제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장성택 계열의 고위 당간부들이 자신들을 옥죄어오는 추가 숙청의 공포 속에서 모종의 반항을 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는 그야말로 예의주시해야 할 대목이지 한국 정부 고위당국자들이 나서 국민적 불안을 부추길 사안은 결코 아니다.
장성택의 실각은 역설적으로 김정은 체제의 굳건함을 확인시켜주었다. 다듬어지지도 않은 정보와 첩보를 뒤섞어 국민 앞에 불쑥 내놓은 국정원이나, 국회에 출석해 장성택의 거취를 안다 모른다 하면서 혼선을 자초한 통일부 장관이나 일개 ‘관측통’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일은 북한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는 것이다. 동시에 장성택 이후 북한이 어디로 가는지, 언젠가 재개될 남북경협을 어떻게 끌어가야 할지에 대한 차분한 대책도 마련해야 한다. 눈으로 보고 말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천근같이 무거운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뒷방에서 댓글이나 달던 국정원을 하루 빨리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김진호 경향신문 선임기자 j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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