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축하합시다.”

국제관계를 분석하는 작업에서 말은 중요한 단서다. 특히 국가 또는 국가 지도자의 말은 분석의 출발점이다. 한반도 정세를 짚어보는 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분단 이후 두 번째 경자년(庚子年)이다. 새해 벽두부터 북에서 날아온 메시지는 참으로 고약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의 로맨스에 한국이 끼어든다고 멋대로 규정하고, 이를 ‘설레발’이자 ‘호들갑’이라고 폄하했다. 지난 11일자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의 담화 형식으로 내보낸 메시지에서다. 남조선 당국이 자임한 ‘중재자’ 역할을 두고 “중뿔나게 끼어드는 것은 좀 주제넘은 일”이라고 비꼬았다. 담화의 시작과 끝은 ‘한 집안 족속도 아닌 남조선’이었지만, 15개 문장 중 7개는 미국이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지난해 11월18일자 김계관 고문의 짧은 대미 담화문과 일치하는 내용이다. 1일 공개된 조선노동당 제7기 중앙위 5차 전원회의(5중전회) 발표문과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북한 조선관광(DPR Korea Tour)이 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해 홍보하고 있는 홈페이지의 간판 사진. "새해를 축하합니다"라는 덕담이 쓰여있다. 

북한 외무성 김계관 발표 담화문
대남 비방 내용 크게 보기 쉽지만
뒤집어보면 북·미 정상 친분 강조

북한발 메시지엔 비명·고함 섞여
“허리띠 졸라맬 것” 강조하면서도
“미국 태도 따라 핵 억제” 여지 남겨

대중 무역전쟁 1단계 끝낸 트럼프
탄핵 재판·대선에 눈코 뜰 새 없어
한반도 문제에 팔걷긴 어려울 듯

변할 것이라고 공언한 대한민국
남북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력’
북·미 모두 설득해 결과 도출해야

‘미국과의 대화는 무익했기에 더 이상 흥미가 없다. 2018년 6·12 싱가포르 합의 이후 1년 반 동안 세 차례 북·미 수뇌 상봉·회담이 있었지만 미국이 대화 놀음만 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선 속히우고(속고) 잃은 시간이다. 대화 재개의 전제는 적대시정책의 철회(김계관 11월 담화)이며, 북한이 제시한 요구사항들의 전적인 수긍(김계관 1월 담화)일 뿐이다. 5중전회 발표문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으로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조선반도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이어 적대정책이 철회되고, 항구적이고 공고한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까지 전략무기(핵과 대륙간탄도미사일 포함) 개발을 줄기차게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외 메시지에만 있는 것은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의 친분을 강조한 대목이다.

지난 1일 북한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불꽃놀이 축제에 많은 주민들이 참가해 새해를 경축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김계관 담화는 ‘세상이 다 인정하는 우리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친분관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개인적 친분만으로 국사를 논하기 어렵기에 적대시정책 철회라는 ‘+α’가 있어야만 대화를 다시 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돌아갔다. 지도자 간 ‘개인적 친분’은 긴장 고조의 첫 단계인 ‘말의 전쟁’을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 지난해 말 북한의 ‘성탄절 선물’을 둘러싼 긴장 국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로켓맨(rocketman)’과 대북 무력 사용 가능성을 다시 소환하자 북측은 딱 그만큼의 대칭적 메시지를 내보냈다.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미국의 계산된 도발이라면, 정말로 늙다리의 망령이라 진단해야 할 것”이라며 선을 지켰다. 조건문이다. 김계관 1월 담화에선 대남 비방을 크게 보기 십상이지만, 기실 뒤집어보면 담화 테마는 작년 말의 긴장 국면을 지나 개인적 친분의 복원이었다고 본다. 작년 말 최 제1부상, 김영철 조선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리수용 당 중앙위 부위원장,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는 ‘친분’이 괄호 속에 놓였었다.

북한발 메시지에는 ‘비명’과 ‘고함’이 섞여 있다. 우리는 종종 비명을 고함으로 듣는다. 5중전회 발표문 주제는 단연코 ‘정면돌파’였다. 무려 23번이나 등장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허리띠’였다. 김 위원장은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기어이 자력부강, 자력번영하여 나라의 존엄을 지키고 제국주의를 타승하겠다는 것이 우리의 억센 혁명신념”이라고 강조했다. 2012년 4월 첫 공개연설에서 “인민이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번영을 누리게 하겠다”고 다짐했던 김 위원장이다. 이번 발표문은 그 약속을 당분간 지킬 수 없게 됐음을 공개시인한 것에 다름 아니다. 고함 속에 비명이 담겨 있다. “이제껏 우리 인민이 당한 고통과 ‘억제된 발전’의 대가를 깨끗이 다 받아내기 위한 충격적인 실제 행동으로 넘어갈 것”이라고 ‘고함’을 지르다가도, “우리의 (핵)억제력 강화의 폭과 심도는 미국의 금후 대조선 입장에 따라 상향조정될 것”이라는 여지를 남겼다. 사랑한다면서 서로 ‘곁’을 주지 않아온 트럼프-김정은 로맨스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또는 장거리 로켓 발사 가능성에 대해 ‘2017년 (위기 국면에서) 검토했던 옵션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찰스 브라운 태평양 공군사령관)고 엄포를 놓았던 미국도 친분으로 선회하고 있다. 북·미관계가 멀어지거나, 가까워질 때 중간 정거장은 중국이다. 김 위원장이 ‘새로운 길’을 밝힌 작년 1월, 제4차 북·중 정상회담을 기준으로 중재자는 문재인 대통령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으로 바뀌었다(루디거 프랭크 빈대학 교수). 북·중·미 삼각관계(Triangle)는 교묘하다. 북·미가 가까워지면, 미국에 거추장스러워지는 존재가 중국이다. 반대로 북·미가 멀어지면 중국은 미국에 아쉬운 존재다. 트럼프 시대, 북·중·미 삼각관계의 동인(動因)으로 작동하는 게 미·중 무역협상이다. 그렇다면 미·중 무역협상의 순항이 한반도에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지난 1일 평양 개선문 인근에서 북한 젊은이들이 민속놀이를 즐기고 있다. 사각등에 '2020 축하'라고 쓴 작은 글씨가 보인다.  AP연합뉴스

트럼프 취임 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단서가 있다. 중국과의 무역전쟁은 트럼프가 대선 유세 과정에서 줄곧 내세운 ‘1호 공약’이었다. 취임 초기 최우선 순위의 외교안보 이슈는 북한이었다. 트럼프는 처음부터 두 가지를 묶었다. 2017년 4월 시 주석과 첫 미·중 정상회담을 하기 사흘 전 FT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큰 거래(grand bargain)로 북한 문제를 풀겠다”고 일성을 터뜨렸다. “중국이 북한 문제를 풀지 않으면 우리가 할 것”이라며 중국 협조 여하에 따라 무역 문제가 달라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내놓았다. 2017년 북핵 위기가 깊어지자 조지프 던퍼드 합참의장을 선양 북방전구 지휘부로 보내 미·중 ‘유사시 소통’을 강화했다. 그러다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한 달 전, 돌연 회담 취소를 발표하면서 ‘중국의 방해’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2018년 5월 북·중 다롄) 정상회담 뒤 김정은의 태도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우여곡절 끝에 싱가포르 회담이 성사되자 미국은 곧바로 대중국 무역전쟁을 시작했다. 트럼프는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고도 트윗했다. 미·중 무역전쟁 1단계를 끝낸 시점에 트럼프가 중국과 시 주석을 새삼 호출한 것은 왜일까. 트럼프는 지난 15일 시 주석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북·중·미 3국 지도자들의 관계를 ‘아주 아름다운 모자이크’이자 ‘아주아주 아름다운 체스(Chess)게임이거나 포커게임’이라고 했다. 굳이 체커(Checker)게임을 들먹이며 “그것보다는 훨씬 대단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중국의 역할로 북·미관계가 발전 또는 관리될 계기를 찾은 것일까. 트럼프의 찬사는 늘 의미를 깎아서 들어야 안전하다. 지금까지 경향으로 보면, 미·중이 가까워지면 북·미관계는 후퇴하거나 최소한 제자리걸음을 했다. 다만 트럼프가 체스와 체커를 우정 비교한 것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체커게임의 대가 매리언 틴슬리 박사는 “체스가 대양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체커는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고 한다. 트럼프가 비유한 까닭이야 알 길이 없다. 다만 트럼프가 무엇에 몰두하는지는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연방상원의 탄핵재판과 11월 대선에 눈코 뜰 새 없는 그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팔 걷고 나설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류허 중 부총리가 1월15일 백악관에서 미·중 1단계 무역합의문에 서명한 뒤 합의문을 펼쳐보이고 있다. AP연합뉴스

해가 바뀌어도 북한과 미국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친분을 복원했을 뿐이다. 한반도 문제 당사자 중 가장 크게 변한, 또는 변할 것이라고 공언한 주체는 대한민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7일 신년사에서 교착상태인 북·미 대화만 기다릴 게 아니라 남북 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협력’을 추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동안 북·미 대화만 바라보고 남북관계를 유예했던 기존 노선에서 벗어날 것임을 예고했다. ‘최대 협력’ 내용으로는 접경지(DMZ) 공동개발과 철도·도로 연결 진행, 7월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 교류 등이 언급된다. 남북관계를 넓힘으로써 북·미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다는 가정이다. “필요한 경우 북한에 대한 제재 일부를 면제하거나 예외를 인정하는 데 있어 국제적 지지를 넓힐 길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작년까지 앞바퀴였던 북·미 대화가 계속 겉돌고 있기에 올해는 뒷바퀴부터 돌린다”(전직 고위 당국자)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팀이 마침내 실력 발휘를 할 기회가 온 것일까. 문제는 아직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그 ‘입구’가 안 보인다는 점이다.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가 아닌, 교수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다고 강조한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7일 워싱턴 특파원단 간담회에서 그 일단을 풀어놓았다. 미국 정치학자 밴 잭슨의 ‘위협 현실주의(Risk Realism)’를 원용해 한·미가 함께 검토할 과제로 한반도 평화체제, 북한의 비핵화 진전과 연동한 점진적 주한미군 감축, 협력적 위협(CTR) 기금 조성, 위반 시 본래대로 복귀하는 스냅백(Snapback) 제재 완화 및 이를 논의할 북·미 워킹그룹 구축 등 5가지 제안을 했다. 중·러가 제안한 대북 제재 완화 결의안에 북한의 비핵화 상응조치를 포함시키면 미국·영국·프랑스도 동의할 여지가 커진다는 주장도 보탰다.

본인의 공적 역할을 ‘자문교수’로 제한한 그는 사견임을 강조했다. 이 중 어떤 것이 실제로 미국에 전달한 또는 북한에 전달할 제안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담대한 구상들이다. 어떠한 방식이건 성과를 도출하려면 미국과 북한을 모두 설득해야 한다. 작년까지 ‘최대 압박’을 밀어붙였던 미국에 ‘최대 협력’을 설득하고, 한·미 합동훈련 중단과 첨단무기 반입을 물고 늘어지는 북한을 상대로 전시작전권 반환에 필요함을 설득해야 한다. 북·미의 입장을 일부 헐어내야만 한국의 역할 공간이 생긴다. 머뭇거리지 않고 당당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반도 북쪽의 새해 인사에는 ‘복(福)’이 없다고 한다. ‘복’은 주술적 의미가 있어서란다. 새해맞음을 서로 축하한다고 한다. 수동적으로 복을 기대하기보다, 쌍방향의 덕담을 주고받는 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해서, 그들식 새해 인사를 다시 소개한다. “새해를 축하합시다.”

Posted by gino's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