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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한·러 관계] 한국과 러시아는 서로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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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관련된 각 측은 냉정과 자제를 유지하고 국면 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대북) 제재와 압력을 취해서는 안 된다. 대화와 협상만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이다." 지난 3월 21일 모스크바 러·중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내놓은 한반도에 관한 '공동방안'이다.

러시아 국경도시 크라스키노에서 하산으로 가는 길. 동해의 푸른 바다와 길 양편의 너른 들판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텅 빈 도로에 언젠가 앞서간 차량의 바퀴자국이 보인다. 2019.6.7. 시민언론 민들레

 

한국에 러시아는 무엇인가 

공동방안은 말 그대로 중·러의 합작품이다. 2017년 한반도 위기 국면에서 중국은 '쌍중단(한·미 합훈과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의 동시 중단)'과 '쌍궤병진(비핵화 협상과 평화협정 협상의 동시 진행)'이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것을 러·중 공동방안으로 발전시킨 건 러시아였다. 중국의 2단계 해결방안에 순서를 부여했다. 1단계 쌍중단과 2단계 평화협정 체결의 골격을 유지하되, 3단계로 다자간 협의를 통한 지역 안보 체제의 확립과 비핵화 협상의 병행을 추가했다. 비핵화 이후 동아시아 평화까지 설계한 것이다. 2000년대 중반 북핵 6자회담 다자안전보장 실무그룹의 의장국다운 설계였다. 북한의 체제 안전을 다자간 보장해주는 체제를 구축해야만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합리적인 안보 우려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할 뿐, 긍극적인 평화의 설계도를 내놓지 않았다. 중·러의 차이다.

러시아는 2005년 북핵 6자회담이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에 예치된 북한 자금 탓에 난관에 봉착하자, 러시아 스베르방크를 통해 북한이 자금을 찾도록 도왔다. BDA를 제재했지만, 국내법에 묶였던 미국이 각별한 감사를 표한 까닭이다.

맞다. 지금, 이 마당에 한반도 평화는 생뚱맞게 들릴 수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아무도 한반도 평화를 말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정세는 미·러 및 미·중 갈등이라는 태풍의 눈에 휘말려 있다. 북한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한국은 미국의 전략자산을 들여와 각각 무력 시위를 벌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평화자산'을 보존하는 것은 소중하다. 러시아는 남북한을 모두 설득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나라이기 때문이다.

2018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의 극동연방대학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8.4.25. 블라디보스토크/EPA연합뉴스

70년 동맹인 미국은 동맹국의 절실한 희망인 통일과 관련해 아무런 정책도 갖고 있지 않다. 놀랍지 않은가. "미국은 남북한 통일을 전적으로 지지하되, 남한 국민의 선택에 따른 통일이길 바란다"는 기본입장(stance)을 갖고 있을 뿐이다. 중국은 한반도 거주민의 결정에 따른 통일이라는 레토릭에 그친다. 남북관계가 영원히 대치할 게 아니라면, 평화자산은 보존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고, 국제정세가 거꾸로 간다고 한반도 평화가 무조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책임에 그치지 않는다. '평화 통일'을 명시한 헌법을 거스르는 ‘반역’이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19일 "한국의 우크라이나 살상 무기 지원은 러·한 관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한반도 안보 상황의 맥락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같은 날 내놓은 '조건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방침에 대한 페이스북 논평에서다. 우크라이나 살상 무기·포탄 지원은 단순히 러시아라는 '자산'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다. 정확히 같은 무게만큼 자산을 '부채'로 돌려놓는 짓이다. 두 배의 손실이다.

러시아에 한국은 무엇인가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에서 불과 38㎞ 거리인 자루비노. 러시아 극동의 부동항이다. 동해 진출이 절실한 중국은 오래전부터 자루비노 개발을 제안해왔지만, 러시아는 내주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것 같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태생적으로 진정한 우방이 되기 어렵다. 중·러는 네르친스크조약(1689) 이전부터 국경을 놓고 싸웠고, 연해주를 러시아에 내준 베이징조약(1860)도 중국 역사에선 아픈 손가락이다. 1960년대 양국 공산당 간에 이념 갈등을 빚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중·러 협력은 기실, 미국이 주선한 '계약 결혼'일 뿐이다. 그 증거의 하나가 자루비노항이다.

한반도 평화 세력인 게 러시아가 '착한 강대국'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한반도 평화가 자신들에게 경제적, 전략적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인구 1억 4700만의 러시아는 14억이 넘는 인구 대국 중국을 경계한다. '차이나 머니'가 진출하는 동시에 몰려올 중국인들을 꺼린다. 러시아 극동의 개발이 시급하면서도 중국에 개발권을 주지 않는 이유다. 일본은 2차대전 패전국 중 전쟁으로 잃은 영토(북방 4개 섬)를 돌려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유일한 국가다. 일본 자본의 극동 진출 역시 러시아에는 께끄름하다. 한국 자본의 진출을 오랫동안 원해온 이유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크렘린궁 내 그라노비타야궁에서 열린 공식 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다. 2023.03.22.연합뉴스

박근혜 정부는 시베리아산 석탄을 북한 나진항을 경유, 포항으로 실어 오는 프로젝트를 실현했다. 러시아는 3억 달러를 들여 하산~나진 간 54㎞의 철로를 개·보수하고, 나진항 제3부두 항만시설을 갖췄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동방경제포럼에서 9개 분야(Nine Bridges)의 거창한 투자 약속을 했지만 빈말이 됐다. 단 한 개의 다리도 놓지 못했다.

블라디보스토크~하산~나진~원산~부산을 잇는 환동해벨트 개발이 러시아의 꿈이다. 북한을 경유 또는 우회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하려는 게 포기할 수 없는 한국의 꿈이다. 휴전선에 막혀 '섬나라'가 된 한국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미래 프로젝트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과, 시베리아~북한~남한 가스관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가 오랫동안 거론된 이유다. 이 역시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으로 휘청하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표류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극동은 한·러가 함께 중국을 견제하고 새로운 발전 신화를 만들 공간으로 남아 있다. 언젠가 돌아가야 할 미래의 길이다.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러시아 하기에 달렸다?

한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의 대러 제재에 동참했다. 우크라이나에 간접적으로 포탄을 지원하더니, 이젠 대놓고 러시아 하기에 따라 지원할 수도 있다는 용기 또는 무모(無謀)를 내보인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한국이라는 기회의 창을 성급하게 닫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서로 쉽게 내버리기 어려운 '미래의 이해'가 너무 많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라는 익명에 숨은 윤석열 정부 외교안보 실세는 20일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관련해 "우리가 어떻게 할지는 향후 러시아(가 어떻게 할지)에 달려 있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러시아 국민의 자존심을 무시한 외교적 망언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은 정확히 반대이다. 러시아가 어떻게 할지는 한국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세계의 중심에 미국만 있던 시대는 애저녁에 끝났다. 두 개, 세 개의 태양이 동시에 돌아간다. '익명의 실세'가 "우리가 어떻게 할지는 향후 미국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면 그나마 평가해줄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내놓기 전에 러시아를 제3의 위협으로 규정한 일본이 사할린2 프로젝트에서 생산하는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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