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이 성립되려면, 두 개의 탱고(Tango)가 필요하다." (10일, 토니 블링컨)
"탱고는 좋은 춤이지만, 미국인들은 어떻게 추는지 잘 모른다. 우크라이나는 (탱고보다) 고팍(Gopak) 추는 방법을 잊어선 안 된다. 모두가 어떤 방식으로든 바르이냐(Barynya)를 춰야 할 것이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카자촉(Kazachok)을 추는 것이다." (15일, 블라디미르 푸틴)
북·러 정상회담과 미·중 경쟁 탓에 그렇지 않아도 어수선한 국제정세 속에 미국과 러시아가 생뚱맞게 춤 타령을 했다. 말속에 뼈가 있는 간접 대화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두 개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다. '윤석열의 대한민국'도 결코 무관치 않은 에피소드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의 탱고 타령은 지난 10일 ABC방송 '디스위크' 인터뷰 도중에 나왔다. 블링컨은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에 관한 질문 끝에 '두 개의 탱고'로 전망을 펼쳤다. "지금까지 푸틴이 의미 있는 외교에 관심이 있다는 어떠한 신호도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 그가 관심을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는 아마도 가장 먼저 (협상에) 참여할 것이고, 미국이 뒤따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모두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원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영토적 통합성을 반영하는 지속 가능하고 정의로운 조건에서 끝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군의 무조건 철군과 크림반도를 포함해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 당시의 영토를 돌려줘야 한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여기서 교묘한 사실 왜곡이 있다. 푸틴 대통령은 평화협상에 이미 관심을 보인 정도가 아니라 협상이 타결 직전까지 갔던 사실을 슬쩍 빼놓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전쟁이 발발한 지 4일 만인 지난해 2월 28일 알렉산데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주선으로 처음 평화회담 탁자에 앉았다. 양측 대표단은 이날부터 3월 30일까지 7차례 온·오프라인에서 협상을 가졌다.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과 △러시아군의 이번 전쟁 점령지 철수(2014년 점령지 인정) △루한스크·도네츠크의 독립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포기 △탈군사화(중립국화) 등 주요 쟁점에 대해 17개 항의 합의문 초안도 마련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제안으로 나프탈리 베네트 전 이스라엘 총리가 조정역할을 수행했고 튀르키예도 거들었다. 벨라루스·이스라엘·튀르키예 등 3개국이 관여한 평화협상은 타결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보조를 맞춰온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4월 9일 키이우를 방문한 뒤 젤렌스키 대통령은 갑자기 협상 결렬을 발표했다. 러시아의 무력이 예상보다 약하다는 점을 간파한 미국과 영국은 지원을 약속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권했다는 게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각국 언론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공교롭게 러시아군이 철수한 부차에서 민간인 수백 명의 학살 의혹을 제기하는 사진이 공개된 것도 이즈음이다.
푸틴도 평화협상 결렬에 책임이 있다. 지난해 9월 초 드미트리 코자크 러시아 대통령실장이 우크라이나의 나토 불가입 선언과 러시아군의 전쟁 전 위치 철수를 맞바꾸는 타협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이번엔 푸틴이 9월 30일 주민투표를 통해 도네츠크·루한스크·헤르손·하르키우 등 우크라이나 4개 주 점령지를 러시아에 병합한다고 선언, 협상 여지를 없앴다. 전쟁이 장기화한 두 개의 날짜는 4월 9일과 9월 30일인 셈이다.
블링컨의 의도된 거짓말은 결국 미국이 당분간 전쟁을 종료할 어떠한 의지도 없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우크라이나군이 계속 이기고 있다는 젤렌스키 정부의 발표만 보면, 전쟁은 진즉 끝났어야 했다. 우크라이나가 6월 초 시작한 회심의 반격전이 여전히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푸틴 역시 전쟁의 장기화를 예고한다.
푸틴이 춤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난 15일 흑해변 소치에서 러시아를 실무방문한 루카셴코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 자리에서였다. 블링컨의 탱고 발언과 관련한 질문에 역시 춤으로 응수했다. 푸틴은 "탱고는 놀랍도록 멋진 음악과 아름다운 춤사위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탱고를 출 줄 모른다. 모든 것을 경제 제재나 금융 제한, 군사력 사용 위협 등 힘으로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자신들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모두를 가르치려 한다"고 덧붙였다. 러시아는 협상을 거부한 적이 없다면서 "다른 쪽이 (협상을) 원한다면, 직접 말해야 할 것"이라고도 되받았다.
평화회의를 주선했던 루카셴코가 곧바로 "협상을 깬 것은 블링컨과 오스틴(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라고 말한 까닭이다. 러시아와 벨라루스 대통령실이 각각 공개한 대화 내용이다.
푸틴이 춤에 관해 우크라이나에 던진 충고 역시 평소 러시아의 입장이다. '고팍'은 우크라이나 민속춤이다. "우크라이나가 고팍 추는 방법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면서 "안그러면 타인의 음악에, 타인의 음조에 맞춰 춤을 춰야 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미국과 서방을 등에 업고 다른 춤을 추고 있는 젤렌스키 정부를 조롱한 것이다.
푸틴이 언급한 '바르이냐'와 '카자촉'은 모두 러시아 민속춤이다. 다만 춤이 기원한 지방이 다르다. 바르이냐는 러시아 중부지방의 북쪽 춤이다. "모두가 정통 러시아 춤을 춰야 할 것"이라고 응수한 뒤 곧바로 모두가 함께 출 최상의 춤으로 카자촉을 제안했다. 카자촉은 러시아 민속춤이자 코사크 전통춤이다. 우크라이나 동부와 러시아 남부는 코사크의 땅.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권한 고팍 역시 우크라이나 코사크(자포리자 코사크)의 춤이다. 푸틴이 고팍과 바르이냐를 말하는 데 그쳤다면 굳이 주목할 게 아니었다. 마지막에 반전이 있었다. 탱고도 바르이냐도 아닌, 카자촉을 제안한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공감할 춤을 추자는 말로 읽힌다. 기자의 돌발질문에 답하는 짧은 순간 카자촉을 떠올린 내공이 눈에 띈다.
북한·러시아·벨라루스 삼국협력?
루카셴코는 푸틴과의 공동기자회견 자리에서 북한과의 삼국협력 이야기를 꺼냈다. 맥락은 생뚱맞다. 루카셴코는 회견 모두 발언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3일 방문한 보스토치니 우주기지는 자신도 지난해 찾았던 곳이라고 환기시켰다. 그러더니 "삼국 간 협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북한 사람들이 러시아와 협력에 큰 관심이 있고, 현존하는 문제들을 고려해볼 때 벨라루스가 할 일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푸틴은 루카셴코의 말에 어떠한 화답하지 않았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15일 브리핑에서 관련 질문을 받고 "나로선 그 삼국협력의 성격을 특정하기 어렵다. 행동 조건으로 어떻게 구현되는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서두에 미·러 간 춤 타령이 한국과 무관치 않다는 말을 꺼낸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무엇보다 푸틴처럼 분쟁의 상대방을 아우를 춤사위를 꺼내는 리더십을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두 번째 윤석열 정부 출범 뒤 외교 행보를 춤사위로 옮겨보자면, 한·미 간 탱고만 기억이 그득하기 때문이다. 8·18 캠프 데이비드 합의를 전후해서는 음악이 한·미·일 협주곡인 건 알겠는데 맞춤한 춤사위가 당최 떠오르지 않는다.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남북한이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흥겹게 출 춤이 무엇인지, 한반도 거주민이라면 누구나 안다.
현실은 늘 차갑다. 같은 날(15일), 동아시아 분단국에선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힘에 의한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대통령의 인천상륙작전 기념식 연설문이 나왔다. "모든 문제를 힘으로만 풀려고 한다"는 푸틴의 미국 비판론이 겹쳐 읽힌다. 아리랑의 선율을 잊고 누구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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