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주제로 하는 콘퍼런스에 평생 여러 번 참석해봤다. 여기 걸린 슬로건이 말해주듯 이번 포럼의 주제는 ‘평화! 지금 이곳에서(Peace! Here and Now)’이다. 오늘, 참석자들에게 왜 평화가 이뤄지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라고 답했다. 물론 복잡한 문제다. 하지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말로만 평화를 이야기한다. 무언가 행동을 하려는 사람은 없다.”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은 타고난 투자가다. 그에게 평화는 돈이다. 평생 돈 되는 곳을 먼저 찾아내 거만금을 얻었다. 그런 그가 몇년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한반도가 향후 20년 동안(또는 10년, 15년 내)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투자 대상) 지역이 될 것”이라면서 평화 전도사를 자청하고 있다. 주한미군 철수와 ‘38선’ 철폐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군사분계선을 ‘38선’으로 표현했다. 남북한 모두 막대한 국방예산을 줄여 한반도를 젖과 꿀이 흐르는 번영의 땅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9일부터 사흘 동안 강원 평창 알펜시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2020 평창평화포럼 안팎에서 로저스 회장을 처음 접했다. 77세라고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열정과 활기가 넘쳤다.
재작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성사된 남북 화해와 평화의 의미를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포럼에서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종횡무진 활약했다. 9일 기자회견장에서는 “어제 비무장지대(DMZ)를 둘러보고 슬픈 생각이 들었다. 왜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이 죽을 걱정을 하면서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는지…”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대신 K팝 공연이나 예술 공연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며, 일어날 것”이라고도 했다. 로저스가 전에도 몇 번 한 말이지만, 현장에서 듣는 감동은 달랐다. 언제 들어도 평화에 굶주린 한반도 거주민의 심금을 울리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는 ‘남한’과 ‘북한’은 영어로 말했지만, ‘한반도’만은 시종 한국어로 정확하게 발음했다. 9일 저녁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만난 그는 북한의 청소년 여자축구팀을 지원했었다는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의 소개에 “남남북녀!”라며 한글 단어로 소감을 내놓았다.
포럼 공동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한 로저스는 가장 많은 공식·비공식 일정을 소화해냈다. 첫날은 기자회견과 개막식 및 좌담회에 참가했다. 둘째 날 오전에는 전체 세션 ‘동해선 철도와 유라시아 철도 연결: 한반도 신경제 구상’에 연사로 참석한 뒤, ‘원산-갈마, 금강산의 남북 공동 관광 개발’ 세션 토론자로 활약했다. 다른 어떤 참석자보다 많은 질문을 받고, 그때마다 초긍정의 비전을 제시했다.
통일은 남과 북의 국내 정치와 지정학, 비핵화가 포함된 고차방정식이다. 로저스는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출판한 저서 <앞으로 5년 한반도 투자 시나리오>에서 ‘정치’를 제거했다. 그는 “분명히 밝히건대 나는 통일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남북한 간의 ‘개방(opening)’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전제했다. 로저스는 자신이 모르는 주식은 사지 않는 것을 투자의 제1 원칙으로 삼는다. 오토바이와 개조한 차량으로 168개국 35만㎞를 밟았던 그다. 마찬가지로 직접 방문해보지 않은 나라의 미래를 확신하지 않는다. 로저스는 2007년과 2014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저평가된 시장(국가), 재난 상태에 가까운 위기의 국가를 찾겠다는 생각에서 나선 길이었다.
로저스는 두 번의 방북에서 ‘김정일의 북한’과 ‘김정은의 북한’의 차이를 발견했다. 낙관의 근거다. 첫 방문에선 북한이 폐쇄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감상평을 확인했을 뿐이다. 경험을 풀어낼 에피소드조차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문에서 북한에 ‘역동적인 기운’이 넘쳐 흐르는 것을 발견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대에 볼 수 없었던, 급진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는 현장을 목도했다. 북한 관리들의 개방적인 태도도 확인했다. 나선경제특구의 장마당을 방문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사고파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북한 관리들은 “북한에 투자하라”면서 매력적인 인센티브와 투자자 이익 보장까지 장담했다. 그가 북한 투자가 유망하다는 말을 달고 다니기 시작한 계기다.
로저스는 2015년 5월 CNN머니 인터뷰에서 “김정은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있었다면 꿈도 꾸지 않겠지만, 지금의 북한은 매우 흥미롭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돈 전부를 쏟아붓고 싶다”고 말했다. “그 친구(The kid, 김정은)가 엄청난 변화를 일궈내고 있다”고 전했다. 로저스는 방북 뒤 투자자 강연에서 북한을 유망 투자국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실제 홍콩 소재 대북 투자기업인 우나포르테의 주주가 됐다고 2017년 3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밝혔다. 북한의 잇단 핵실험으로 미국민의 북한 투자를 금지하는 제재가 내려지자 2016년 2월 취득한 수 미상의 주식을 같은 해 9월30일자로 처분했다.
로저스는 저서에서 밝혔듯이 이후 “미국 시민의 북한 투자는 불법이라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그의 대북 투자 포지션은 ‘대기’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개방한다면’이라는 조건절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로저스는 그러나 ‘말하는 비즈니스(talking business)’를 이어나가고 있다. 강연만으로 돈이되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코리아타임스 인터뷰에선 “북한은 세계 관광지도에 등장한 적이 없기에 북한이 개방을 한다면, 관광은 분명 투자 기회”라고 강조했다. 남북의 국방예산 규모를 상기시키면서 “문재인은 트럼프에게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라고 말할 정도로 거칠지(tough) 않은 것 같다”고도 했다.
조지 소로스와 함께 1973년 퀀텀펀드를 설립한 로저스의 신화는 8년 동안 4200%에 가까운 투자수익률을 올린 데서 시작한다. 같은 기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지수는 47% 올랐다. 로저스는 37세이던 1980년 퀀텀펀드를 떠나 투자와 여행, 강연을 해왔다.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한 그의 학력을 보면, 단순히 숫자만 좇는 투자자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만의 특별한 낙관과 비전이 있을 것이다. 그의 한반도 비전은 꽤 오래됐다.
1999년 1월부터 2년 동안 자동차 세계일주를 하던 중 서울을 찾았을 때는 ‘북한군의 공격 위협 탓에’ 값이 싼 한강 이북 부동산 매매도 잠깐 생각해봤다. “북한 측에서 한강 이북지역의 값이 싼 부동산을 가능한 한 많이 매입한 다음 ‘평화!’를 외치면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 엉뚱한 발상도 했다. 여행기 <어드벤처 캐피털리스트>에 소개한 일화다. 부산에서 ‘맛난 개고기’를 시식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받은 인상이다. 그는 그때 이미 “궁극적으로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자리 잡을 것”을 확신했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덴버대 교수(67)는 타고난 협상가다. 그에게 평화는 비핵화다. 남북 철도 연결과 경제협력, 스포츠 교류 등에 대한 희망이 소환됐던 포럼에 어울리지 않는 경력의 소유자이다. 6자회담 수석대표와 주한 미국대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를 거치면서 북핵협상에 나섰다. 김계관 현 북한 외무성 고문과 40여차례 마주 앉아 피말리는 협상을 벌였다. 로저스가 미래의 꿈과 희망을 말했다면, 힐은 냉혹한 현실과 절망을 토로했다.
10일 오전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만난 그에게 북한은 댓바람에 신뢰하고 꿈을 나눌 사이가 아니다. 한치 오차 없이 의도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할 협상의 상대방일 뿐이다. 힐은 한반도 비핵화의 해결 수순을 담은 2005년 9·19공동선언 뒤 북한의 비핵화 행동에 상응해 주한미군 감축을 비롯한 신뢰구축 조치들을 준비했었음을 전하면서 “미국은 과거 너무 순진하게 북한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힐은 미국 외교관 중 드물게 한반도 거주민의 아무런 잘못 없이 시작된 분단과 한국 현대사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는 지한파다. 주한 대사 재임 중 미국대사로는 처음으로 광주 망월동 묘지를 공식 방문했다. 그는 남북 철도 연결이나 대북 개별관광과 같은 한국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해 “미국은 한국인의 역사와 정서, 분단이 야기한 끔찍한 비극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간에 충분히 협의해야 할 문제”라면서 “남과 북의 차이를 또 안보 문제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비핵화 협상에 관한 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최대 압력 정책은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조심스레 밝혔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북한으로 하여금 제재를 비롯해 많은 비용을 들여야 하는 핵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안보를 추구하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근본적 접근에서 벗어나는 아이디어를 경계했다. 북핵 문제를 북·미 간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려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접근에 절망감을 표했다. 올해 11월 대선에서 새로 등장할 미국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한국 및 중국과 대화를 확대하는 것”을 꼽은 이유다.
개인적으로 힐을 처음 만난 것은 6자회담이 진행되던 2004년이다. 비핵화 협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불현듯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던지자 힐은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한국에선 ‘사랑의 블랙홀’로 개봉)>라는 영화를 보았느냐”고 물어왔다. 기상 캐스터가 매일 똑같은 일상을 겪는 것을 다룬 1993년 영화다.
로저스의 투자 더듬이가 중국과 보츠와나, 러시아 등지를 거쳐 한반도로 향하고 있는 건 분명한 것 같다. 평창평화포럼장에서 확인한 것은 로저스에게 쏟아지는 뜨거운 관심이 돈벼락 기대심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가 뿜어대는 평화·번영 에너지의 기운을 받고 싶은 기대 역시 넘실댔다.
로저스에게 한반도는 매우 흥미로운(exiting) 희망의 장소이고, 힐에게는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희망이 잘 안 보이는 곳이다. 분명한 것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단번에 가는 길이 없다는 점이다. 희망과 절망, 그사이 어딘가에 있는 중간지대(middle ground)를 찾는 노력과 행동이 아쉬운 시점이다. 로저스가 남긴 가장 아픈 지적 역시 “왜 모두 평화를 말하면서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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