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0년이 되는 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경쟁이 진행되는 지정학적 변곡점에서 맞는 정전의 의미는 각별하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미래로 나아갈 실마리를 찾는 작업에서만 현재적 의미를 갖는다. 당시와 지금의 세계정세는 다르다. 하지만 미국·소련/러시아·중국 등 강대국들이 '지정학적 난타전'을 벌이는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때마침 중진 언론인들의 '좋은기사연구모임'이 지난 16일 서울 인사동 정신영기금회관(관훈클럽)에서 연 '한국전쟁' 세미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되돌아볼 계기를 제공했다. 정승욱 전 세계일보 논설위원(국제관계학 박사)과 장정수 전 한겨레신문 편집인이 각각 '한국전쟁 발발 배경과 원인' 및 '한국전쟁의 현대사적 의미와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다. 발표 및 토론 내용을 소개하고 이를 토대로 한반도와 세계를 짚어본다.
맥아더는 처음부터 '압록강 너머'를 노렸다.
1950년 10월 7일 유엔은 한반도 통일민주정부 수립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군의 38선 월경을 허용하는 동시에 남한 또는 북한 정부가 아닌 유엔사 주관하에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국가를 만들라는 결의였다. 이틀 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북한 지도자 김일성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이전에 낙승할 것을 믿고 있었고, 전장의 병사들은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같은 달 중순 "소련이 전 지구적 전쟁을 결심하지 않는 한, 중공군의 (전투) 개입 가능성은 없다. 병참 지원에 그칠 것"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즈음 맥아더는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에 진입할 중공군의 규모를 5만~6만 명 정도로 보고했다.
10월 15일 태평양 웨이크섬에서 트루먼을 만난 자리에서도 "중공군의 참전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동안 알려진 맥아더의 '전술적 오판'이다. 하지만 정승욱 박사는 새로운 가설을 내놓았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정확히 예측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되레 중공군의 개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맥아더가 중공군의 실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증거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10월 13일 자 편지를 들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고무된 이승만이 북진통일 염원을 담아보낸 서신에 대한 답신이었다.
맥아더는 편지에서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면서 "낮에는 숨고 밤에 이동하며 압록강을 건너 40여만 명이 (한반도 북부에)포진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를 모르는 척할 것"이라고 기술했다. 이는 불과 이틀 뒤 웨이크섬 회담에서 군통수권자 트루먼에게 보고한 것과 정반대되는 정세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맥아더는 왜 허위보고를 하면서까지 중공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했을까.
언론인 정승욱은 지도를 넓게 읽을 것을 주문했다. 전쟁의 내적 요인을 걷어내고 외적 요인, 즉 강대국들의 지정학적 게임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배경을 국공내전의 결과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한 동북아 정세에서 찾았다. 장제스의 국민당을 중심에 놓고 동북아 정세를 기획했던 미국과 소련의 예상은 틀렸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 시각에서 한국전쟁 해석해온 오류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기획이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의도대로 한반도 전쟁에 말려들었지만, 이후 자신의 바둑을 뒀다. 신중국 건국 1년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만주의 실권을 회복하고 미국 영향하의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지 않는 게 그가 생각한 실리였다. 맥아더에게 전쟁은 '마르스(전쟁의 신)의 선물'이었다. 1년 전 중국 공산당에 내준 대륙을 되찾거나, 최소한 중공의 허리를 꺾어놓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정승욱은 한국전쟁을 스탈린이 기획한 링에 마오와 맥아더가 올라 싸운 전쟁으로 정리했다. 강대국들에 이승만과 김일성, 남과 북의 역할은 부차적이거나 철저히 도외시됐다.
중국 공산당 연구에 천착한 정승욱은 한국전쟁과 관련한 국내 연구가 주로 미·소 냉전 구조에서 출발한 이유로 "중·소 갈등이 가려진 상황에서 팩트에 기반한 진실보다 보수 정권의 권력 논리에 치우쳤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또 남북 대결의 와중에 김일성을 단죄하려는 수요와 미국적 시각에서 해석하려는 연구 및 정보 부족 탓에 다양한 접근이 안 된 점을 이유로 꼽았다. 정승욱의 발제를 토대로 냉전이 아닌, 강대국 간의 전략적 대결을 열쇳말로 한국전쟁을 재구성해본다.
스탈린은 국공내전이 진행 중이던 1949년 4월 만해도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반대했다. "지금의 국제 상황이 흔들리면 안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대만으로 쫓겨가면서 중국을 둘러싼 소련과 미국의 전략적 대결이 시작됐다. 문제는 만주였다. 만주는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었던 가오강의 영역이자 소련의 입김이 강한 곳이었다. '동북왕'으로 불렸던 가오강은 독자 행정조직을 갖추고 자체 화폐까지 유통시키고 있었다. 마오의 군사력은 아직 동북에 미치지 못했다. 마오가 1949년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은 국가 승인과 함께 만주를 베이징 권력에 묶어두기 위해서였다. 러시아는 2차대전 승전으로 러-일 전쟁에서 상실한 랴오닝성 뤄순과 다롄의 부동항과 만주 철도부설권을 갖고 있었다. 마오는 1950년 1월 2일 타스통신 인터뷰에서 중·소 우호조약 개정과 함께 만주 회복 의지를 강조했다. 가오강은 한국전쟁 뒤 만주의 실권을 빼앗기고 1954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미국 내에선 중국대륙의 손실을 놓고 트루먼 행정부 책임론이 대두되던 시기였다.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한국과 대만을 극동 방어선에서 제외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중·소 동맹을 막기 위해 신중국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트루먼 행정부는 "공산주의로 위장한 러시아 제국주의가 만주를 차지했다"라면서 노골적으로 신중국을 두둔했다. 스탈린으로선 만주를 고집하면 신중국이 미국에 기울 것으로 판단했다. 오판이었다. 마오는 애치슨 선언 발표 다음 날 중국 내 미국 자산의 동결을 지시했다. 미국의 유화 메시지를 거절하는 동시에 스탈린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이었다. 미국은 곧바로 한국과 대만에 원조를 재개했다. 중·소 접근을 차단할 방책을 놓고 미국의 고민이 시작됐다.
"마오를 가둬라"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한 까닭
중·소는 2월 14일 우호동맹조약(신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의 위협에 공동대처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스탈린에겐 마오가 전후 독자노선을 걸었던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티토만큼이나 위험인물이었다. 마오가 1935년 1월 대장정 중 '쭌이 회의'에서 코민테른 군사고문단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부터 '위험인물'로 판단, 경계해왔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국공내전 동안 마오와 장제스의 국민당에 양다리를 걸쳤던 이유다. 몇 차례 마오의 자금, 무기 지원 요청을 거부한 반면에 장제스에게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관동군 격퇴를 위해 소련군을 만주에 끌어들인 것도 장제스였다. 스탈린으로선 접어두었던 한국전쟁 카드를 꺼내 들 상황이 무르익었다.
스탈린은 1월 30일 주북한 스티코프 대사에게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수락한다는 전문을 보내면서 마오에겐 비밀로 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마오의 대만 점령을 위한 군사지원을 거부했다. 대만까지 제패해 신중국이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1949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 온 이후 모스크바 근교 별장에 머물러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기까지 거의 연금되다시피 했다. "하루 종일 먹고 싸고 하는 일밖에 없다"며 한탄했다. 스탈린은 만주를 되찾기 위해 온 마오의 속내를 알고 일부러 홀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에 접근하고,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기지화 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마오에게 만주를 넘겨주고 신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미중이 한반도에서 대결하도록 기획했다.
미군 출현하자 곧바로 파병 준비 나선 마오
스탈린은 4월 30일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남침을 최종 승인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마오의 동의를 받으라"고 당부했다. 5월 13일 베이징을 찾은 김일성으로부터 스탈린의 남침 승인 사실을 전해들은 마오는 깜짝 놀라 스탈린에게 서신으로 확인 요청을 했다. 스탈린은 답신에서 "중국 동지가 동의 안 한다면 보류하겠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마오는 스탈린의 책략을 파악하지 못했다. 마오는 남침을 만류했지만, 이미 스탈린의 승락을 받은 김일성은 "중국 지원이 필요없다"고 단언했다. 마오에게는 한국전쟁 자체보다 미군 개입이 더 신경쓰였다. 김일성에게 "미국이 개입하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중국의 고민이 시작된 지점이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한국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이 한반도에서 발이 묶이는 상황을 노렸다. 미국이 3차 대전을 일으킬 여력이 없어진 틈을 타 아직 자리가 덜 잡힌 동유럽 사회주의 블록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클레멘트 고트발트 체코 공산당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1950.8.27)에서 "한국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과 싸우게 하면 미국이 3차대전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고, 이는 유럽 사회주의를 강화하는 시간을 벌게 됨을 의미한다”면서 속내를 내보였다. 소련이 6월 28일 유엔 안보리의 유엔군 파견 회의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면서 슬쩍 내비친 한국전쟁 기획 의도였다.
스탈린은 5월 29일 모든 전쟁물자의 북한 이송을 끝내고, 독‧소 전쟁의 영웅 바실리예프를 북한에 파견했다. 김일성은 6월 16일 남침 준비 완료 전문을 보냈다. 중국 내에선 미군의 폭격 및 미·중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벌어졌다. 7월 2일 미군 스미스 부대가 부산에 상륙하자 마오는 동북변방군 창설을 지시, 파병 준비에 착수했다. 스탈린의 한 수가 먹힌 것이다. 스탈린은 동북변방군 창설을 평가하며 공군 지원을 다짐했다. 그러나 3달 뒤 정작 중국이 참전하면서 공중지원을 요청하자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미뤘다. 전쟁을 배후 조종하면서도 존재를 숨기려는 게 소련의 일관된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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