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무기 공급에서 또 하나의 '금도'를 넘었다. 공격 무기의 수준을 높인 게 아니라, 수준을 낮춘 결정이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7일 우크라이나에 지원할 8억 달러 상당의 무기에 집속탄을 포함했다. 바이든은 7일 CNN방송 인터뷰에서 집속탄 제공이 "어려운 결정"이었다면서 "동맹 및 의회와 상의해 결정했다"라고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날 발표한 8억 달러 상당의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에 집속탄을 포함했다.
윤리적 비난 무릅쓴 바이든의 무리수
집속탄(cluster munition)은 2차대전 이후 주요 전쟁에서 사용된 낡은 폭탄이다. 하나의 포탄 안에 수십 개의 작은 폭탄이 적재돼 있다. 비행기에서 떨어뜨리거나, 대포로 발사하며 주로 광범위한 지역의 인명 살상용 또는 화재 발생용으로 쓰인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악명을 떨친 네이팜탄도 집속탄의 일종이다. 작은 폭탄의 2~40%는 불발탄으로 남아 지뢰가 된다. 길게는 수십년 동안 남아 민간인 피해를 입힌다. 전 세계 123개국이 사용과 제조, 보유, 이전을 금지한 '집속탄 관련 협약(CCM)'에 가입한 이유다. 바이든의 결정이 "루비콘강을 건넜다(AP통신)"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바이든은 집속탄 지원이 불가피한 이유로 두 가지를 꼽았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군이 겪는 만성적인 포탄 부족 때문이다. 바이든은 "미국이 155㎜ 곡사포 포탄을 충분히 생산할 때까지 과도기적으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인 독일과 캐나다, 스페인은 집속탄 제공에 반대 입장을 내보였다. 미국과 '특별 관계'인 영국의 리시 수낵 총리도 영국이 CCM 가입국임을 들어 불편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엔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집속탄 지원 여부는 각 국가가 결정할 문제"라며 사실상 동의했다.
바이든의 결정은 러시아의 침공을 유엔 헌장이 규정한 주권을 침해한 행위라면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선 법적, 윤리적 경계를 허문 것이다. 국제 협약을 무시함으로써 금지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해 3월 유엔에서 "러시아가 전장에 있어서는 안 될 집속탄과 진공폭탄(vacuum bomb)을 반입하고 있다"(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 유엔 미국대사)고 비난해온 그간의 입장을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 러시아가 개발한 진공폭탄은 '열압력탄'이라고도 불린다. 석유를 투하, 공기 중 산소를 없앰으로써 고온 폭발을 유발한다. 핵폭탄에 버금가는 위력을 낼 수 있어 '모든 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아직 러시아가 진공폭탄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이날 브리핑에서 집속탄 공급을 정당화하면서 "러시아군이 이미 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했지만,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설리번 보좌관은 "러시아군 집속탄은 불발률이 30~40%에 달하지만, 미군 집속탄은 2.5%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각국 언론은 미군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낡은 집속탄도 지원에 포함됐다"고 전한다.
미국의 위선은 CCM 가입국이 아니면서도 국내법으로 불발률 1%가 넘는 집속탄의 생산 및 사용, 이전을 금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설리번의 말대로 우크라이나 제공 폭탄의 불발율이 2.5%이라고 해도 국내 사용기준을 초과한다. 국내에서 금한 것을 우크라이나에 허용함으로써 이중, 삼중으로 비윤리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바이든은 무기 수출 제한과 관계없이 유사시 대통령이 원조를 결정할 수 있는 대외원조법 예외조항을 근거로 했다.
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모두 CCM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네바협정 상의 의무는 갖는다. 협정은 집속탄과 진공폭탄(pressure) 등의 민간인 상대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특정 포탄을 정확하게 적군을 향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또 그리 사용하더라도 작은 폭탄들이 지뢰로 남아 수십 년 동안 피해를 준다.
지금, 왜 집속탄일까
흥미로운 대목은 바이든 행정부가 국내외에서 제기될 윤리적 비난을 뻔히 알면서 왜 무리수를 두었는가 하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과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이 될 수 있다. 미국이 지난 6월부터 시작한 우크라이나의 반격전을 매우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어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난해 말부터 도네츠크주 바흐무트에서의 참호전을 제외하면 대규모 공세가 없었다.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미국과 나토가 제공한 탱크와 HIMARS(다연장로켓) 등 신무기를 동원해 회심의 ‘춘계 대공세’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여름이 다되어 시작한 춘계 공세다. 11~12일 나토 빌니우스 정상회의를 앞두고 집속탄 지원 결정이 내려진 것은 미국이 지금을 전쟁의 향방을 결정한 중요한 시점으로 잡고 있다는 말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지난달 28일 외교관계협회(CFR) 대담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우선 빌니우스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정치적, 실용적으로 강력한 지원 패키지가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는 우크라이나가 장기적으로 국방력을 개선해 러시아의 추후 공격에 대한 억제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난달 런던에서 열렸던 우크라이나 재건 회의에 다녀왔음을 언급했다.
재건 논의를 시작했다는 것은 미국이 전쟁 이후를 보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미국 조야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반격전에서 최대한 실지를 회복한 뒤 평화 협상에 나설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아무리 세계적이 수준의 무기와 전투력을 갖췄다고 해도 지난해 개전 이후 영토의 15%에 달하는 러시아의 점령지를 모두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2014년 러시아가 합병한 크림반도는 물론이다.
우크라이나가 이번 반격전에서 영토를 최대한 회복한다면 한국전쟁처럼 ‘지속가능한 정전’을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는 까닭이다. 관심은 언제 어떤 상태에서 정전협정을 시작하느냐다.
평화협정 준비의 시작?
지난 4월 누출된 미국 정보당국의 기밀문건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가 상당한 영토를 회복하거나 러시아군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기 전까지 평화협상을 시작할 가능성은 없다." 국방정보국(DIA)이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한 채 전쟁이 2024년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분석한 이유다(워싱턴 포스트). 바이든 행정부가 국제적인 비난을 무릅쓰고 우크라이나군이 조속히 전과를 내기를 바랬다면, 역으로 종전 단계의 첫 단계가 시작됐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집속탄 지원이 충분한 155㎜ 포탄을 확보할 때까지 ‘잠정 조치’라는 바이든의 말은 공허하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전 한달 1만 4000발이던 생산을 연말까지 9만 발로 늘릴 계획이다. 그러나 적정 비축량을 100% 채우려면 최소 5년이 걸릴 것으로 전망(워싱턴 포스트)된다. 한국산 포탄의 직접 지원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돼온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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