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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핵무기 감축 체제가 없어진 세계, 바이든과 푸틴의 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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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과 비강대국을 구분하는 기준은 여럿 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강대국은 싸울 장소와 시간, 무기를 결정할 선택지가 있다. 비강대국은 갖지 못하는 권한이다.

강대국은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무기를 동원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나라다. 미국이 동아시아 전역에서 중국의 군사적 굴기에 한껏 경계심을 내보이며 아시아를 화약고로 만들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엔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가 선택권을 행사하고 나섰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연방의회에서 올해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2023.2.21 로이터 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이 21일 국정연설에서 미·러 신전략핵무기 감축협정(START2·뉴 스타트)의 핵심 요소인 미국 측의 러시아 핵시설 사찰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핵실험을 재개할 의향도 내비쳤다. 뉴 스타트 불참은 다분히 정치적인 선언이다. 조약 자체를 폐기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2021년 2월 만료 직전에 재합의된 현재의 뉴 스타트 협정은 2026년 2월 5일까지 유효하다. 

러시아 외교부는 푸틴의 국정연설 뒤 “러시아는 전략핵무기를 추가 배치할 의도가 없다”라고 밝혔다. 조약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가 설정한 실전배치 전략핵무기의 한도(1550개)를 준수하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상호 사찰을 할 수 없다면 조약은 사실상 사문화된다. 푸틴의 선언 뒤 양국 간 마지막으로 남은 전략핵무기 감축 체제가 와해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냉전 당시 구축된 군축체제가 중국을 포함하지 않은 점에서 한계를 노정하고 있지만, 양대 핵강국이 체제를 유지한 상태에서 중국을 끌어들이는 것과 체제 자체가 없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푸틴의 이번 선언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018년 중거리핵전력(INF) 협정의 만료를 1년 앞두고 일방 철회한 것과 비교하면 낮은 강도의 조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러 간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기 어려운 상황인데다 혹여 감축체제 복귀에 합의하더라도 미국 상원에서 조약 비준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최소한의 신뢰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푸틴을 ‘전범자’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고, 푸틴은 미국과 서방의 위선을 비난하고 있다. 세계는 당분간 양대 핵 강대국 간 어떠한 감축체제도 없는 시대를 살게 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2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왕이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2023.2.22  신화 연합뉴스

뉴욕타임스는 “(조약이 만료되는)1000여일 뒤 백악관 집무실에 앉게 될 미국 대통령은 핵무기 무한 경쟁을 벌이던 반세기 전과 비슷한 세계를 보게 될 것”이라고 짚었다. 미국 군축협회(ACA)는 “뉴 스타트 준수를 중단하겠다는 푸틴의 무책임한 결정 탓에 글로벌 핵무기 경쟁의 가능성이 커졌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푸틴의 결정은 사실상 미국이 원인을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든은 취임 다음 달인 2021년 2월 러시아와 서둘러 뉴 스타트 연장에 합의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INF를 일방 철회한 뒤 양국이 상대국 주재 대사를 본국에 소환하는 등 악화 일로를 걷던 미·러 관계는 기실, 뉴 스타트 연장으로 봉합됐다. 같은 해 6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대면 정상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을 때만 해도 양국 사이엔 훈풍이 불었다. 바이든은 러시아 야당 정치인 알렉산더 나발니 탄압을 빌미로 푸틴을 "살인자"라고까지 했지만 정작 만난 자리에선 상대를 인정하는 모습을 내보였다. "러시아는 강대국"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푸틴은 이 자리에서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 문제를 두고 "토론할 게 없는 문제"라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까지 8개월 동안 미국과 서방은 러시아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푸틴은 2021년 12월 나토를 상대로 우크라이나의 가입 거부를 문서로 보장하고 동유럽에 배치된 나토 군사력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묵살당했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시작되자 바이든은 푸틴을 '전범'이라고 비난하고, 러시아 경제의 허리를 꺾어버리겠다면서 강력한 제재를 발동했다. 장기적으로 러시아 경제를 30~50% 줄이기 위해 고안된 제재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20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극비리에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환영을 받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23.02.20 AFP 연합뉴스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은 개전 초기인 지난해 4월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과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없게 될 정도로 러시아가 약해지는 것을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군사적으로도 러시아의 허리를 꺾어놓겠다고 다짐했다. 이른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LMN)'과 함께 러시아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면서, 뉴 스타트에 대해서는 러시아의 협조를 요구해왔다. 푸틴이 전략핵무기 감축협정의 중단을 통고한 저간의 사정이다.

〈미·러 전략무기 감축 협정 약사〉

조약(체결연도) 내용 현황
SALT1(1972) ICBM  SLBM 발사대 수 동결 SALT2로 속개
SALT2(1979) 전략핵무기 운반체 제한 1980 카터 행정부 철회
ABM조약(1972) 탄도미사일 요격미사일 제한 2002 부시 행정부 철회
INF 1987 ·단거리 핵전력 폐기 2019년 만료 앞두고 트럼프 행정부 2018년 철회 선언
START1(1982) 전략핵무기 80% 감축 2009 만료, START2 속개
START2(2010) 전략핵무기 추가 감축 2026 만료예정

 

미국과 소련이 전략핵무기 감축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이다. 이후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가 미국과 군축체제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양국 간 주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늘 미국이었다. 2002년 미사일방어(MD)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탄도탄요격미사일(ABM) 조약을, 2019년에는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을 철회했다. 러시아가 먼저 파기한 조약은 없다. 푸틴의 뉴 스타트 중단 뒤 미국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비난은 기실, 이율배반적인 위선이다. 미국이 1996년 유엔 총회 결의로 186개국이 체결한 포괄적핵실험중단조약(CTBT)을 여전히 비준하지 않고 있는 반면에 러시아는 비준을 마친지 오래다. 푸틴이 국정연설에서 핵실험 재개 가능성을 밝힌 것 역시 미국의 위선을 들춰내려는 의도로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가 INF를 파기한 이유는 중국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약상 중·단거리 핵무기 개발이 제한된 미·러와 달리 급속히 핵전력을 늘리는 중국이 포함된 군축체제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뿐 아니라 대만해협 전쟁 위기를 부추기면서 중국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중·러가 참여할 군축체제는 요원하다.

푸틴이 뉴 스타트의 파기가 아닌, 중단의사를 밝힌 것은 협상의 여지를 남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바이든의 미국이 협상에 나설 가능성은 극히 적다. 전쟁 와중에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를 계속 발사하고 있고, 이란은 무기급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이란 핵협정(JCPOA)을 트럼프가 파기하고, 바이든이 복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0년대 러시아와 전략핵무기 감축 협상을 하면서 "신뢰하되, 검증하라"는 러시아 속담을 즐겨 구사했다. 하지만 이제 검증은커녕 신뢰도 없는 세계가 됐다. 바이든이 만든 세계다.

열병식 때 등장한 고체연료 추정 ICBM. [북한 외국문출판사 사진첩 캡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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