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김창희 동하(2013)
서울이 우리 역사에 처음 언급된 것은 935년. 왕건이 견훤에게 양주(楊州)를 식읍으로 하사함. 기득권을 가진 호족이 없었다는 말'.
-경종(976) 양주에서 전시과 처음 실시
-성종 2년(983) 전국의 직접통치를 위해 12목(牧)을 설치, 양주목
-문종 21년(1067) 한강 북부에 남경(南京) 설치
-숙종 양주 시찰(1099), 남경개창도감 설치(1101), 남경 행궁 완공 및 숙종 행차(1104)
동으로 대봉(응봉, 창덕궁 뒷산), 남으로 사리(광화문 네거리 황토현), 서로는 기봉(인왕산), 북으론 면악(북악)
*산지와 물길 등으로 둘러싸여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영역의 땅=국(局)
*터미널 뷰(Terminal View), 길 또는 건물 뒤편으로 멀리 지표(랜드마크)가 되는 산봉우리들이 보이는 경관.
-예종, 인종, 의종 잇달아 남경 행차
(1170 무신정권 수립, 1232 강화도 피난, 1270 개경 환도)
-1300년 경 남경에서 한양부로 격하
-선승의 경지, 삼산(삼각산) 북쪽 양수(한강과 임진강) 사이의 양주 회암사
@고려말 100년은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이 거의 일어나지 않은 공백기이지만, 시대 변화라는 관점에서 시간의 밀도가 아주 분명한 시기였다.
@길은 결코 빈 공간이 아니다. 발딛고 왕래하던 사람들의 체취와 주변 마을의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도시란, 물리적으로 아주 단순하게 보자면, 집과 길이 아닌가?
(...)역사가 오래된 길은 자글자글한 음식점들과 대로변에서 밀려난 점포들의 천국이다.
@길이 나고 건물이 앉을 때 그곳의 땅(위치, 지형, 고도, 방위 등)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그렇게 해서 어떤 경관을 얻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도시를 살필 때 기본이다. 그 땅과의 관계가 해명되면 놀랍게도 이런저런 유적들의 관계가 절로 해명되기 시작한다. 마치 직소 퍼즐이 어떤 단계를 넘으면 좌르르 단숨에 맞춰지는 것과 같다. 그것이 도시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개별유적에서 동네로, 동네에서 도시로 차츰 시야를 넓혀가는 것이다.
이렇게 땅을 파악하려면 하늘도 봐야 한다. 머리 위의 하늘을 보라는 말이 아니다. 가끔은 고개를 들어 지금 가고 있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살피라는 말이다. 묘하게도 옛 지혀을 찾고 옛길을 걷다보면 반드시 그 길의 저쪽 끝으로 하늘과 만나는 지점에 하나의 산봉우리갑 보이는 경우가 많다. 도시학에서 말하는 터미널 뷰의 일종인데, 그것은 그 길을 통해 가고자 하는 목표지점일 수도 있고 그 길의 방향성의 표시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 같이 지형이 복잡미묘한 곳에서는 특히 이런 일이 많다. 우리가 서울을 살필 때 그렇게 땅과 물길과 하늘의 관계를 더듬어 옛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당대의 시선'을 되찾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도 아파트에서 층과 호수를 잡을 때 전망을 따진다. 그때의 전망이란 무엇인가? 그저 시선 방향으로 막힌 데가 없이 잘 뚫려서 시원하다는 뜻인가? 저만치 앞으로 산이 보이니 혹은 한강이 보이니 좋다는 뜻인가? 요즘 우리가 얘기하는 전망에는 도대체 내용이 없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우리의 삶이 부동산 가치가 아닌 삶의 자리로서의 땅과의 관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 그렇게 '과거의 시선'을 확인함으로써 '미래의 도시'를 설계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바로 경복궁과 인왕산 사이에 자리잡은 서촌이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 상류지역이어서 '웃대'라고 불렸다. 지금의 청운동과 효자동 지역에서부터 덕수궁 인근까지 모두 합쳐 웃대라고 했다.
-조선시대의 건축 문법. 가급적 언덕에 기대 본채 또는 안채를 앉히던...
@조선시대 소설 '운영전' '수성궁몽유록'
“수성궁은 안평대군의 옛집으로 장안성 서쪽 인왕산 아래 있었다. 산천이 수려하고 용이 서리고 범이 일어나 앉은 듯 하며, 사직은 남쪽에 있고 경복궁이 동쪽에 있었다. 인왕산의 산맥이 굽이쳐 내려오다가 수성궁에 이르러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고, 비록 험준하지 않지만 올라가 내려다보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면으로 통한 길과 저자거리며 온 성안의 여러 집들이 바둑판 같고 하늘의 별 같아서 역력히 헤아릴 수 없고, 번화장려함을 이루 형용치 못하였다.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하여 구름 사이에 은은히 비치고 상서로운 구름과 맑은 안개가 항상 둘러 있어 아침저녁으로 고운 자태를 자랑하니 짐짓 별유천지 승지였다. 때의 술꾼들은 직접 가아와 적동을 동반하고 가서 놀았으며, 소인과 묵객은 삼월 화류시절과 구월 단풍철에 그 위에 올라 즐기고 음풍영월하며 경치를 즐기느라 돌아가기를 잊었다”
@안평대군은 상당히 독특한 시각의 소유자였다. 타고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세속을 멀리하고자 해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무계정사뿐 아니라 그 이전에 지은 비해당까지 모두 인간이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앵굴이 아니라 이렇게 북쪽의 경물(景物)을 올려다보는 앵글에 자리를 잡았다. 비해당 역시 인왕산과 북악산 너머로 북한산 보현봉과 문수봉이 아스라이 넘겨다 보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비해당과 보현봉을 잇는 시선과 무계정사와 보현봉을 잇는 시선은 거의 일치한다. 멀리 비해당에서 살짝 넘겨다 본 북한산 자락의 풍광을 보다 명료하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무계정사 터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안평의 앵글'을 재발견함으로써 그가 꾸던 꿈을 다시금 불러오고 오늘의 맥락 속에서 되새겨볼 수 있다면 안평의 비극은 새로운 지평을 획득할 수 있겠다. 그것이 역사를 당대의 시선과 공간 감각으로 재해석할 때 얻을 수 있는 소득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왕이될 운명을 타고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왕이된 인물들의 잠저를 돌아보던)영조의 행보는 당장은 과거로 향하고 있지만 사실은 미래를 향해 자신의 포부와 꿈을 거침없이 투사하는 고도의 기억정치였던 것이다.
-세종 때 도성 안의 가옥이 1만7000호 정도였다니 인구는 10만 명 남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 이후 20만명을 넘어서고, 영정도 때는 30만 명을 넘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추정이다.
-'경치가 좋다'는 말은 바로 그 장소의 자연 경관이 좋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곳에서 내다보는 경관이 훌륭하다는 뜻도 동시에 갖고 있다. 서촌 안팎의 동천들(백운동천, 청계동천, 백석동천, 도화동천)과 같이 폐쇄적인 아름다움이 전자의 사례라면, 동천의 뒷산 또는 언덕 위로 올라 내다보는 맞은편 어딘가의 아름다움은 후자의 예일 것이다. 한국 건축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차경(借景)이 같은 원리이고, '안평의 앵글'이 바로 그런 차경의 구체적인 사례가 되겠다.
-장동김씨의 세거지. 서촌의 '장동'은 장의동(壯義洞)으로 창의문 바로 안쪽 지역이었다. 창의문 밖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통일신라시대에 장의사(藏義寺)라는 큰 절이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창의문(彰義門)과 장의동 이름은 모두 장의사에서 유래했다고 판단된다. (...)고개 안쪽 동네가 궁정동 또는 장의동(장동)이다. 처음 자리 잡은 인물은 인조 때 충절의 상징이던 김상용-김상헌 형제의 증조부 대인 김영(1475~1528)-김번(1479~1544) 형제로 중종 대에 나란히 과거에 합격해 관직을 거쳤다. 김영은 퇴직 후청풍계에 초가를 짓고 은거했고, 김번 역시 만년에 청풍계 맞은편의 아래쪽 평지인 장의동에 20여년 거주했다. 김영-김번 형제의 할아버지인 김계권(?~1458)이 안동에서 서울로 처음 진출해 큰 가문과 통혼했다. 그의 사후 낙향했지만 맏아들인 학조(1432~?)가 세조~중종 대에 선승으로 크게 활약했다. 금강사 유점사의 중창, 가야산 해인사의 중수와 같은 대형 불사는 물론이고 해인사 대장경의 간인과 각종 불경 번역사업 등을 도맡다시피 했다.
*벼슬자리가 떨어지면 낙향하던 사림의 전통을 벗어나 서울에 세거하던 京華士族의 대표적인 사례.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과 원손 등을 수행해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성이 함락되자 성 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인물. 동생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에 맞서 끝까지 주전론을 폈고, 전쟁 이후에도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청나라의 출병 요청에 반대했다가 청에 압송돼 6년간 억류됐던 인물. 효종이 북벌을 추진할 때는 이념적 상징으로서 대로(大老)로 존경받았다. 김가진은 김상용의 12대손.
-(장혼)...옥류동의 형세는 덮은 듯이 서북쪽을 숨기고 입을 벌린 듯이 동남쪽이 트여 있다. 등 뒤로는 푸른 절벽의 늙은 소나무가 멀리 바라보이고 앞쪽으로는 도성의 즐비한 집들이 빼곡하게 내려다 보인다. 평평한 들판이 오른쪽에 얽혀 있고, 긴 산등성이가 왼쪽에 높이 들려 있어, 한 차례씩 오가며 마치 서로 지켜주는 것 같다. 그 가운데로 맑은 시내물이 흘러가는데 꼬리는 큰 시내에 서려 있고, 머리는 산골짜기에 닿아 있다... 기와와 백토 장식을 하지 않고, 기둥과 용마루를 크게 하지 않는다. 푸른 홰나무 한 그루를 문 앞에 심어 그늘을 드리우게 하고, 벽오동 한 그루를 문 앞에 심어 그늘을 드리우게 하고, 벽오동 한 그루를 사랑채에 심어 서쪽으로 달빛을 받아들이며, 포도넝쿨이 사랑채의 옆을 덮어 햇볕을 가리게 한다. 탱자나무 병풍 한 굽이를 바깥채 오른편에 심어 문을 가리고, 파초 한 그루를 그 왼편에 심어 빗소리를 듣는다.(...)
홀로 머물 때에는 낡은 거문고를 어루만지고 옛 책을 읽으면서 그 사이에 누웠다가 올려다보면 그만이고 마음이 내키면 나가서 산기슭을 걸어다니면 그만이다. 손님이 오면 술상을 차리게 하고 시를 읊으면 그만이고, 흥이 도도해지면 휘파람을 불고 노래를 부르면 그만이다. 배가 고프면 내 밥을 먹으면 그만이고, 목이 마르면 내 우물의 물을 마시면 그만이다. 추위와 더위에 따라 내 옷을 입으면 그만이고, 해가 지면 내 집에서 쉬면 그만이다. 비 오는 아침과 눈 내리는 낮, 저녁의 석양과 새벽의 달빛, 이같이 그윽한 삶의 신선 같은 정취를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어렵고, 말해주어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시종원경(도승지)였던 윤덕영은 순종 부인인 순정효황후 윤씨의 큰아버지였다. 동생 윤택영이 순종의 장인. 한일합방 때 이완용이 드러난 1인자였다면, 윤덕영은 막후의 1인자였다. 1910년 8월22일 '최후의 어전회의'를 앞두고 순종을 압박한 장본인이 바로 윤덕영이었다.
-우리 건축에서는 아무리 큰 주택이라 해도 이 집을 찾는 사람이 동구에 이르기 전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집을 자연 속에 온전히 숨긴 채 그 주인이 필요하면 뒷동산에 올라 주변 경관을 자기 가슴에 품어 안으면 그만이었다.
-김해경(이상, 1910~1937) 아버지가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통인동 154에 살던 큰아버지에게 입양됐다. 1929년 봄 경성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총독부 건축과에 취직해 현업을 하면서 그림('자화상'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을 그리는가 하면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장편소설 '12월12일'을 한 잡지에 연재하고 초기 시편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친구 구본웅의 고향 근처 배천온천에서 기생 금홍과 눈이 맞은 이상이 그를 서울로 데려와 종로1가에 다방 '제비'를 열 때 구본웅이 재정적으로 도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이상과 구본웅의 동행은 이상이 1936년 6월 구본웅의 나이 어린 이모 변동림(1916~2004)과 결혼한 사건이었다. 그 이듬해 이상이 일본 도쿄에서 숨지자 변동림이 이를 수습해 국내에 들여왔다. 이상의 마지막 길에 동행한 사람은 변동림이었다.
변동림은 이상이 죽고 몇해 지나 김환기 화백과 동거에 들어갔고 1944년 정식 결혼했다. 그는 변씨 집안과 인연을 끊겠다며 김향안으로 개명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 1946년 '좌익 3당'으로 불리던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탄생.
-낙랑클럽, 해방 후 모윤숙(호수돈고녀)이 조직한 미국인 상대 사교조직. 김수임(개성) 등이 참가했다.
-앨리스 현, 대대로 역관 집안이었던 현순(1878~1968)은 관립영어학교 출신. 1903년 두 번째 출발하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들을 태운 배에 통역자로 동행했다가 1907년 귀국했다. 그때 임신한 상태에서 동행했던 부인이 하와이에 도착한 지 두 달 뒤 앨리스 현을 낳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첫 한국계 미국인'(?)
-유현2(幽玄)「명사」 이치나 아취(雅趣)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그윽하며 미묘함
-유현6(遺賢)「명사」 벼슬을 아니 하고 초야(草野)에 묻혀 사는 어질고 총명한 사람.
평창동1 (0) | 2022.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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