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미얀마. 한때 재건특수로 각국 정부·기업의 주목을 받았던 곳이다. 그러나 내전과 정세 불안, 거버넌스(통치기반)의 부족 탓에 신기루가 됐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국내 정치 리스크를 낮게 본 게 화근이었다. 전쟁은 시장을 파괴하지만, 시장은 폐허 속에서 다시 돈벌이에 베팅을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각국 정부‧기업이 노다지의 꿈을 꾸는 것 역시 큰 틀에서 같은 구조에서 진행된다. 자유와 민주주의, 유엔헌장에 따른 주권을 입에 올리지만, 죽음의 폐허 속에서도 주판알을 튕기는 '상혼(商魂)의 정치학'인 셈이다. 공급망 문제의 본질이 안보와 경제의 결합에 있다는 말이 나돌지만, 기실 정치외교는 늘 상혼과 붙어 다녔다. 대한민국은 대통령과 정부가 '노다지의 꿈'을 퍼뜨린다는 점에서 지극히 예외적일 뿐이다.
재건특수의 타당성을 짚는 방식은 고차함수가 아니다. 단순한 산수이다. 일단 재건특수가 2,000조 원이라는 용산 대통령실의 가설은 잊는 게 좋다. 과학적 근거가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유엔이 지난 3월 발표한 복구비용 4110억 달러(518조원)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보다 1.8배가 많은 7500억 달러(952조원)을 끌어들이려 경제기반을 일거에 높이려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문제는 돈이다. 서방 지도자들은 저마다 우크라이나에 지지와 연대를 표하고 지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필요액 대비 각국이 지난달 21~22일 영국 런던에서 열렸던 우크라이나 복구회의(URC)에서 약속한 지원 규모는 지극히 소박했다. 우크라이나와 EU, 주요 7개국(G7)이 공동주최한 행사였다.
이 회의에서 미국 13억 달러(인프라 현대화 비용 6억 5000만 달러 포함), 영국 2억 4000만 유로(긴급복구) 및 30억 유로(세계은행 대출 지원), 스위스 2027년까지 15억 스위스 프랑의 지원을 약속했다. 한국은 기획재정부가 지난 5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1억 3000만 달러를 발표했고, 지난 15~16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1억 5000만 달러를 거론했다.
가장 큰 손은 유럽이었다. 우르줄라 폰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런던 회의에서 2024년부터 4년 동안 500억 유로·545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170억 유로는 EU 예산 공여금이고, 나머지는 저금리 차관이다. 폰데어 라이엔의 약속은 두 가지 점에서 녹록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27개 회원국의 동의를 얻는 과정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어렵사리 EU 예산 사용 동의를 얻더라도 나머지 재원 마련이 여의치 않다. EU와 미국 등 각국 의회와 정부가 개전 이후 동결한 러시아 중앙은행 및 개인 자산을 눈독들이는 까닭이다.
미국과 EU 및 나토 회원국들이 동결한 러시아 자산은 3000억 달러를 웃돈다. EU 회원국들이 동결한 자산이 이중 2070억 유로(2170억 달러) 이상이며, 이와 별도로 300억 유로의 러시아 올리가르히(과두 재벌) 개인 자산도 동결해놓고 있다. 서방의 러시아 동결자산 논의는 지난 5월 19일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서 "동결 러시아 자산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끼친 피해를 배상할 때까지 계속 동결한다"고 발표한 게 신호탄이 됐다.
폰데어 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지난 6월 23일 여름휴가(8월) 전에 동결자산 활용방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상·하원은 6월 16일 역시 압류 러시아 국가 자산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쓸 수 있도록 하는 '우크라이나 재건경제번영기회(REPO)'법안을 상정했다. 러시아 동결자산을 마음대로 갖다 쓴다면 산수가 쉬워진다. 세계은행 추산 재건비용(4110억 달러)에서 1100억 달러만 조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러시아 동결자산 사용에 관한 한 정치인들은 대체로 적극적이고, 금융전문가들은 소극적이다.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지난 5월 EU 국가들이 압류한 러시아 자산을 우크라이나를 돕는 데 사용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그루슈코 러시아 외교차관은 보렐 대표의 주장은 "완전한 무법"이라면서 그대로 강행한다면 유럽이 큰 피해를 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크리스틴 라가데르 유럽 중앙은행(ECB) 은행장은 러시아 동결자산을 쓴다면 유로존의 금융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유로화의 신뢰를 실추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외환보유액으로 유로화를 선택한 국가들에 언젠가 러시아처럼 자산이 억류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주기 때문이다.
달러화를 보유외환으로 선택한 나라들에도 마찬가지의 불안을 줄 터.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출신인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 2월 동결 러시아 자산 활용이 "심각한 법적 장애물에 봉착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국가 간 투자를 보장한 법적 체계를 허무는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법을 만들더라도 소급적용이 안된다. 여기서 산수가 달러진다.
러시아 중앙은행 자산 역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자산을 압류하지 못하게 한 '주권 면제(sovereign immunity)' 원칙에 따라 불가능하다. EU가 지난 6월 29일 브뤼셀 정상회의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유다. "러시아 자산을 도둑질 한다는 불명예(알렉산데르 샬렌베르그 오스트리아 총리)"에 대한 거부감에서부터 "법적 쟁점의 해소(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등의 주장이 제기됐다.
파이낸셜 타임스와 블룸버그 통신 등에 따르면 EU가 막바지 검토하고 있는 안은 규모가 더 줄었다. 러시아 동결자산 자체를 전용하는 게 아니라, 동결자산 운용 수입에 세금(windfall profit tax)을 매기는 방식이다. 이 경우 한 해 30억 유로를 확보할 수 있다. 호화 요트를 비롯해 EU가 동결한 올리가르히의 사적 자산 역시 소유자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하거나, 침공으로부터 이득을 얻었다는 점을 입증해야 가능하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를 회피했다면 회피한 금액만 압류 대상이 된다. 이래저래 러시아 동결자산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자금은 줄어든다. 태산이 울린 뒤 쥐 한 마리가 지나가는 격이다.
런던 URC 회의는 △민간 주도 복구 △민간 투자 활성화를 위한 전쟁보험 체계 도입을 과제로 제시했다. 공적자금으로는 충당이 불가능하기에 민간기업의 투자를 유인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현재까지 러시아 동결자산을 전용한 나라는 우크라이나가 유일하다. 자국이 동결한 자산 7억 5000만 달러를 정부예산에 편입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이 불투명한 것처럼 우크라이나 재건 논의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중심이 돼 기업들에게 뛰어들 것을 권하고 있다. 기업들이 지정학적 리스크가 막대한 상황에서 투자를 결정한다면, 적은 파이일지언정 공적자금을 노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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