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중 러시아에 대한 비우호적 발언으로 러·한 관계에 심각한 손상을 가한 점에 주목했다. 불행히도 한국 정부는 억측과 추정에 기반한 대러 정책 수립을 선호하는 것 같아 유감이다. 이는 양국 협력 발전에 비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실망감을 자아낸다." (22일, 러시아 외교부)
"러시아가 북한과의 군사협력 움직임을 중단하고 안보리 결의를 준수할 것을 강력히 촉구했다. 우리 정부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며 우리 안보를 중대하게 위협하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국제사회와 공조하여 분명한 대가가 따르도록 강력히 대처해 나갈 것이며, 그와 같은 행위는 한·러 관계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19일, 한국 외교부)
한국과 러시아 외교부가 사흘 상간으로 각각 상대국 대사를 초치해 경고했다. 위는 22일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차관이 이도훈 주러 대사를 초치해 한 말이고, 아래는 19일 장호진 외교부 제1차관이 안드레이 쿨릭 주한 대사를 초치해 전달한 입장이다. 그 사이 윤 대통령의 AP통신 인터뷰와 20일 유엔 총회 연설이 있었다. 이달 초부터 한·러 간에 진행되는 상서롭지 못한 분위기를 반영하는 문안들이다. 1990년 국교를 맺고 이후 협력 분야를 넓혀온 한·러 관계는 이제 명백한 기로에 섰다. 서로 외교적인 절차를 밟아 점잖게 내놓은 발언들이지만, 실상은 양국 관계가 이제 '외교'가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상징한다.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나온 관련 발언은 명백한 사실에 근거한 게 아니었다. 단정과 가정을 토대로 말했다. 우선 "안보리 상임이사국(러시아)이 주권국가(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무기와 군수품을 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정권(북한)으로부터 지원받는 현실은 자기 모순적"이라고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은 팩트다. 그러나 러시아가 북한의 무기와 군수품을 지원받고 있다는 말은 단정이다. 국가 지도자가 그것도 유엔 총회 연단에서 미확인 사안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행위 역시 외교가 아니다. '독백'에 가깝다.
대통령은 이후 가정을 이어 나갔다. "북한이 러시아에 재래식 무기를 지원하는 대가로 대량살상무기(WMD) 능력 강화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얻게 된다면"이라고 전제한 뒤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도발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과 동맹, 우방국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문장 자체가 조건절이다. 북·러 간 군사협력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협력의 증거를 제시해야 했지만, 가정을 전제로 "좌시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대통령의 경고는 7·27 북한 전승절(정전협정 기념일)에 이뤄진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의 방북과 9·13 북·러 정상회담과 관련해 북·러 간 무기 거래 및 군사기술 지원이 포함됐을 것이라는 미국의 입장을 전제로 한 경고였다. 사실 확인이 된 사안이 아니다.
국가 간 갈등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논란으로 이어지기 쉽다. 올해 들어 한·러 관계가 멀어지게 된 굵직한 계기를 되짚어 보자면, 우크라이나 문제에서 출발해 한반도 문제로 귀결됐다. 주로 한국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한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국의 입장에서 러시아를 견제, 비난, 경고하는 발언과 행동을 계속해 왔다. 한국은 지난해부터 155㎜ 포탄 60만 발을 미국에 수출하고, 폴란드에 124억 달러 상당의 무기를 수출했다. 미국과 폴란드는 각각 한국 포탄·무기를 받는 대로 자신들의 비축 포탄 또는 낡은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건넸다. 대통령은 지난 4월 로이터통신 인터뷰에서 민간인 학살의 경우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겠다고 밝혔고, 7·15 키이우를 방문해 우크라이나의 승전을 기원했다. 그때마다 러시아는 "예의 주시하고 있다"는 메시지만 내놓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번 발언만은 그대로 넘기지 않았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이 19일 정례 브리핑에서 기자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내놓은 경고는 일종의 '외교 강의'였다. 인터뷰 시점은 대통령의 유엔 연설 전이었다. 대통령은 앞서 17일 AP통신에 "국제사회는 러·북 간 군사협력 심화에 더 촘촘하게 연합할 것"이라면서 유엔 연설과 비슷한 내용을 밝혔었다. 9·13 북·러 정상이 만나기 전부터 해온 말이기도 하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대통령의 발언이 "마땅치 않을 뿐 아니라 적절하지도 않다"고 일침을 놓았다. "우리는 이러한 반응이 매우 감정적이라고 본다. 한국이 여러 가지 소문과 추측에 귀 기울이기를 중단할 것은 촉구한다"라면서 "그처럼 부실한 근거를 토대로 한 성급한 결정은 양국 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러 관계가 "한국의 반러시아 제재 참여 및 한·미·일 삼각동맹의 일환으로 '확장 봉쇄'라는 미국 정책에 동참한 탓에 이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음"을 환기시키면서 이같이 말했다.
자하로바는 7·27 이후 북·러 간 외교와 관련해 "지난여름 러·북 간 모든 접촉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긴장을 줄이려는 것"이었다면서 "궁극적으로 한국 자체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기까지는 대통령 발언에 대한 공식 반응이었다. 자하로바가 그다음에 말한 것은 외교학 개론 강의에 가까웠다.
그는 "분명히 할 사안이 있거나 세부사항을 이중 확인할 필요가 있다면, 곧바로 마이크를 잡거나 신문기사에 의존하는 대신, 외교 경로를 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접촉과 정기적인 대화 기회 마련해 소통하는 게 외교"라면서 "그래야 누락 없이 신속하게 정보를 받고, 의견을 교환하며 관심 분야에 대한 질의와 응답이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어 "우리는 (한국과의) 견해와 접근(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과 대등한 대화에 늘 준비가 돼 있다. 상호 존중의 토대에서 질문에 답할 준비가 늘 돼 있다"고 말했다.
질문한 기자가 아닌,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말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한국 정부의 말과 행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경고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10월 27일 모스크바 발다이 클럽 회의에서 한국의 살상무기 지원을 관계 파탄의 경계로 지목한 뒤 거의 1년 만에 나온 공개 경고다. 그나마 절제된 외교 언어로 말했지만, 한국 대통령이 잇따라 내놓는 비우호적 언행에 대해 쐐기를 박은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러시아와 미국의 대리전으로 치러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총회 연단에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 중 누구도 북·러 간 군사협력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특히 북·러 정상회담이 군사협력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한국 정부의 추정은 백악관·국무부·국방부 등 바이든 행정부의 추정을 옮긴 것뿐이다. 분쟁의 당사국 지도자들조차 거론하지 않는 추정과 가정을 제3국 대통령이 유엔 총회 연설에서 발설한 것은 국가적 망신에 그치지 않는다. 자칫 한반도 안보를 위태롭게 만들 '업'을 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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