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러시아 선박에 (남아공의) 무기와 탄약이 적재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본질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주장에 내 목숨을 걸겠다." 루벤 브리지티 남아공 주재 미국 대사(49)가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같이 주장한 것은 지난 11일이었다.
미국은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해군기지에 지난해 12월 사흘 동안 정박했던 러시아 선박 레이디R 호를 주시해왔다. 남아공이 비록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중립을 표방했지만 은밀하게 무기·탄약 지원을 하고 있다는 의심에서다. 그사이 어떤 정보를 취득했는지 브리지티 대사는 언론에 미국은 러시아 선박이 무기·탄약을 실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고 단언했다. 남아공 '뉴스룸 아프리카'가 전한 브리지티 대사의 발언 내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뒤 피아를 확실하게 구분해온 미국은 남아공의 중립노선이 탐탁지 않았음 직하다. 하지만 사안의 진위를 떠나 일개 대사가 주재국 정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중국의 전랑(戰狼·늑대전사) 외교를 방불케 한 무례였다. "목숨을 걸겠다"는 말은 외교관이 구사할 언어가 아니기도 했다. 그런데도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까지 나서 미국은 각국에 러시아를 지원하지 말 것을 계속 촉구해왔다면서 지원 발언을 내놓았다. 남아공 대통령실의 빈센트 마그웬야 대변인은 이에 미국과 남아공은 이 문제에 관한 조사를 벌이기로 합의한 바 있다면서 미국 정보기관은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내놓으라고 점잖게 대응했다. 남아공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비동맹 중립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고도 확인했다.
다음날, 나레디 판도르 남아공 국제관계협력부(외교부) 장관은 브리지티를 초치, 강력한 항의를 전달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과도 통화를 하고 양국 간 전략적 우호 관계를 거듭 확인하기도 했다.
브리지티는 면담 뒤 트위터 메시지를 통해 "판도르 장관과 이야기할 기회를 얻게 돼 감사한다. (어제) 나의 공개 발언이 남겼을 잘못된 인상을 정정한다"고 말했다. 자세히 보면 그가 사과한 것은 표현 방식이었지, 내용이 아니었다. 남아공 정부의 무기 판매 의혹도 접지 않았다. 하지만 남아공 외교부는 성명에서 이를 사과로 인정했다. "브리지티 대사가 선을 넘었음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사과했다"라는 것이다. 남아공 공산당(SACP)은 "우리는 브리지티의 사과를 보지 못했다"면서 그를 추방하라고 촉구했다.
이번 소동은 단순히 한 외교관의 오만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중앙정보국(CIA) 및 국무부 등 본국 정부와 긴밀한 조율 아래 던진 의혹으로 봐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불편한 미국·남아공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뒤 각국을 일렬로 세워 서방 편에 설 것을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한국처럼 입안의 사탕이 되어 미국의 말에 따르는 건 아니다.
남아공은 브릭스(BRICs)의 일원이자, 대표적인 비동맹 국가이다.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에 불참한 것은 물론, 유엔의 러시아 비난 결의에도 기권하면서 전쟁 당사국 간의 타협을 촉구하고 있다. 중립은 미국에 잠재적인 적대 국가로 읽히는 듯하다.
미국은 지난해 12월 미확인 화물을 실은 레이디R의 남아공 사이먼스타운 해군기지 정박과 지난 4월 말 러시아 화물기의 프리토리아 인근 공군기지 기항을 비난하며 무기 전달 가능성을 흘려왔다. 남아공이 지난 2월 러시아, 중국 등과 함께 합동훈련을 한 것도 미국에는 일종의 도발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관심이 남아공에 쏠리는 더 큰 이유는 오늘 8월 남아공 브릭스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브리지티가 촉발한 이번 소동을 양국이 봉합한 것은 남아공 정부가 대러시아 무기 선적 여부를 조사하고 있는 데다가 미국 입장에서도 남아공과 척지는 것을 꺼리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브릭스 주요국을 상대로 한 미국 외교의 오만과 투박함을 보여준 사례다.
브리지티는 어쩌다 외교관이 된 '어공'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무부 아프리카 담당 부차관보를 역임하고 아프리카연합(AU) 주재 대사를 지냈다. 조지 워싱턴대 국제관계대학원(엘리엇스쿨) 학장을 거쳐 지난해 8월부터 남아공 대사를 맡고 있다.
서방 주요 7개국(G7) 대항체로 중국과 러시아가 중심이 되어 외연을 확대하고 있는 브릭스는 미국에 잠재적 위협이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빈 방문 두 달만인 오는 6월 22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국빈 초청하는 것도 임박한 브릭스 정상회의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카린 장-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10일 성명을 내고, "미국과 인도 간 깊고 긴밀한 파트너십과 미국인과 인도인을 연결하는 가족과 우정의 따뜻한 유대를 확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남아공과 브라질, 인도 등 브릭스 주요국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뒤에도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면서 도랑에 든 소처럼 양쪽의 풀을 다 뜯어먹는 실리외교를 펼치고 있다. 러시아는 서방으로부터 전면 배제됐고, 중국은 선택적 탈동조화(decoupling)의 대상이 됐지만, 나머지 브릭스 국가들은 서방과 중국·러시아 모두와 교류를 계속하고 있다. 이번 남아공 정상회의에서는 외연을 대폭 확대할 것으로 전망된다.
남아공의 판도르 장관은 지난 3월 언론 인터뷰에서 "브릭스 가입을 희망하는 12개 나라의 가입 의향서가 내 책상 위에 있다"면서 이들 국가의 가입이 이번 남아공 정상회의에서 논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판도르는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이집트, 알제리, 아르헨티나, 멕시코, 나이지리아 등 7개 국가를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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