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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의 권토중래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로 돌려놓겠다"

시민언론 민들레(Dentdelion)

by gino's 2024. 7. 6.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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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냈다. 여러분이 선거 운동을 했고, 투쟁했으며, 투표를 했다. 변화는 이제 시작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노동당을 바꾸려는 지난 4년 반 동안의 노력은 바로 이걸 위해서였다. 바뀐 노동당은 국가에 봉사할 준비가 됐다. '희망의 햇살'이 다시 영국을 비춘다. 일하는 사람들(working people)을 섬기는 나라로 돌려놓겠다." (키어 스타머 영국 노동당 대표 총선 승리연설)

5일 영국 노동당 누리집. 2024.7.5. 시민언론 민들레

5년 만에 지하실에서 '옥상'으로 

4일 영국 총선에서 회생할 수 없어 보였던 노동당이 중원에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2010년 총선 패배로 보수당에 정권을 내준 뒤 14년 만의 복귀다. 스타머 대표는 말뜻 그대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권토중래(捲土重來)한 것이다. 극우 포퓰리즘 국민연합(RN)이 집권을 앞두고 있는 도버해협(프랑스명 라망슈) 건너 프랑스 정치 지형과 정반대다. 

프랑스는 30일 총선 1차 투표에서 RN이 전체 선거구 577곳 가운데 297곳에서 1위를 차지한 채 오는 7일 결선투표를 치른다. 영국과 프랑스 총선은 유럽 중도좌파 정당의 성공적 변신과, 끝없는 추락을 각각 대표하는 결과를 낳았다. 나라마다 정치 문화는 사뭇 다르다. 그러나 '민(民)의 뜻'에 수렴하는 정파가 대세를 장악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한 정파의 득세는 다른 정파의 몰락을 되비치는 거울이다.

노동당 성공의 출발점은 실패의 밑바닥이었다. 노동당이 야당으로 전락한 건 고든 브라운 총리가 데이비드 캐머런의 보수당에 패배한 2010년 총선부터다. 유럽연합 탈퇴(Brexit) 국민투표 4년 뒤인 2019년 총선에서 203석에 그쳐 보수당(365석)에 대패하고 나서야 제레비 코빈 대표를 경질했다. 당시 국민적 관심이었던 브렉시트에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는 어정쩡한 태도가 결정적인 패인으로 꼽혔다. 이번 총선에선 하원 전체 650석 중 648석의 결과가 확정된 5일 현재 411석을 얻어 보수당(121)과 자민당(71)을 제쳤다. 

영국 노동당의 '번화의 첫걸음'으로 약속한 6대 공약. 노동당 누리집. 2024.7.5. 시민언론 민들레

2020년 당권을 장악한 스타머 대표(61)는 당의 또 다른 변색을 주도했다. 1997년 토니 블레어가 생산수단의 공유화라는 당규약 4조를 폐지하는 '제3의 길'로 레드를 핑크로 바꿨다면, 스타머는 녹색 물감을 풀었다. 이념적 좌파를 당 지도부에서 제외하고 더 중도적인 인물을 앉혔다. 당대표 4년 반은 유권자들에게 노동당이 변할 수 있고, 변하고 있으며, 더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과정이었다. 물감을 풀었을지언정 노동자, 서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본색을 버리지는 않았다.

'키어, 가자(Kier we go)'

스타머가 당대표로 추구해 온 변화는 노동당이 이번 총선에서 '변화의 첫걸음'으로 약속한 6대 공약에 담겨 있다. 우선 경제적 안정을 강조하고, 국민보건서비스(NHS)의 환자 대기시간 축소, 불법이민 문제를 다룰 '국경안전사령부(BSC)' 창설, 치안 강화를 위한 반사회 행동 불용, 아동 교육 강화를 위해 6500명의 교사 증원 등은 생활밀착형 공약들이다. 기후변화의 시대적 이슈를 영국의 도약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복안을 4번째 공약인 국영 청정에너지 기업, 영국에너지(GBE)의 설립에 담겨 있다. 석유와 가스 거대기업들로부터 횡재세를 거둬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한편 청정에너지를 확대할 재원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스타머는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이 '적록(red-green)'이라는 평가에 동의한다.

제1공약인 경제적 안정은 노동당식 성장정책이다.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기업과 새로운 파트너십을 강조하지만, 노동자의 권리를 강화한 '노동자 뉴딜 정책'의 전제가 달려 있다. 자본이득세와 상속세를 올려 공공부문 예산에 투입할 계획이다. 교사 충원 재원은 사립학교 세제 혜택을 중단해 마련할 방침이다. 의원내각제에서 집권당의 공약은 곧바로 법제화된다. 스타머 내각은 5일 출범한다. 

키어 스타머 영국 노동당 대표가 5일 총선 압승 뒤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열린 승리 자축연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2024.7.5. 로이터 연합뉴스

총선 승리 정당의 성공 요인은 패배 정당의 실패 요인 덕에 두 배의 효과를 낸다. 보수당은 브렉시트와 코로나19 이후 닥쳐온 물가인상과 민생경제의 파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리치 수낵 총리를 비롯한 보수당 지도부의 잇단 도박 스캔들과 맞물려 상승효과를 더했다. 최근 2년 동안 노동당 지지율은 보수당에 비해 20% 정도 높았다. 황색저널리즘은 민심의 변화를 읽는 데 신속했다. 2005년 이후 처음으로 노동당을 지지한 루퍼트 머독의 선(The Sun)은 총선 뒤 '영국은 레드(노동당)를 본다(Britain sees red)'라는 헤드라인을 달았고, 데일리 미러는 스타머의 이름(Keir)에 착안해 '키어, 가자(Kier we go)'라고 적었다. '이제, 가자(Here we go)'의 변용이다.

브리통 퍼스트

여전히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을 표방하지만, 노동당은 스타머 당대표 이후 꾸준히 변해왔다. 스타머는 노동당 내 '선명한 좌파(old left)'의 대항 세력인 '덜 선명한 좌파(soft left)'로 꼽힌다. 스스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지만, 당대표가 된 뒤 어떠한 이데올로기보다 코로나19 이후 악화한 경제 상황에 '적응'을 더 중시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한 BBC 인터뷰에서는 "사회주의자이자, 진보주의자를 자처한다"라면서도 그보다는 "국가를 앞세우고 당을 후순위로 두는(country first, party second) 사람"을 자처했다. 

좌파성을 덜어낸 스타머의 입장은 이민 정책 및 대외정책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국경 통제와 이민 정책은 도널드 트럼프의 정책과 마린 르펜의 프랑스 극루 포퓰리즘 국민연합과 비슷한 점이 많다. 그는 불법 이민은 물론, 합법이민도 줄일 것을 다짐하면서 "믿어달라, 나에게 다우닝가 10번지(총리 관저) 열쇠를 준다면 이민자 수를 줄이겠다"면서 "국경통제를 강화하고, 영국 기업들이 영국인을 먼저 고용하도록(Britain first) 하겠다"고 약속했다. 유럽연합(EU)에 복귀하지 않겠다는 방침도 분명히 하고 있다.  EU와 협조하면서 혼란에 대처하겠지만, EU에 돌아가지는 않겠다는 말이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5일 영국 북부 리치몬드에서 총선 결과 발표를 기다리면서 눈을 감고 있다. 노동당의 압승으로 보수당의 14년 집권은 끝났다. 2024.7.5. AFP 연합뉴스

보수당 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 노선도 계승할 계획이다. 그는 우크라의 영토 완정을 지지하면서, 러시아를 유럽과 영국에 대한 위협으로 평가하고 있다. 가자지구 사태에 대해서도 하마스의 테러를 비난하고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영국 내에서 확산되는 반유대주의에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한다면 영미 간 '찰떡 공조'가 계속될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트럼프가 당선되면, 영미 간의 마찰이 불가피해 보인다.

총선 패배 하루 뒤인 5일 런던 다우닝가 11번지의 관저를 떠나는 제레미 헌트 재무장관 일가족. 바로 옆의 10번지가 총리 관저다. 2024.7.5.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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