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국은 러시아에 어떤 것도 북한에 넘기지 말라고, 그러면 진짜 위험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러시아가 북한과의 가정적인 거래를 결정할 때 순진하게도 자신들의 의견을 고려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21일, 러시아 매체 '브즈그랴드' 논평)"
한국과 러시아는 결국 '헤어질 결심'을 하는 것일까. 9·13 북·러 정상회담과 9·19 윤석열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 이후 한·러 관계가 결코 상서롭지 못한 '문턱'을 넘고 있다. 러시아 측은 한국 외교부가 안드레이 쿨릭 주한 대사를 초치해 북·러 군사협력을 전제로 강력히 경고한 것에 상당한 불쾌감을 내보이고 있다. 컵에 담긴 물에 비유하자면, 한·러 관계는 지난 여름을 기준으로 넘치기 직전이었다. 여기에 윤 대통령의 유엔 연설이 흘러넘치게 할 마지막 물방울이 될 수 있다. 헤어질 조건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한국 이어 러시아도 헤어질 결심?
북한과의 무기 거래 및 군사기술 이전은 여러 개의 안보리 제재로 금지돼 있다.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말로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제재 준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이 열린 13일 로씨야 1TV 인터뷰에서 "몇 가지 제약이 있고, 러시아는 모든 제약을 준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북·러가 정상회담에서 "모든 방면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라면서도 "김 위원장 방문 기간 군사 관련을 포함, 어떠한 협의에도 서명하지 않았으며, 그럴 계획도 없다"고 확인했다.
푸틴과 크렘린궁 대변인이 나서 북·러 간 군사협력 가능성을 배제했음에도 한국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단에서 이를 기정사실화했다. 대통령의 같은 발언은 17일 AP통신 인터뷰에서도 나온바,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이를 "적절하지도, 마땅치도 않은 감정적인 반응"이라며 공개 반박했다. "지난여름 러·북 간 모든 접촉은 한반도 긴장을 높이기는커녕 낮추려는 것이었다"라고도 말했다.
이제 관심은 러시아의 '다음 행보'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까지 높은 수준의 협력을 확대해 온 한·러 관계의 미래다. 크렘린궁과 러시아 외교부의 공식 입장은 외교적인 표현이기에 실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럴 때 참고할 수 있는 건 러시아가 이전에 밝혔던 입장을 훑어보고, 러시아 언론의 반응을 살피는 게 방법이 될 수 있다.
양국 관계의 끝은 단교다. 그러나 단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관계를 격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와 관련, 러시아는 줄곧 한반도 문제에서 협력을 중단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었다.
거꾸로 가는 한반도 비핵화
북핵 문제가 불거진 뒤 러시아의 오랜 입장은 일관되게 비핵화를 토대로 동북아 다자간 안보 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전쟁 위기가 가파르게 진행되던 2017년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방안'을 발표하고 이를 유지해 왔다. 적어도 최근까지는 그렇다는 말이다. 러·중 정상은 지난 3월 30일 모스크바 정상회담 발표문에서도 공동방안을 거듭 확인했다. 공동방안은 1단계 한·미 연합훈련과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동시 중단(쌍중단), 2단계 비핵화 협상과 평화협정 협상의 동시 진행(쌍궤병행), 3단계 다자간 지역 안보 체제의 확립과 비핵화 협상 병행이다.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는 지난 4월 시민언론 <민들레> 인터뷰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공급한다면, "한반도 문제에서 러시아와 한국의 협력이 재검토 대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는 2000년대 초부터 진행됐던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한국 정부와 협력했다. 그러나 한반도 정세가 비핵화와 반대로 간다면 러시아가 할 긍정적인 역할은 없다. 러시아는 한·미와 한·미·일이 강화하고 있는 안보 협의를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을 높인다고 보고 있다. 한반도 주변 상황은 조 바이든 미 행정부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비핵화의 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안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의 '자산'이었던 러시아가 '부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만 놓고 안보를 고민하지만, 러시아는 지도를 더 넓게 읽는다. 특히 올해 들어 기왕의 북핵 문제에 더해 미국에 의해 동아시아의 핵 균형이 흔들리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지난 8월 7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던 제11차 핵확산금지조약(NPT) 재검토 회의 준비위원회 첫 세션에서 발표한 러시아 정부 성명을 뒤져볼 필요가 있다. 성명은 "미국이 비핵무기국인 한국을 자신들의 핵전략의 궤도로 끌어들임으로써 NPT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대통령은 한·미 동맹이 '핵 동맹'으로 격상됐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면서 7월 18일 미 전략핵잠함(SSBN) 켄터키함의 부산항 방문을 증거로 꼽았다. 이는 핵무기 보유국이 비핵무기국의 핵무기 개발·획득·제조·보유·운송·이전·사용을 어떤 형태로든 지원하지 않기로 한 2004년 안보리 결의 1540호 위반이라고 말했다.
"미 전략핵잠함 전개는 안보리 결의 위반"
핵무기를 적재한 SSBN의 방문은 4·26 한·미 '워싱턴 선언'에 따른 것으로 앞으로도 되풀이될 일이다. 한·미는 미국 핵우산 공약을 이행할 핵협의그룹(NCG)도 창설했다. 대통령은 26일 건군 제75주년 국군의 날 기념 식사에서도 캠프데이비드 한·미·일 협력체제와 워싱턴 선언 및 NCG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거듭 다짐했다. 비핵화 과정이 평화로 가는 길이라면, 그 반대 과정은 충돌로 가는 길이다. 평화시보다 지정학적 변곡점에 러시아와의 협의는 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한국이 앞장서 러시아와 엇나간다면 협력 여지는 없어진다. 윤 정부는 이러한 변화에 개의치 않는 게 분명하다.
한·러 관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전후해 30여 년 '친선 관계'에서 '비우호 관계'로 바뀌었다. 이제 '적대적 무시 관계'로 가는 양상이다. 크렘린궁과 러시아 외교부의 정제된 외교적 표현과 달리 러시아 언론은 더 선명하게 그 길을 제시한다. 서두에 소개한 '브즈그랴드(시각)'는 러시아에서 상당한 공신력을 인정받는 인터넷 신문이다. 비영리기구 '사회문제 전문가 연구원(EISI)'이 발행한다. 브즈그랴드의 드미트리 바븨린은 21일 '한국은 러시아에 대해 순진하게 행동했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러시아의 '다음 행보'를 가늠할 단서를 제공한다. ☞ 한글 번역본
논평은 19일 장호진 외교부 제1차관이 쿨릭 대사를 외교부로 불러들여 북·러 군사협력 중단을 요구한 것을 두고 "한국의 제스처는 격정적이었다. 순진하기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북한은 분명히 러시아 무기와 드론, 미사일, 핵기술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북한에 무기를 공급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한국은 순진하게도 러시아가 북한과의 가정적인 군사 협력을 결정할 때 순진하게도 자신들의 의견을 고려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짚었다. "러시아는 무엇보다 러시아의 국익과 실제적인 필요를 가장 먼저 고려할 것이고, 국제적 의무와 중국의 의견도 고려하겠지만, 한국의 의견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러 차관급 정책협의가 리트머스
바븨린은 "한국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대러시아 제재에 참여함으로써 러시아에 무언가를 요구할 도덕적 권리와 정치적 기회를 모두 잃었다"고 적었다. "미국을 향해 속국 태도를 보임으로써 행동의 자유를 잃었다"면서 "이는 진정한 주권과 자국 중심적인 정책이 없기 때문에 한국이 치러야 할 대가의 일부"라고 규정했다. "러시아와 서방의 분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더라도 러시아는 스스로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겠지만, 한국의 국익에는 거리낌이 없이 반할 것이다"라고도 내다봤다.
한국은 미국과 비자면제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지만, 러시와와는 체결했다. 바븨린은 이전의 한·러 관계에 대해 "높은 수준의 신뢰의 증거인 상호 비자 면제까지 한 우호적이고 생산적인 관계"라고 평가하면서도 "이러한 성공은 러·북의 비즈니스가 한국의 생존에 얼마나 위험할지에 대한 막연한 불확실성으로 대체됐다"고 진단했다. 한·러가 완전히 헤어지지 않더라도 상당 기간 냉담한 관계가 될 것을 예고한 대목이다.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은 조만간 한국을 방문, 양국 간 차관급 정책협의회를 가질 예정이다. 오래전부터 예정된 방문이자, 한국 정부가 북·러 간 협의 내용을 전달받을 기회다. 그러나 러시아 측에 군사 협력 여부를 물어보지도 않고 마이크부터 부여잡은 한국에 대해 과연 얼마나 설명할지 미지수다. 한·러 관계 변화의 흐름을 희미하게나마 가늠할 외교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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