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략폭격기 B-52H가 지난 14일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진 한·미 연합공중훈련에 참가했다. 북한은 같은 날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8형 시험발사에 성공했다면서 발사 동영상을 공개했다. 지난달에는 니미츠 항모강습단과 미 전략폭격기 B-1B가 두 차례 전개돼 한·미 연합훈련을 실시했다. 그러나 핵무기 장착이 가능한 전략무기를 전개하는 것은 미국과 북한뿐이 아니다. 러시아의 행보 역시 심상치 않다.
연례 훈련 돌입한 러시아 태평양함대
러시아 태평양함대는 미사일 발사가 포함된 스냅 연례 훈련(Snap Drills·스냅 훈련)을 앞두고 14일 전 함대 병력에 비상 대기령을 하달했다. 스냅 훈련은 임박해서야 일자를 공개하는 훈련이다. 러시아 국방부는 이번 훈련이 오호츠크해 남쪽과 캄차카반도 남동해안 및 동해로 통하는 피터대제만 일원에서 "적의 공격에 대한 대응력을 시험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밝혔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정기적인 훈련이라면서 군의 전력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지 점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훈련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상대의 국방 태세를 비추는 거울이자, 다시 상대로 하여금 대응케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 유럽 전선에 집중해온 러시아가 동해 북부에서 훈련을 벌이는 것은 동아시아의 군사적 긴장 고조와 무관치 않다. 러시아 전략폭격기 투폴레프(Tu)-95기 두 대는 수호이(Su)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지난해 12월 14일 동해 상공에서 7시간 동안 초계비행을 했다.
태평양함대의 이번 훈련은 일본과 미국을 상대로 한다. 일본은 지난해 말 개정 국가방위전략에서 중국과 북한에 이어 러시아를 세 번째 위협으로 지목한 만큼, 달라진 안보 환경을 감안한 첫 훈련이다. 2022 미국 국방전략은 중국을 제1 위협으로 규정하면서, 러시아를 '급성 위협(Acute Threat)'으로 규정하고 있다. 러시아는 특히 지난해 일본이 독자 제재를 시작하자 북방 4개 섬 문제를 둘러싼 평화회담을 중단했다. 이후 쿠릴열도에 배치된 전투기와 대함 미사일 및 방공시스템을 강화해왔다.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45㎞의 비공개 군사도시 포키노에 사령부를 둔 태평양함대는 미 해군은 물론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에 비해서도 전력이 약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동해와 한반도 안보에 러시아가 분명한 이해당사국임을 웅변한다. 항공모함이 없이 미사일 초계함과 대잠수함(ASW) 초계함, 상륙함, 쇄빙함 등을 보유하고 있다.
핵 추진 전략잠수함·전략 폭격기 보유
핵 추진 전략잠수함(SSBN)은 물론 핵 추진 유도미사일잠수함(SSGN), 디젤잠수함(SSK)도 갖고 있다. 호주가 오커스(AUKUS)에 따라 2030년대에나 갖게될 핵 추진 잠수함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00년대부터 현대화한 잠수함은 중국 해군 잠수함에 비해 감지가 어렵다. Tu-95MS와 Tu-22M3 등 투폴레프 계열의 전략 폭격기도 갖춰놓고 있다. 한국은 러시아를 제2(미국) 또는 제3(일본)의 위협으로 규정한 미·일과 달리 러시아를 위협 또는 주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공개된 '2022 국방백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중국 및 러시아·벨라루스·아르메니아·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 등 6개국 집단안보조약기구(CSTO)의 결속이 강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러시아를 위협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중국과 함께 두루뭉술하게 '주변국'으로 정리했다.
문제는 윤석열 정부 들어 러시아를 주적으로 규정한 미·일과 한·미·일 삼각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입장에선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한·미 또는 한·미·일 군사협력을 보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역으로 한·미·일 군사훈련 또는 군사작전에서 한국이 연루될 위험도 커졌다. 동해상에서 한·미·일 합훈을 하는 경우, 한국은 북한의 위협만 바라보지만, 미·일은 러시아의 위협을 함께 바라보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교부가 지난 3월 31일 발표한 '2023 외교정책 개념(The Concept of Foreign Policy)'의 36번째 항목은 이와 관련, "비우호 국가 및 그들의 연합이 러시아의 해상활동에 대한 일방적인 제한을 두는 행위에 확고하게 대응할 것(counteracting)"을 다짐하고 있다. 전체 76개 항목에 걸쳐 러시아 외교안보 전략의 골자와 지역별 협력국가들을 명시한 올해 보고서는 2016년 보고서에서 별도 항목으로 협력 필요성을 강조했던 '한국' 항목을 뺐다. 모든 유럽국과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등 다른 앵글로·색슨(Other Anglo-Saxon) 국가 및 일본도 별도 항목에서 제외했다. (모스크바 국제관계연구소 올레그 바라바노프 교수)
올해 '외교정책 개념' 별도 항목에서 한국 제외
동맹은 피 후견국 입장에서 '연루'와 '방기'의 위협을 안고 있다. 후견국이 제3국과 벌일 분쟁에 연루될 위험과, 후견국으로부터 방기될 위험을 말한다. 한 국가와 협력 요소를 늘리면,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로부터 갈등 요소를 안게 된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 한국이 처한 전략적 딜레마다. 지난해 미국에 155㎜ 포탄을 수출하고 미국이 자체 비축분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것이나, 폴란드에 국산 무기를 수출하고, 폴란드가 자국의 낡은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한 것 역시 비자발적 또는 자발적으로 전쟁 관계국이 된 것을 의미한다. 미국 정보기관의 기밀문건이 폭로한 대로 포탄 33만 발 또는 50만 발이 미국을 거쳐 다시 전달된다면 러시아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미·러 간의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연적으로 연루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 뒤 미국이 주도한 대러시아제재에 참여해 러시아로부터 '비우호국 리스트'에 오른 국가이다. 유럽연합(EU) 27개국과 일본, 한국 등 모두 49개국이다.
지난 3월 1일 자 기밀문건에서 김성한 국가안보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이 미국을 포탄의 최종사용자(end-user)로 하는 문제를 놓고 우려를 드러낸 까닭이다. 정부는 그들의 갑작스러운 경질 배경을 밝히지 않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나마 합리적인 우려를 내보였던 두 사람이 사라지고,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이 실세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신앙 수준으로 격상된 한·미·일 군사협력
김 차장은 미국의 대통령실 도청이 '명백한 거짓 의혹'이거나, '악의에 의한 게' 아니고, 오히려 한·미 정보동맹에 일본도 포함한 가능성을 시사했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지난 15일에는 미국 측이 도청 의혹과 관련해 "만날 때마다 유감을 표명했다"면서 "양국 간 신뢰와 믿음을 더 굳건히 하는 계기로 삼자는 인식이 확고하게 일치했다"고 말했다. 한·미·일 동맹 탓에 미·중 갈등과 미·러 분쟁에 연루될 위험에 대한 사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확신에 찬 어조로 미루어 한·미 동맹이 신앙 차원으로 격상되는 인상이다. 한국은 갈수록 우크라이나 전쟁의 '부수적 피해국'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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