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관동군 토벌대의 대대적인 공세가 전개되면서 동북항일연군은 생사의 기로에 몰렸다. 그해 10월 23일 한 조선인 지휘관은 20명도 안 되는 대원들을 이끌고 조용히 소련 국경을 넘었다. 항일연군 병사들은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과 하바롭스크 동북쪽의 아무르강 변 뱌츠코예의 북야영으로 분산 수용됐다. 북한 건국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88여단의 시작이었다. 남야영에 배치된 조선인 지휘관은 훗날의 김일성 주석이었다.
2001년 러시아 방문에 나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전용열차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전 구간을 달렸다.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이르쿠츠크~노보시비르스크를 거쳐 모스크바까지 9200여㎞. 평양에서부터 따지면 1만 267㎞의 행로였다. 2002년에도 러시아 극동 하바롭스크의 산업시설을 시찰한 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2011년 방러 역시 전용열차는 극동의 선로를 달렸다. 북·러 접경 하산역에서 환영 행사를 했지만, 바이칼호 남쪽 울란우데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마지막 북·러 정상회담을 가졌다.
'극장 국가' 북한의 최대 공연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다시 선대의 행로를 되밟았다. '추억 정치'이자, '상징 정치'다. 북한 지도자들이 러시아 극동에 연연하는 것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추억 여행이 아니다. 북한 주민을 주 오디언스(청중)로 하는 대내용 여로다.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의 노정을 되밟으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앞선 지도자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현 정권의 정통성을 암시한다. 2012년 4월 최고 존엄으로 등극하면서부터 할아버지 머리 스타일로 상징 정치를 시작했던 그다.
북한의 상징 정치는 오래된 전통이다. 나라 같지 않은 나라였기에 일제 침략을 받았고, 김 주석의 항일 투쟁 덕에 해방을 맞았다는 게 서사구조의 얼개다. 김일성 주석의 이미지는 북한의 국가 만들기(nation building) 서사구조의 '뇌수'다. '최고 존엄'은 국가가 난국에 처하면 뇌수의 이미지를 소환한다. 북한 주민들은 늘 열광한다.
'극장 국가' 북한의 최대의 공연물은 바로 김 위원장이 직접 출연해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삼대의 서사를 주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중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극동과 시베리아는 이상적인 무대가 아닐 수 없다. 조선중앙통신이 기사와 사진으로 전한 김 위원장의 지난 10일 평양역 환송은 군 의장대와 당·정·군 지도부가 총동원된 거대한 행사였다. 그가 전용열차에 오르는 장면 자체가 북한에선 역사다. 13일 러시아 하산역에서 열린 환영식도 마찬가지다. 북·러 양국 육해공군 명예위병대와 군악대가 정렬한 가운데 연해주 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나서 환영하는 모습 역시 북한 주민을 오디언스로 한 공연물이었다.
전용열차에 올라 러시아 극동을 내달리는 북한의 오랜 서사구조가 이번에 달랐던 점은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특별출연'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변사 역할을 자임했다. 지난 4일 뉴욕타임스에 북·러 정상회담 및 높은 수준의 군사협력 사실을 흘린 뒤 다음 날 백악관·국무부·국방부가 총동원돼 사실성을 더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2차 북·러 정상회담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백악관이 언론플레이를 통해 각인시킨 '무기 거래'에 갇혀 있다. 미국은 북한제 포탄과 대탱크 미사일 등 낡은 무기의 이전이라는 1차원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북·러 정상회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러시아를 먼저 읽어야 한다. 북한의 행보는 오랜 상징 정치의 서사구조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13일 극동 아무르 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김 위원장을 만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김일성, 김정일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최종 목적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던 김정은 위원장의 이번 러시아 방문도 결국 '상징 정치'의 연장으로 읽어야 성격이 드러난다. 4년 전과 달리 이미 평양역에서 전용열차가 출발한 다음 날 북·러 양국이 발표함에 따라 정상회담 장소와 시일을 두고 극적 요소를 더했다.
2019년 '하노이 실패' 딛고 러시아 향한 여정
하산역을 통과한 전용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지나쳐 북상했다. 이번에도 하바롭스크 주 일대를 돌았다. 김정은 위원장의 상징 여로는 두 번째다. 김 주석의 행로를 따라 2019년 2월 말 평양에서 하노이까지 60시간 동안 4000여㎞를 되밟은 지 4년 만이다. 바로 김 주석이 1958년과 1964년 하노이를 방문할 때 코스였다. 다만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국제정세와 국내사정에서 전용열차에 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두 번째 정상회담에서 북한 주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손에 쥔 '보검'의 대가를 받아내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결과는 파국이었고, 다시 60시간을 열차에 실려 평양에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 김 위원장의 심중에는 어떤 복안이 담겼을까.
2019년 하노이행이 미국을 상대로 인민경제 발전의 도약판을 장만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엔 목표가 작아 보인다. 군사적, 전략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이 동북아에서 조성하고 있는 '블록 대 블록'의 신냉전 구조의 대항 협력체를 모색하는 한편, 경제적으로 러시아와의 협력 강화를 통한 활로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이 중시하는 무기 거래가 이뤄지더라도 북한 입장에서는 4년 전이나 지금이나 '활로 모색'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본다. 러시아가 북한에 제공할 것은 많다. 무엇보다 만성적인 에너지 및 식량난을 겪고 있는 북한에 단비가 될 수 있다.
러시아는 안보리 제재에 따라 2020년 10월 중단했던 대북 정제유 선적을 지난해 12월 재개했다. 지난 6월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에 따르면 러시아는 지금까지 6만 7000배럴을 보냈다. 김 위원장은 올해 푸틴에게 두 차례 축전을 보내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는 러시아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전해왔다. 미국이 승인한 유럽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F-16 전투기 제공을 두고 "미국산 전투기들의 착륙지점은 멸망의 수렁창뿐이다"(조선중앙통신 8월 28일)는 논평으로 앞장서 규탄했다.
7·15 키이우 "우크라 승전 기원"의 부메랑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지 3년 7개월이 지났다. 코로나19로 폐쇄했던 중·러와의 국경도 8월 들어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했다. 그사이 취임한 윤석열 정부는 한·미 동맹은 물론 한·미·일 군사협력에 전력했고, 8·18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 합의로 결실을 맺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진 뒤 미국이 주도한 대러시아 제재에 적극 동참하면서 러시아로부터 '비우호국' 리스트에 올랐다. 러시아에 대한 독자 제재도 가장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한편으로 '살상무기'를 제외한 군수물자를 포함해 우크라이나 지원을 늘렸다. 155㎜ 포탄을 비롯한 살상무기도 미국과 폴란드를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제공했다. 7·15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방문해 우크라이나의 승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윤석열의 한국'이 한·미, 한·미·일이 여러 차례 만나 대중, 대러 공세를 펼치고,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해 서방 편을 든 만큼 '김정은의 북한'이 방러를 시작으로 대응외교에 나선 것은 정해진 수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한·러 관계다. 러시아가 한국의 손을 놓고 북한과의 손을 잡는다면 동북아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더욱 위태로워진다. 역으로 북한이 새로 써나갈 '북방 서사'에는 이제 러시아가 포함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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