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일종의 공격 또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신호가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우리는 이를 매우, 매우 자세히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지하고 있는 방어 태세는 그러한 위협에 맞서기에 적절하다." 1월 23일, 백악관 NSC 존 커비 전략소통조정관
"(김정은이 한국을 적대국이라면서 한미일을 핵무기로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말뿐이라고 보나, 아니면 진짜 전쟁이 있을 거라고 보나) 핵무기를 포함해 진전된 군사적 능력을 계속 추구하는 정권의 책임자한테서 나오는 말(레토릭)은 심각하게 봐야 한다. 우리는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말을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1월 19일, 존 커비 조정관
진실의 순간1, 북한의 ICBM 태평양 정상탄도 발사?
'만약(if)'을 앞세운 남북 지도자들의 말 싸움과 서해 포사격으로 시작한 2024년 첫 달이 지나간다. 지난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던 북한은 이번 달 순항미사일 발사를 이어갔다. 러시아 외교장관이 공개적으로 올해 한반도 분쟁을 우려했고, 미국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과 핵 전문가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김정은이 전쟁으로 가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고 진단했다. 그야말로 격동의 한 달이 지났다. 1월 한 달 동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와 국무부 브리핑을 한목에 훑어보았다. 국무부는 대화 제의를 앞세웠다.
"(북한의 서해 순항미사일 발사 관련,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보나?)북한의 의도에 관여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한발 물러서서 다시 말하건대 북한은 추가로 안정을 해치는 도발적 행동을 중단하고 외교로 복귀하길 촉구한다. 우리는 북한에 어떠한 적대적 의도가 없고 조건 없는 외교에 열려 있음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분명히 밝혀왔다."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하려면 어떤 특별한 대화가 가능한가?) 우리는 바이든 행정부 내내 같은 경로에 있다. 군사적인 위기관리는 물론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확인하기 위한 실질적인 토론에 참여할 의지가 있다." 24일, 베단트 파텔 국무부 부대변인
백악관과 국무부 브리핑의 한반도 관련 언급은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가자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묻혀 '한반도' 관련 언론의 질문 자체가 가물에 콩 나듯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의 잦은 최신 무기 실험과 북러 군사협력의 진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호전적인 발언에 대한 미 행정부 차원의 보도지침(PG)인 셈이다. 요약하면 "위협을 심각하게 본다. 하지만 한미일의 억제력이 감당하고 있다. 북한은 대화에 나오라"는 선을 넘어서지 않는다. 커비는 언론에 '위협의 심각성'을 강조했지만, 정작 미국은 북한 포탄·미사일의 러시아 지원을 주장할 때 더 진지함을 내보였다. 왜 그럴까.
미국은 말끝마다 동맹·우방과 한배에 타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기실 미국 관점에서 태평양 건너편의 위기지수와 미 본토의 위기지수는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이 일관되게 보여 온 위협 인식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피그미'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조지 부시 행정부가 대화에 나선 것은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였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대화로 선회한 것 역시 2017년 미국 본토에 도달 가능한 사거리 1만㎞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14형 시험발사가 성공한 뒤였다. 2017년 4월만 해도 "전쟁이 나도, 거기서 나지 여기서 나지 않는다"며 여유를 보였지만, 같은해 7월 막상 북한 미사일이 미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달라졌다. 2018년 1월 13일 아침, 하와이에서는 '(북한의) 탄도 미사일 공격 경보'가 잘못 발동돼 주민 대피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직접적인 해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미국이 아직 '위협'을 체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강·끝" 반복하는 한국, 대북 대화 제의하는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달 25일 한반도 위기설과 관련해 "미 행정부 기관들은 아직 북한이 전투 또는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구체적 신호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한 바 있다. 미국의 북한 전문가 로버트 칼린은 작년 11월 8일 김대중 도서관 강연·대담에서 "북한이 정상 탄도로 태평양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게 더 큰 우려일 거다. 미국에서 난리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면 그전까지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태세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국무부가 제의한 '전제 조건 없는 대화' 역시 메아리 없는 외침이다. 칼린은 미국이 말하는 '전제 조건 없는 대화'는 북한에 "낡은 화법(old talking point)"이라면서 북한은 자신들의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제재를 가해 온 미국 정책이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북한이 미국인들은 유용한 일을 할 것이라고 신뢰하지 않는데 왜 (대화 제의에) 긍정적으로 답하겠나"고 반문했다.
미국이 손을 놓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칼린과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가 지난 11일 자 '38노스'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억제력의 최면'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자멸을 각오하지 않는 한, 남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백악관과 국무부도 기회 있을 때마다 지난해 한미 정상의 '4·26 워싱턴 선언'과 한미일 8·18 캠프데이비드 정상회의 합의를 거론한다. 미국 언론이 전하는 행정부 당국자들의 발언에도 억제력에 대한 맹신이 엿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올해 상반기까지 증강된 한미 확장억제 체제를 완성하여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을 원천 봉쇄할 것"이라며 억제력에 기댔다. 그나마 미국은 한국처럼 강력한 대북 경고는 내놓지 않는다. 전략핵잠함(SSBN)과 전략폭격기 등 구체적인 무기 이름을 꺼내지도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1월 11일 국방부 업무보고에서 "우리가 공격당하면 100배, 1000배로 때릴 수 있는 대량응징보복(KMPR) 능력을 확고하게 구축하는 것이 공격을 막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작년 12월 28일 중부전선 육군 제5보병사단 방문 때는 "만약 적이 도발해 오면 '선조치, 후보고' 원칙 하에 즉각적이고 단호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16일 국무회의에서는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우리는 이를 몇 배로 응징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미국이 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시험발사와 서해 포사격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 가급적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과 확연히 다른 공격적인 접근이다.
진실의 순간2, 북한의 대남 도발?
한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때 미국이 가장 먼저 달려가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다. 확장억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다음 달려가는 나라는 중국이다. 북한 문제를 아웃소싱(위탁)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미중 경쟁구도에서 중국은 더 이상 미국의 중재 요구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는다. 지난달 26~27일 태국 방콕에서 있었던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 간 10여 시간 대화의 방점은 분명 한반도가 아니었다.
작년 11월 미중 정상 회담에서 다짐한 '샌프란시스코 비전'을 이행하기 위한 전략적 채널의 선용과 외교·군사·경제·재무·교역·기후변화에 관한 일련의 대화 채널을 확인하는 게 핵심 의제였다. 미국은 펜타닐(마약류) 통제 실무그룹 출범에 의미를 부여했고, 중국은 대만에 관한 불간섭 원칙을 강조했다. 바이든 행정부 고위당국자는 방콕 대화 뒤 컨퍼런스 콜(전화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최근 북한의 무기 시험과 북러 관계 발전, 그것이 김정은의 의도에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깊이 우려한다는 우려를 중국에 직접 제기했다. 북한에 분명 영향력을 유지하는 중국이 그 영향력을 (북한이) 비핵화 궤도로 복귀하는 데 사용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국 외교부는 "양측은 이 밖에 중동과 우크라이나, 한반도, 남중국해 등 국제적·지역적 현안을 논의했다"라는 한 문장 속에 '한반도'를 우겨넣었다.
미일만 바라보는 윤석열 정부는 러시아와 중국은 물론, 미국과의 외교적 대화에도 뒤처지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미중 '방콕 대화'를 전후해 한미 간에 어떤 수준에서 어떤 소통이 오갔느냐"는 <시민언론 민들레>의 질의에 "필요한 소통을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답했다. 미국과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의 외교적 수사로 들린다. 정상적인 외교였다면, 미중 전략대화 전, 후에 각각 우리의 의중을 전하고, 그 결과를 설명받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미일은 아예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백악관은 지난달 25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오는 4월 10일 워싱턴을 실무방문, 미일 동맹의 지속적인 힘과 미국의 대일 안보공약, 일본의 글로벌 리더십을 주제로 논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중 방콕 대화, 미일 4월 정상 회담
과거 미국의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유도했던 것은 북한이었다. 칼린·헤커의 분석대로 북한이 더 이상 대미 수교를 지상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미국을 겨냥한 '맞춤형 도발'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북한이 예측불허의 대남 도발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직접적으로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바이든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 대북 경고와 한미, 한미일 군사훈련을 통한 무력시위로 답할 공산이 크다. 우크라이나에 더해 가자사태와 후티 반군의 홍해 상선 공격과 미군 3명이 숨진 요르단 미군기지 공습 등 확전 조짐에 대응하기도 벅찬 처지이다. 미국 대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국제 이슈는 여전히 중동이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당선을 기정사실로 전제하지만, 한반도 안팎의 안보 상황은 11월 미국 대선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지금부터 10개월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안보 전문가들이 '김정은의 북한'과 '윤석열의 남한' 사이에 벌어지는 말의 전쟁과 북한의 도발 끝에 우발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 확산될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문제는 이번에도 미국과 한국을 모두 움직일 선택지를 북한이 갖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미국의 주의를 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모종의 전략적, 전술적 목적을 노린 도발이 예상된다. 태평양을 향한 ICBM 정상탄도 발사가 미국에 진실의 순간이 된다면, 대남 도발의 방법과 수위에 따라 한반도에 예상하지 못한 진실의 순간이 다가올 수 있다. '강 대 강' 대치를 이어가는 남북, 손 놓고 있는 미중, 관망하는 러시아가 조성하는 정세가 치명적인 칵테일이 되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첫 달을 보낸 2024년, 미세먼지가 꽉 찬 서울 하늘 처럼 잔뜩 흐린 한반도 안보 환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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