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인 집단이다." 31일, 윤석열 대통령
"노골적으로 왜곡된 말이라고 본다. 북한과 관련한 공격적인 계획들을 흐리기 위해 설계된 말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주변 정세에 비춰보면 특히 끔찍한 말이다." 2일,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
"러시아 측이 진실을 외면한 채 무조건적으로 북한을 감싸면서 일국 정상의 발언을 심히 무례한 언어로 비난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우며, 한러 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3일, 정병원 외교부 차관보
살얼음판 위 '뜀박질'
한러 관계가 살얼음판 위를 위태롭게 질주하고 있다. 2월 중 한러 관계의 '부정적 변곡점'을 앞두고 벌써부터 외교 분쟁 양상을 보인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대북 발언에 대한 러시아 외교부의 비판적 논평과 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엄중 항의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양국이 적극적으로 '외교 분쟁‘으로 가는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이다.
외교부는 3일 "정병원 외교부 차관보가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를 외교부로 초치해 전날 윤석열 대통령 발언에 대한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의 언급에 대해 엄중 항의했다"고 밝혔다. 정 차관보는 위와 같이 강한 유감을 전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주의 깊게 들었으며, 이를 본국 정부에 즉시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문제가 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제57차 중앙통합방위회의 모두 발언에서 "북한 정권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 선제 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적인 집단"이라고 말한 부분이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교부 대변인은 2일 이에 대한 기자 질의에 "노골적으로 왜곡된 말"이라면서 "그 말은 북한과 관련한 공격적인 계획들을 흐리기 위해 설계됐다"고 잘라 말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이어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과 주변 정세에 비춰보면 특히 끔찍한 말"이라고 강조했다. "한반도에는 긴장과 분쟁의 레벨이 계속 높아지고 있는데 이는 주로 미국과 한국, 일본을 포함한 그 동맹국들의 뻔뻔한 정책 때문"이라는 비난을 덧붙였다.
대통령은 "최근에는 러시아와 무기 거래를 하며 국제법과 유엔 안보리 결의를 대놓고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라고도 말했다. 자하로바는 그러나 질문을 벗어난 답변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러한 전략적 폭로를 지어낸 사람들은 한국의 미국 책임자(큐레이터)들이야말로 핵 선제타격(first strike) 가능성을 천명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면서 대통령 발언 중 핵 독트린과 관련한 실제로 관계의 오류를 지적했다. 정리하면, 자하로바의 말은 대통령의 발언의 사실관계(팩트)와 이에 대한 논평, 한반도 정세를 보는 러시아의 관점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우리 정부의 항의는 무례함에 대한 항의와 북한 편향성, 한러 관계에 미칠 악영향을 담았다. 외교부는 이날 오전 "일국 외교부 대변인 발언으로는 수준 이하로 무례하고 무지하며 편향돼 있다"고 지적했다. 자하로바가 비난의 근거로 제시한 사실관계 왜곡에 관한 반박은 담지 않았다. 정 차관보는 "러시아 측이 진실을 외면했다"고 지적했지만, 어떤 진실을 어떻게 외면했는 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미국은 NPR에 '선제사용' 명시
미국도 핵태세 검토(NPR) 보고서에 선제사용을 명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하로바의 지적은 틀린 게 아니다. NPR은 법이 아닌, 공문서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이 법에 규정한 유일한 국가"라는 대통령의 말 역시 틀린 건 아니다. NPR은 새 대통령 취임 뒤 발표한다. 그러나 법에 규정됐건, 공문서에 규정됐건, 유사시 실행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실제적인 차이는 없다.
북한이 2022년 9월 8일 제정한 핵무력법과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2022년 11월 8일 발표한 NPR 보고서는 핵무기 선제사용 의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핵무력법은 핵무기 사용 5대 조건으로 △국가의 중요 전략적 대상들에 대한 치명적인 군사적 공격이 감행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한 경우 △유사시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를 막고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상 필요가 불가피하게 제기되는 경우 △국가의 존립과 인민의 생명안전에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핵무기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조성되는 경우를 들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NPR 보고서는 핵무기 '선제불사용(No First Use)'과, 핵공격에 대해서만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유일목적 사용(SPU)' 원칙을 담지 않는 방식으로 선제사용을 공식화했다. 보고서는 "NFU와 SPU (폐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벌였지만, 적들의 비핵능력이 미국과 동맹, 우방에 '전략적 수준의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판단에 유지키로 했다"고 밝혔다. 중국은 NFU를 독트린에 담고 있고, 러시아는 2020년 6월 발표한 러시아의 '핵억제정책 기본원칙'에 '러시아의 핵심 정부, 군사시설이 공격당했을 때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원칙으로 핵무기의 방어적 사용 원칙을 담고 있다. 미국 대통령은 아예 핵무기 발사 단추가 담긴 '핵가방'을 든 요원을 상시 대동한다.
"한국은 미국 지정학 게임의 작은 협상 칩"
이번 외교 분쟁의 심각성은 핵무기 선제사용을 둘러싼 '진실게임'이나, 무례함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자하로바는 이날 언론 답변에서 러시아가 왜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 전략무기의 한반도 주변 전개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점을 들어 "이러한 근시안적인 접근이 도발적인 말(레토릭)에 반영돼 있다"면서 "한미가 이미 핵동맹 수준에 도달했다"는 대통령의 말을 '생생한 증거'로 제시했다. "한국은 미국의 지정학적 게임에서 '조그만 협상 칩(small bargaining chip)'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는가?"는 물음으로 답변을 끝맺었다.
러시아측의 이의 제기와 무관하게 북한을 '비이성적 집단'으로 규정한 대통령의 발언은 미국 주도 '확장억제'가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자인한 셈으로 또 다른 파장을 던진다. "국가 또는 지도자가 합리적 판단을 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 확장억제 논리와도 모순되기 때문"이다. (이병철 경남대 교수)
양국 관계 악화의 주요 변곡점을 앞두고 감정싸움 양상을 보이는 것 역시 나쁜 조짐이다. 바로 2월 중 한국의 대러시아 3차 제재 공시와 이에 대한 러시아의 보복 조치가 예고돼 있기 때문이다. 그 전개 과정도 지극히 상서롭지 못했다.
러시아는 한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 동참 △2차례의 독자 제재 △대우크라 군수물자 지원 및 미국, 폴란드를 우회한 살상무기(포탄) 우회 지원 △윤석열 대통령의 작년 7월 15일 키이우 방문 및 우크라의 승전 기원 등의 악재에도 한국과의 경제협력 재개를 꾸준히 희망해 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12월 4일 이도훈 주러 신임 대사에게 신임장을 주면서 "양국의 협력이 양국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파트너 관계의 궤도로 복귀할지는 한국에 달려 있다"면서 관계 개선 기대를 내보였다. 한국의 반응은 웃는 낯에 침을 뱉는 격이었다.
러 루덴코 외교차관 2일 비공개 방문
12월 26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대러시아 수출통제 품목을 682개 추가, 총 1480개로 확대하는 3차 제재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2월 중 공시된다. 자하로바는 다음날 브리핑에서 "미국의 지령에 따른 비우호적 행동"이라면서 한국 측의 제재가 공시되는 즈음에 보복 조치가 있을 것을 시사했다. 그는 "(보복 조치가) 굳이 대칭적일 필요가 없으니, 한국은 놀라지 말라'고 말해 정치, 군사적 비대칭 조치일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작년 9·13 북러 보스토치니 정상회담 뒤 5개월째 지체된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부 아태 담당 차관보는 2일 방한, 우여곡절 끝에 양국 간 대면 소통이 이뤄졌다. 루덴코 차관은 김홍균 외교부 1차관을 예방하고 김건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한러 북핵 수석대표 회담을 가졌다. 정병원 차관보와 양자 협의도 했다. 외교부는 4일 자 보도자료를 통해 "러북 군사협력에 대한 엄중한 입장을 전달하고, 러시아 측의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내 우리 국민과 기업의 정당한 권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협조도 당부했다. 외교부는 "북핵 관련 소통을 지속하는 것이 한러 양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데 공감을 했다"고 전했다.
앞서 정 차관보가 3일 지노비예프 대사를 초치해 항의를 전달한 것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한 것이었기에 외교 관행 상 방한 중이던 루덴코 차관보는 관여시키지 않았다. 한러 차관급 협의를 사전에 공개하지 않은 것은 상호 합의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부터 잊을만하면, 러시아를 자극하는 언행을 내놓고, 외교부는 적극적인 대러 외교와 거리를 두면서 30여 년 양국이 울력으로 일궈왔던 관계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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