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레예바의 눈물> 손석춘 장편소설. 동하 2016

<코레예바의 눈물> 손석춘 장편소설. 동하 2016

 

"녹두꽃을 꺾은 사람, 누구겠소. 밀고자부터 처형 판결을 한 재판관까지 짚을 수 있겠지만 최종 결정권자는 말할 나위 없이 국와 이재황과 왕비라오. 고종과 민비는 썩은 나라 바로 세우자고 일어난 민중을 제 힘으로 짓밟고 죽이는데 실패하자 외세까지 끌어들여 기어이 대량 학살했소."

"지금 우리의 싸움은 1894년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오. 왕이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실제로 청나라와 일본이 서로 견제하느라 조선에 기어들어올 '명분'을 찾지 못했을거요. 그랬다면 녹두장군은 공주를 함락하고 단숨에 서울까지 들어왔겠지요."

"죽어가는 조선을 붓으로 그려보자! 거듭나는 조선을 붓으로 채질하자!"

1925년 4월15일과 16일에 조선기자대회를 소집하면서 그 대회 참가 또는 구경을 명분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이 서울로 올 수 있었다. 당시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 내걸린 기자대회 펼침막이 눈앞에 삼삼하다.

전국에서 신문과 잡지를 만드는 기자 600여 명이 모였다. 

더구나 4월19일이네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한다고 변죽을 울렸다. 일제는 두 대회에 경찰력을 집중했다.

조선기자대회 마지막날인 4월17일에는 서울 동대문 밖에서 꽃구경을 하며 기자들의 교류 모임을 갖는다고 공표했다. 일제 경찰의 촉수가 온통 그곳에 쏠려 있을 때, 우리는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대낮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특히 조선에서 사상 단체들이 3.1운동 이후 크게 늘어나면서 중앙조직은 더 절실해졌다. 당 창당대회 참석자들은 당 이름으로 고려공산당을 상정했다. 하지만 평안도에서 온 동지가 "파벌싸움만 일삼은 상해와 이르쿠츠크의 고려공산당과 혼동을 일으키기 쉽다"며 조선공산당을 강하게 주장했고 공감대가 퍼지자 김재봉 책임비서가 표결에 붙여 최종 결정했다. 다음날인 4월18일 밤에는 박헌영과 주세죽의 살림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를 열었다. 전국 10개도 28개 세포회의 대표 19명과 공산당대표 1명이 좁은 방을 가득 메웠다. 사흘 뒤 첫 간부회의에서 김단야를 책임비서로, 임원근은 선전교양부장, 단야는 정치연락부장, 조봉암을 국제부를 맡았다. 

"어르신 이 (작은)어선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건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모험 없이 뭘 이루려고 그러오?"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12월 테제' 노동자, 농민 속으로

1929년 10월24일 '검은 목요일'에 뉴욕 월스트리트 증권거래소 주식값이 곤두박질쳤다. 혁명의 길로 들어서서 내내 투장하면서도 내 마음 한구석에는 세계 자본주의가 최후 단계인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련과 함께 미국이라는 변수가 등장했다. ... 그런데 공산대학에 입학한 첫 해, 세계 자본주의 상황을 분석하는 강의를 들을 때, 세계 대공황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났다. 현실은 과연 '살아 있는 교과서'였다.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학자들은 공황 하루전까지도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시장경제'의 우수성을 앵무새처럼 부르댔다. 자본을 언제나 대변하는 신문들의 영향으로 대다수 사람들 또한 자유시장을 신봉했다.

( 1929년 1월1일자 뉴욕타임스 사설은 "미국은 지난 12개월 동안 유사 이래의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다. 과거에 근거해서 미래를 예측한다면 새해는 축복과 희망의 해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 공산대학의 러시아인 교수는 미국의 '검은 목요일' 이후 보름 새 소멸된 주식가치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지출한 총 전쟁비용보다 많다고 분석했다. 

...저마다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해도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로 모든 일이 저절로 풀린다는 신앙은 미신에 지나지 않았다. 절대적인 '시장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자유를 구속했다. 

콜론타이의 소설 <붉은 장미>

러시아 혁명 주역들 사이에서도 퍼졌던 '물 한 잔 이론(성욕을 충족하는 것은 목마를 때 물 한 잔을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뜻)'을 통렬하게 반박. 레닌 마저 "그렇다고 시궁창 물을 먹을 수는 없지 않소"라면서 물 한 잔 이론을 거론. 

"가족은 혁명 러시아에서도 국가를 이루는 기본단위였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일처제와 마찬가지로 혁명 러시아의 일부일처제 또한 실질적으로는 일부다처제였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평등이 온전히 이뤄지지 않는 한, 배타적이고 동등한 성애를 전제로 한 일부일처제는 불가능하다."

박헌영 김단야와 함께 '경성트로이카'의 한명이었던 임원근은 옥중에서 허정숙의 절교선언을 듣고 5년 넘게 감옥에 있다가 만기출옥을 했다. 이후 지하운동과 선을 긋고 1933년 당시 진보적이었던 조선중앙일보 기자(3년 뒤 지방부장)를 지냈다가 조선기계주식회사에 취업했다. 1963년 5월 서울에서 사망.

'여성 트로이카'라고 불렸던 주세죽, 고명자, 허정숙 중 박헌영을 마지막까지 지지한 건 주세죽뿐?

고명자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고 서울로 돌아와 조선공산당재건에 참여했다. 하지만 1930년 일경에 체포된 뒤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친일 잡지 기자로 일했다. 1945년 12월에 운동에 복귀해 조선부녀총동맹 서울지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지만 이듬해 10월 박헌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여운형 쪽으로 기울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경찰에 체포된 이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허정숙은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곤상당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던 최창익과 재혼했다. 해방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선전상을 지냈다. 허정숙(아버지 허헌 변호사는 김일성 대학 초대총장)은 재판 과정에서 박헌영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 박헌영 재판이 끝나고 최창익이 숙청될 때도 허정숙은 증언대에 섰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민주여성동맹 대표단장을 역임하며 1991년까지 살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비밀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드러난 스탈린 대숙청의 실상, 수백만 또는 천만 이상의 희생자가 났다는 서방의 주장은 허황된 날조였다.

1939년 당시 노동수용소와 이주지, 구치소 등에 수감된 인원은 1200만이 아니라 200만명 남짓이었다. 그중 정치범은 45만명이었다. 1937~1939년 사이 노동수용소에서 죽은 사람도 300만명이 아니라 16만 명이었다. 같은 기간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수백만이 아니라 10만 명 남짓이었다. 하지만 10만명을 처형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스탈린의 대숙청은 (자본주의에 비해 우월성을 과시하고 경제개발계획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던 혁명의 성과를 퇴행시킨 동시에) 용서할 수없는 범죄임에 틀림없다.

-해방이 되자 서울 종로에 '박헌영 동지는 공개적으로 나서서 우리를 지도해달라'는 벽보가 붙다.

박헌영은 1945년 9월 조선공산당을 서울에서 공개적으로 재건하고 책임비서로 활동했다. 1946년 9월 미군정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빌미로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하고 박헌영에 체포령을 내렸다. 일제강점기 주세죽을 성고문했던 조선인형사가 경찰로 복귀해 박헌영 체포에 나섰다. 당시 미군정은 남북이 총선거를 하면 박헌영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분석했다.

1948년 9월9일 38선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 김일성은 수상, 박헌영은 부수상 겸 외무상을 맡았다. 1949년 박헌영은 수행비서 윤옥과 재혼했다. 휴전이 논의되던 1953년 3월 박헌영과 12명의 당 고위간부들이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혐의로 체포됐다. 모두 남쪽에서 월북한 혁명가들이었다. 김일성은 평양 주재 소련대사에게 "박헌영과 그 추종자들이 해방 직후부터 당내에서 '종파'를 구성해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전쟁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1955년 12월15일 박헌영은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김일성은 사헝을 집행하지 못했다. 소련공산당은 항의 방문단까지 보내고 박헌영의 소련 망명을 허용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소련은 내부 권력투쟁에 들어갔다. 조선노동당 내 김일성의 개인숭배에 반발하는 조직적 움직임이 일어나던 1956년 7월19일, 김일성은 박헌영 처형을 전격 지시했고 곧바로 집행했다. 윤옥과 어린 딸, 아들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박헌영은 마지막 출옥 직후 충청북도의 은신처에서 만난 젊은 농촌 여성 정순년과의 사이에 아들을 얻었다. 박헌영이 은신처를 옮긴 뒤 친정부모에게 끌려간 정순년은 강제로 목수와 결혼했다. 아기는 스님으로 성장했다. 

-주세죽은 1953년 박헌영의 체포기사를 프라우다에서 읽고 (박헌영의 체포가 딸에게 화를 미칠까봐 걱정돼) 삶을 기록한 공책을 '풋풋한 민중' 최길순에게 맡기고 모스크바행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각혈이 잦아 모스크바 역에 도착했을 때 몹시 지쳐 있었다. 딸의 아파트에 가까스로 도착해 문을 두들겼지만 심한 각혈과 함께 의식을 잃었다. 당시 딸 박영은 키에프로 공연을 떠나 모스크바에 없었다. 의식을 잠시 회복했지만 딸을 보지 못한 채 러시아인 사위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52세(1901년 함흥 태생). 아직 이른 나이였다. 러시아인 사위는 주세죽의 유해를 모스크바 공동묘지에 묻었다. 

소련정부는 1989년 3월 '스탈린이 저지른 박해사건의 희생자'로 주세죽과 김단야를 사면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91년 12월, 소련은 붕괴되고 소련공산당은 해체됐다. 2007년 8월15일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는 모스크바의 주러시아 대사관에서 주세죽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고인을 대신해 박헌영과의 사이에 난 딸 박영이 받았다. 박영은 "평생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어머니에게 뒤늦게나마 훈장을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며 눈물을 쏟았다. 무용예술가로 러시아인과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이룬 박영은, 1991년 대한민국을 처음 찾았다. 아버지 박헌영의 고향인 충남 예산 생가에서 흙 한줌을 떠 모스크바로 가져가 주세죽의 무덤에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