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보던 감시의 시선, 불법사찰, 압수수색, 지옥 같았던 수사와 기소, 재판….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나는 물론, 가족과 주변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나. 사법부에 깊이 감사드린다. 세상을 탓할 생각은 없다.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이다. 어차피 멈춘 적이 없는 길. '공'은 분계선도, 국경도 넘을 수 있다. 앞으로도!"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65)이 지난달 16일 수원지법 항소심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불법사찰부터 시작해 17년을 끌어온 사건이다. 의외로 그의 소감은 덤덤했다. 홀가분함과 설렘이 섞여 있다. 판결 다음 날 서울 마포구 신수동 한 음식점에서 그를 만났다. 이후 여러 번 온·오프라인에서 나눈 이야기를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한다. 국보법 제7조 제1항(찬양·고무)의 문제와 함께 20여 년간 그가 교류협력에서 체득한 교훈, 이를 토대로 남북관계의 '폐허'에서 다시 일어날 방안을 모색하는 데 긴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우선 지난 17년 동안 진행된 '대한민국 대 김경성'의 다툼을 중심으로 그의 역경을 짚어본다.
"앞으로 피곤한 일, 많이 생길 거다"
2004년부터 북한 4.25 체육단과 교류를 시작했다. 굵직한 역할로 국내외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민간단체의 대북 삐라가 야기한 군사적 긴장 고조이라는 거대한 바윗돌 앞에 주저앉기도 했다. 그때마다 다시 일어섰다. 심리적으로 더 버거웠던 것은 작은 '돌부리'였다. 정보기관의 회유와 압박. 불안한 조짐은 2008년부터 있었다. 북한 인사의 귀순을 성사시키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사실상 정보원으로 활동하라는 압박이었다. 대북 교류협력 사업을 하는 민간단체가 종종 겪는 일이다. 왜 안 그랬겠는가.
북측 고위 당국자와 접촉선을 갖고 있는 그가 정보기관에는 유용한 도구로 비쳤을 것. 언제든지 옭아맬 수 있는 국가보안법(국보법)이라는 올가미를 쥐고 있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그를 통해 '성과'를 내려는 의욕 또는 욕심도 내비쳤다. 그때마다 거절했다. "남북의 정치적 갈등을 완화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처음엔 완곡하게 거절했지만, 거듭된 압력에 분통도 터뜨렸다. "어떻게 키워온 체육교류 사업인데…. 나 같은 사람을 보호하기는커녕 간첩으로 만들 거냐?"
"앞으로 피곤한 일이 많이 생길 거다." 심상찮은 경고가 나온 건 2008년 7월 4일 조선일보와 북한 노동신문 간 경평축구 부활 논의를 주선한 뒤였다.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대북사업에 뛰어들 때였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경성(서울)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 간 '경평축대항축구전'을 되살리고 싶었던 데다가 1929년 제1회 대회를 주최한 조선일보가 연고가 있다고 판단했다. 극과 극은 통했다. 실무협의는 성공적이었다. 평양 대회가 성사되면 개막식에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방북을 추진한다는 합의도 이뤄졌다. 1주일 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발생, 찬물을 끼얹었다. 그즈음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이 바뀐 게 더 큰 문제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는 첩보에 북한 정권의 붕괴를 예상하고 대북 압박을 시작한 것. 수사와 재판의 수렁에 밀어 넣은 '돌부리'였다. 체제 붕괴 시도의 하나가 북한 요인 귀순이었던 것 같다. 경평축구 부활은 물거품이 되고, 그 대신 불법사찰이 시작됐다.
북한 붕괴 기대한 이명박 정부
국내는 물론 사업차 방문하는 중국에선 더 노골적이었다. 한번은 식당에서 사람을 만나는 데 바로 앞에 와 대놓고 비디오 촬영을 했다.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압박했던 것. 나중에 알게 됐지만 국가정보원이 탈북자 A를 남북체육교류협회에 위장취업 시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다. 그렇게 8년을 보냈다. 감시의 시선은 껌딱지처럼 따라다녔다. 사무실에 두 차례 압수수색이 있었다.
불법사찰이 강도 높은 압수수색과 수사로 전환된 건 박근혜 정부 말기인 2016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집과 사무실에 동시에 들이닥쳐 각각 14시간 동안 뒤지더니 두 트럭 분량의 압수물을 싣고 갔다. 가족과 주변에 엄청난 압박이 가해졌다. 군복무 중이던 아들은 기무사에 불려 가 조사를 받았다. 동시에 착수한 수사는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다. 압수한 증거물을 뒤지는 한편 가족과 주변을 괴롭혔고, 이를 조사 중에 흘려 심리적인 압박을 가했다. 20시간씩 8차례에 걸친 수사가 이어졌다. 그 많은 자료를 가져갔으면서도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을 찾지 못했는지 검·경·국정원 합동수사는 겉돌았다.
수원 어딘가 산자락에 있던 안가에는 어떤 간판도 없었다. 20m쯤 되는 긴 철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100m쯤 걸어야 건물이 나왔다. 조사는 아침 9시쯤 시작해서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강행됐다. 새벽 1시쯤에는 긴장이 풀리면서 어김없이 잠이 쏟아졌다. 어느 날 그 시간에 "기무사 조사받은 아들 얘기 들었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분통이 터졌다. "너희가 사람이냐?"
300여 개의 거래처와 주변 인물을 조사했고 가족의 계좌도 털었다. 체육 기자재 구매나 행사 카탈로그 영수증 등을 뒤져 뇌물이 오갔는지 따졌다. 온갖 조사에 신물이 난 직원들이 떠났고, 거래처가 등을 돌렸다. 사회적 평판에도 타격을 입혔다. 남경필 경기지사 통일 특보로 일하며 경기도와 북한의 체육 교류를 주선하던 시절이었다. 국정원은 남 지사에게 "김경성, 거 위험한 사람"이라고 경고하는가 하면, 지역 언론 기자들에게도 비슷한 악담을 흘렸다. 포천시 당국에도 "국가보안법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지자체와의 관계도 단절됐다. '위험인물'로 낙인이 찍히면서 후원자들도 멀어졌다.
한번은 안가 취조 뒤 수사팀장이 정문까지 바래다주었다. 지쳤다. 그에게 "주변 사람 그만 괴롭혀라. 다음번에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조서를 적어 오면 서명해주겠다"라고 제안했다. 팀장은 대답하지 않은 채 "우리도 위에서 시켜서 하는 거다.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버텨라"고 했다. 수사 담당자들조차 사건이 안 된다고 본 것일까? 마지막 조사는 2017년 2월 처음으로 검사실에서 있었다. 기소 전 과정.
쿤밍서 이뤄진 운명의 만남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한 일이 죄가 될 것 같지 않아 검사에게 "기소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라던 담당 검사는 며칠 뒤 전화로 "기소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재판 잘 받으라"고 말했다. 검찰이 정리한 혐의는 4가지. 그중 국보법 제7조 1항(고무·찬양)이 핵심이었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이 진행돼서인지 재판은 진척이 느렸다. 1심 판결이 예정됐던 2019년 2월, 판사는 판결을 미루고 헌재에 국보법 해당 조항에 대한 위헌심사를 청구했다.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됐다.
국보법 위반 혐의의 내용은 이렇다. 포천축구센터 이사장으로 있던 2003년 우연한 계기에 중국 윈난성 쿤밍의 홍타 스포츠센터 운영사업을 하게 됐다. 천연 잔디 축구장 11면과 부대시설을 임차해 세계 각국 구단의 전지훈련장으로 임대했다. 남양브라질 국제축구학교를 설립, 한국, 중국, 브라질 청소년 선수들을 훈련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2005년 우연히 그곳을 찾은 북한 인민무력부 산하 4.25체육단 축구팀을 만났다. 북한 축구팀이 자주 오면 임대사업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4.25체육단이 무상으로 훈련시설을 사용토록 하고 훈련을 지원했다. 그곳에서 기량을 키운 북한 여자 선수들이 2006년 9월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여자월드컵 결승전에서 중국을 5 대 0으로 꺾고 우승했다. 남북한은 물론, 아시아 국가의 첫 FIFA 대회 우승이었다.
내친김에 북측과 정기적인 축구 교류에 합의한 '남북 체육교류계약'을 맺었다. 그들에게 '교장선생'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남북체육교류협회를 설립하고 이후 2008년까지 6차례 남북 축구팀의 교류 행사를 했다. 2007년 말 방북 길에 체육기자재 공장을 설립하자고 제안, 이듬해 5월 평양 사동구역에 '대동강 1호 공장'을 착공했다. FIFA 대회 우승 덕인지 북측은 10만 평 부지의 50년 사용권을 내주었다. '최고 존엄'의 결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업도 2010년 천안함 사건 뒤 이명박 정부의 5.24 조치 탓에 중단됐다. 10만 평 사용권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사업을 살리려 노력을 기울였다. 2011년 11월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진양진에 축구화 공장을 세워 남한 자본, 중국인 운영, 북한 노동자 근무 모델을 시도한 까닭이다.
2010년 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을 앞두고 조선족 동업자를 통해 축구화 견본품과 편지를 전달했다. 검찰은 편지에 쓴 '위대한 지도자 장군님' '탄신일' 등의 표현을 문제 삼았다. 2011년 12월 17일 김 위원장이 사망했다. 남양 국제축구학교를 함께 운영하던 조선족 대리인으로부터 "근조화환을 보내자"는 제안이 왔다. 그를 통해 베이징의 주중 북한대사관에 전달한 조화 리본에 '況痛悍念 朝鮮 偉大 領導者 金正日 同志(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는 영생할 것이다) 남양브라질 국제축구학교'라고 적힌 것도 문제 삼았다. 중국에서 상용하는 문구다.
'대동강 1호 공장'
이를 빌미로 수사와 기소를 했다고 하더라도 '시차'가 있다. 2010년 2월과 2011년 12월의 일을 왜 5~6년 뒤에나 문제 삼았을까. 불법사찰을 하던 정보기관들이 빤히 알던 내용이기도 했다. 정치적 의도에서 착수한 수사가 아닐 수 없었다. 교류하는 상대를 그럼 뭐라고 칭해야 하나. 김 위원장을 "피그미"라 폄하했던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도 북·미 대화 기운이 무르익자 서한에서 "친애하는 위원장(Dear Mr. Chairman)"으로 부르지 않았나.
그의 입장에서 나머지 혐의는 억지였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체육위원장이던 2014년의 일이다, "축구공 1500개를 보내달라"는 북측의 요청에 1억 2000만 원의 후원금을 받아 추진했다. 통일부 승인을 받은 사업. 그런데 평양 제2회 아리스포츠컵 국제유소년 축구 대회(2015.8)를 앞두고 북측이 돌연 "축구화 500켤레를 추가로 제공해주면 좋겠다"고 연락했다. 민화협 후원금 6000만 원으로 요구를 들어주었다. 당시 홍사덕 남측 민화협 상임의장의 재가를 얻었다. 검찰은 업무상 횡령 혐의와 함께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혐의를 씌웠다. 마지막 외국환거래법 위반은 선수와 임원 등 평양대회 참가자들에게 각각 개별 비용을 지참해 출국하게 하고, 현지에서 이를 모아 북측에 제공한 걸 꼬투리 잡았다. 이 역시 발생일로부터 '시차'가 있다. 사건이 길어진 것은 온전히 국보법 위반 혐의 때문이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정보기관이 탈북자 A를 시켜 수집한 동향 보고서를 보게 됐다. 사람들과 만나는 사진도 첨부했다. 이용 가치가 떨어졌는지 A는 간첩 협의로 실형을 살았다. 1심 재판정에 검찰 측 증인으로 출두한 그는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아 거짓 보고를 했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법정이 술렁였다. 그의 양심고백으로 검찰의 논리가 허물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년 5월 23일 1심 재판부는 징역 1년 6개월의 자격정지 2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최후 진술로 "이렇게 괴롭힐 거면 차라리 구속이 낫겠다"라고 말한 게 괘씸죄가 됐을까. 하늘이 노래졌다. 법원의 판단은 2심에 이르러서야 균형을 잡았다.
지난 1월 16일. 2심 판사는 국보법과 횡렴 혐의에 무죄를, 나머지 두 혐의에 대해서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판사는 선고 뒤 "판결 내용을 언론에 알려도 좋느냐"고 물었다. 흔쾌히 동의했다. 서울로 오는 차 안에서 휴대폰을 보니, 그새 단편적인 판결 기사가 떴다. 수원지법은 나흘 뒤 누리집 '우리법원 주요판결' 란에 다음과 같은 판결요지 소개와 함께 판결문을 공시했다. 국보법 혐의에 대한 법원의 견해가 골자였다.
미완의 '명예회복'
"피고인이 김정일에게 생일 축하 편지를 전달하고, 김정일 사망 당시 근조화환을 보냈다가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위반으로 기소된 사안이다. 피고인은 북한과의 교류협력 과정에서 현행법상 요구되는 절차를 대부분 준수하여 왔고, △ 교류협력을 계속하기 위하여 북한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점, △ 편지의 전체적인 맥락 및 문제 되는 표현의 비중, △ 대한민국 체제가 북한 체제에 비하여 확고한 우위에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무죄로 판단한다." "피고인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 해당하거나, 피고인에게 그와 같은 인식이 있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개인적으론 횡액이었던 재판이 일단락된 순간이었다. 검찰과 피고 측 모두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에겐 '명예회복'의 문제였다. 벌금형조차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국보법 7조 1항(찬양·고무)는 특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다. 2심 판결문에 인용된 헌법재판소 위헌법률심판 결과도 적시하듯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위협할 우려가 있고, 선별적 자의적 집행 소지가 있어 법치국가 원리에 반한다." 해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정책의 추구나 단순한 동포애의 발휘에 지나지 않을 경우라도 처벌 위험이 있다"라고 판시했다. 김 이사장은 "다시는 나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란다"는 말로 재판과 관련한 이야기를 닫았다. 지나치게 오래 끌었지만, 어차피 남북교류를 하는 과정에 부딪힌 '돌부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불법사찰부터 2심 판결까지, 17년 동안에도 남북교류는 멈춘 적이 없다. 매번 법원과 검찰의 출국 허가를 받는 게 번거로웠지만 재판 중에도 축구공을 둘러메고 5차례 분계선과 제3국 국경을 넘었다. 개인적인 한풀이에 머무는 대신 '불씨'를 살려 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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