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톨레랑스의 프랑스'가 어쩌다가... 극우 국민연합(RN) 총선 1차 투표 압승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4. 7. 2. 18:37

본문

30일 프랑스 총선 1차 투표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 국민연합(RN)의 정당연합이 선거구 577곳 중 297곳에서 1위를 차지했다. 득표율로 보면 RN이 33.1%, 좌파연합 신인민전선(NFP) 28%,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중도 연합 앙상블 20%였다.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RN이 원내 제1당이 되는 건 기정사실. 관심은 오는 7일 결선투표에서 하원(국민의회) 과반수를 확보하느냐다.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가 어떤 경로를 거쳐 극우 포퓰리즘의 나라로 변모했는지, 극우의 프랑스가 유럽정치와 세계 정세에 줄 영향은 무엇인지, 그 변화 과정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는 무엇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민연합(RN) 전 대표이지 실질적인 지도자인 장 마리 르펜이 30일 선거 결과가 나온 뒤 프랑스 북부 에냉-보몽 지역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단 앞에는 '정권교체 시작되다'라는 말을 적어 놓았다. 2024.6.30. AFP 연합뉴스

눈에 확 띄었다. 집주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한여름에 정장 차림으로 파리 시내를 누빈 지 한 달쯤 됐을까. 유네스코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깔끔한 아파트를 발견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진 주인 여자분은 교양이 있어 보이는 후덕한 인상. 입주를 허락했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 "미안하다. 남편의 반대로 계약하지 못하게 됐다"라는 전화를 걸어왔다. 바깥주인이 외국인 세입자를 원치 않는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부동산 중개인은 묻지도 않았는데 바깥주인이 "쥬이프(juif, 유대인)"라고 귀띔했다. 차별받는 사람으로부터 다시 차별받은 첫 경험이 꽤 아렸다. 안주인은 동양인 젊은 부부가 안쓰러웠는지 며칠 뒤 소설책 한 권을 소포로 부치면서 짧은 손 편지를 동봉했다. "정말 미안하다. 좋은 집 얻기를 원한다."

밀레니엄 전후의 이야기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해 지급 능력 증빙을 갖춰도 한국인의 신용에 의심이 많던 시절이다. 그런데 요즘엔 파리에서 집 얻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말이 들린다. 월세가 오르기도 했지만, 프랑스 사회 안에 저변이 확대된 인종주의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30일 국민연합(RN)이 초강세를 보인 프랑스 총선 1차 투표 결과가 다소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인종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 RN의 대승이었다. 전체 577개 선거구에서 1위를 차지한 정당연합은 국민연합 주도 정당연합(LR-RN) 297곳, 좌파의 신인민전선(NFP) 159곳, 중도 앙상블(ENS) 70곳이다. 중도우파 공화주의자들(LR)은 20곳, NFP에 들어오지 않은 좌파 12곳, 우파 8곳 등이다. 앙상블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집권 여당, 르네상스가 포함된 정당연합이다. 득표율로 보면 RN 33.1%, NFP 28%, 앙상블 20%, LR 6.7%로 RN은 제1위 정당이되 득표율은 3분의 1에 머문다.

30일 프랑스 총선 1차 투표 결과. 577개 투표구에서 1위를 차지한 정당의 상징색으로 표시한 지도다. 밤색의 국민연합(RN)이 전국을 덮고 있다. 노랑색은 중도연합 앙상블, 보라색은 좌파연합 신인민전선(NFP), 파란색은 중도우파 공화주의자들(LR)이다. 분홍색을 비슷한 다른 색은 득표수에 따라 배색한 결과다. 2024.7.1. 출처 르몽드

각종 여론조사에 따르면 RN은 오는 7일 결선투표에서 240~270석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7석(2017)→89석(2022)에 이은 눈부신 성장이다. 이제 관심은 RN이 과반의석(289석)을 넘길지다. 1차 투표 1위 정당을 색으로 표시한 지도는 프랑스를 온통 RN의 밤색으로 물들였다. 2022년 총선에서 249석을 얻었던 앙상블의 패배는 디폴트다. NFP는 기존 149석에서 약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수준.

1차 투표로 당선자를 낸 곳은 RN 40곳, NFP 32곳, 앙상블 4곳, LR 1곳 등 80곳에 이른다. RN의 실질적 지도자인 마린 르펜도 거뜬하게 당선됐다. 2022년 총선 1차 투표 당선자가 5명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유권자들의 선택이 뚜렷해진 증좌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를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트럼프 지지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샤이(shy) 트럼프'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RN 지도자인 마린 르펜을 은근히 지지하던 유권자들이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셈이다. 막 드러냄과 덜 드러냄의 차이는 적지 않다. 이제 미국이건, 프랑스이건 극우 포퓰리스트를 지지하는 이들은 더 이상 샤이하지 않다.

총선 1차 투표의 의미는 단순히 2년 전까지만 해도 원내 제1당이던 마크롱의 르네상스가 몰락하고, RN이 비상한 정치적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마린 르펜이 내세운 RN의 젊은 대표 조르당 바르델라 총리(29)의 등극 가능성은 부수적인 결과일 뿐이다. 넓게 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가장 큰 변화의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랑스는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의 원조 국가. 혁명 뒤 100년은 좌파의 적색테러와 우파의 백색테러가 갈마든 폭력의 시대였고, 이후는 중도좌파와 중도우파가 타협의 정치의 시간이었다. 엎치락뒤치락했지만 1958년 샤를 드골이 창립한 제5공화국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온 역사다. 중도 좌·우파의 타협 과정은 극좌와 극우를 배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번 총선은 그 패러다임을 깼다. 결선투표까지 남은 변수는 두 가지. 공화주의 전통과 선거구별 결선 구도이다. 

극좌 포퓰리즘 정당 불굴의 프랑스의 대표인 장뤼크 멜랑숑이 30일 파리 시내 공화국광장에서 열린 국민연합 반대 집회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가 주도한 좌파연합 신인민전선은 2위를 차지했다. 2024.6.30. AP 연합뉴스

1차 투표에서 등록유권자의 25% 이상(또는 당일 투표수의 50% 이상)을 득표한 후보는 당선이 확정된다. 최종당선자는 25%를 득표하지 못한 상위 2명의 후보와 3위이지만, 12.5% 이상을 득표한 후보들이 오는 7일 벌일 양자 또는 삼자 간 결선투표에서 확정된다.

2002년 대선 결선투표에 진출했던 RN 전신 국민전선(FN)의 창설자 장마리 르펜과 2017, 2022년 대선에 잇달아 결선에 나갔던 그의 딸 마린 르펜의 승리를 좌절시킨 공화주의 전통이다. 좌파와 우파는 1차 투표에서 치열하게 싸우되 2차 투표에서는 극우 후보의 낙선에 힘을 모았다. 대선이건 총선이건 1차 투표에서 탈락한 후보는 지지자들에게 2차 투표 지지후보를 밝히는 전통에 "극우만은 안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두 번째는 결선투표의 구도이다. 1일 BFM TV의 집계에 따르면 극우 RN와 좌파 NFP의 양자 대결 선거구가 64곳, RN과 앙상블의 양자 대결 선거구가 29곳이다. NFP와 앙상불의 양자 대결 선거구는 26곳. 관건은 226개에 달하는 RN-NFP-앙상블의 삼각구도 선거구다. 마크롱 대통령은 1차 투표의 윤곽이 잡힌 30일 밤 언론 성명에서 "RN에 직면해서 민주주의자와 공화주의자의 대규모 연합이 필요한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NFP의 핵심 정당인 '불굴의 프랑스(LFI)' 지도자 장뤼크 멜랑숑도 RN에 맞선 연합의지를 내세웠다. NFP-앙상블의 연합에 따라 RN의 의석수가 상당수 줄어들 가능성은 남아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0일 프랑스 북부 투켓 선거구에서 부인 브리지트와 함께 투표를 하고 있다. 2년 만에 국민의회(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한 그의 결정은 패착이 됐다. 집권여당 연합 앙상블은 원내 제1당에서 제3당으로 전락이 확실시된다. 2024.6.30. AFP 연합뉴스

그러나 2022년 대선에서 마린 르펜의 높은 득표율(41%)은 반파시스트, 반극우 포퓰리즘 연대마저 엷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RN-NFP-우파의 삼각구도 선거구(44곳)는 RN에 넘어갈 가능성이 상당하다. 중도우파 공화주의자들(LR)이 지지자들에게 결선투표 지침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지자의 상당수가 RN으로 갈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마린 르펜의 지도하에 급속히 성장한 RN은 정치적 필요에 따라 반유대주의를 청산하는 등 인종주의 탈색을 했지만, 본질은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다. 이민, 특히 무슬림 이민 축소, 출생지에 따라 국적을 부여하는 속지주의의 폐지, 서민 구매력 증대를 위한 에너지 부가세 인하, 기본 생필품 부가세 폐지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RN이 꿈꾸는 프랑스의 정체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톨레랑스의 나라가 아니다. 반무슬림, 기독교 전통에 충실한 '프랑스 퍼스트(La France d'abord)' 국가이다.

밀레니엄 무렵 외국인에게 집을 세놓지 않았던 바깥주인은 예외적인 파리지앵이었다. 남편과 달리 안타까움을 표했던 안주인이 평범한 시민이었다. 20여 년의 세월은 파리에서 예외적 시민이 표준이 되고, 표준이 예외가 되는 시간이었다. 이번 총선은 그 분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극우의 부상을 경고하겠다면서 국민의회를 해산한 마크롱의 결정은 자충수가 됐다. 

프랑스 좌파-중도 '공화주의 연대'로 극우 정부 출범 막았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