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정전70년] 트루먼이 '북한의 남침'을 기다린 까닭

본문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0년이 되는 날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간 '지정학적 난타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맞는 한국전쟁의 의미는 각별하다. 때마침 중진 언론인들의 '좋은기사연구모임'이 지난 16일 서울 인사동 정신영기금회관(관훈클럽)에서 연 '한국전쟁' 세미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되돌아볼 계기를 제공했다. 정승욱 전 세계일보 논설위원(국제관계학 박사)과 장정수 전 한겨레신문 편집인이 각각 '한국전쟁 발발 배경과 원인' 및 '한국전쟁의 현대사적 의미와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다. 발제 내용을 토대로 한반도와 세계를 짚어본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미군참전기념비와 함께 세워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 동상. 2020..4.21. 연합뉴스

여행이 끝나자 새로운 길이 열렸다. 그 길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한반도가 일제에서 풀려나 독립공화국을 꿈꾸던 끝에 분단의 여정을 열었다면, 세계사적으로는 냉전의 긴 여정이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세계대전의 전우였던 미국과 소련이 갈라서고, 중국이 새로이 등장한 출발점이었다. 여전히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지정학적 맥락의 '오래된 현재'다. 장정수 전 편집인이 한국전쟁의 의미를 "정전협정 체제 70년의 시작이자, 동북아 냉전체제의 쐐기돌(Key Stone)"이라고 규정한 이유다. 그는 한국전쟁이 분단체제와 작금의 미·중, 미·러 갈등으로 이어지는 분쟁의 연속성에 주목했다.

냉전 체제의 쐐기돌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해리 트루먼 미국 행정부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의 하나는 대만해협 봉쇄였다. 1950년 6월 28일 필리핀과 홍콩 해역에 있던 미 해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이동시켰다. 두 가지 목적이었다. 마오쩌둥의 대만 침공을 막는 동시에, 장졔스의 중국 침공을 저지하려는 포석이었다. (서상문 <모택동과 6·25전쟁>)

군인 더글라스 맥아더가 처음부터 '압록강 너머'를 노렸다면, 정치인 트루먼은 한국전쟁을 한반도에 제한하려 한 것이다. 요시프 스탈린과 트루먼은 암묵적으로 한국전쟁이 3차대전으로 비화하는 것을 경계했다.

정전협정을 항구적인 평화헙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54년 4월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렸던 정치회의는 끝내 결렬됐다. 미국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9월 8일 일본과의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서둘러 체결했다.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도 독립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남북한을 제외했다. 중국은 중공과 대만의 대표성을, 또 남북한의 대표성을 문제 삼아 모두 제외했다. 일제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국가들을 제외함으로써 지금까지도 태평양전쟁이 남긴 불씨가 동아시아 영유권 분쟁의 뇌관으로 남았다. 무엇보다 독도를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서 제외했다.

 

요시프 스탈린의 생전 사진들이 그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의 스탈린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김진호

중공·대만의 불참은 해양 영유권을 둘러싼 남중국해 분쟁으로 되살아났으며, 중·일 간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 분쟁도 남겼다. 소련은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교부 차관이 대표로 참석했지만, 조약 초안을 놓고 미·영과 팽팽하게 대립하다가 결국 서명하지 않았다. 미국은 소련과 일본 간에도 분쟁의 섬을 선사했다. 일·소는 1956년 전쟁상태를 종식하는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선언문에서 소련은 쿠릴열도 남단의 2개 섬(하보마이, 시코탄)을 돌려주겠다면서 반환 시점을 '평화조약 체결 시점'으로 못 박았다. 그러나 미국이 "두 개 섬을 받으면,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지 않겠다"고 협박하면서 좌절됐다. (마고사키 우케루 <일본의 영토분쟁>)

냉전 또는 미국 패권의 설계도

트루먼도 지구본을 돌렸다. 소련과 단기적으로 제한전을 택했지만, 장기적으론 확전, 즉 냉전을 기획했다. 스탈린이 동유럽을 보고 한국전쟁을 기획했다면, 트루먼은 미국이 세계에 군림하는 구조에 집착했다. 한반도 분단을 유지한 채 세계 패권을 노리는 게 트루먼의 계획이었다. 그 설계도가 바로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7일 미 국무부에 작성케 한 66쪽의 비밀문건, '국가안보(NSC)-68'이다. 스탈린과 마오가 그랬듯이 트루먼의 안중에도 한반도의 운명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한반도와 관련한 트루먼 행정부의 은밀한 움직임은 문서 기밀 해제로 상당 부분 밝혀졌다.

odd man out은 한 그룹에서 동전을 던져 1명을 선택 또는 제외하는 게임이다. 왕따 또는 따돌리기의 뜻이다.

미국은 1949년 6월 극비작전계획 SL-17을 세운다. 북한군이 남침하면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한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하고 신남포와 원산 두 곳에 상륙하는 북진 계획을 담고 있다. 개전 6일 전인 1950년 6월 19일에는 개정한 SL-17을 회람시켰다. 전날 김일성이 남침 준비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신남포‧원산 상륙을 제외하고 대부분 실제 전쟁에서 구현된 계획이다. (리처드 쏠튼(R. Thorton) <따돌리기(Odd Man Out) 트루먼, 스탈린, 마오와 한국전쟁의 기원(2001)>)

기밀 해제된 문건으로 한국전쟁을 추적한 쏠튼에 따르면, 트루먼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마오와 김일성 간 교신내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정보의 실패'가 아니라, 실패를 위장했다는 말이다. 트루먼은 전쟁을 기다렸다는 듯이 개전 48시간 내 수소폭탄 개발과 새로운 대외전략(NSC-68)의 실행을 지시했다. 전쟁은 국내 정치의 연장이다. 트루먼과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민에게 국방예산을 늘리고, 소련과의 냉전에 돌입할 필요성을 각인시킬 계기가 필요했고, 그 계기를 한반도에서 찾은 것이다. 다만 맥아더를 비롯한 미국 내 일각의 중국 본토 수복론에 명확히 선을 긋고, 전쟁을 철저히 한반도 안에서 끝낼 계획이었다.

트루먼은 스탈린의 심중을 알고 있었다

트루먼에게 한국전쟁의 용도는 냉전에 돌입할 정치적 명분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의 방아쇠는 스탈린이 당겼다. 언제, 어떻게 싸울지도 그가 정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더 장기적인 그림을 그렸다. 폴 니츠 당시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이 작성을 주도한 NSC-68은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세계 패권국가로 군림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냉전의 설계도였다. 당시 미국 국방예산의 상한선은 연 125억 달러였다. 보고서는 이를 400억~500억 달러로 3배 이상 늘릴 것을 제시했다. 국방부가 되레 주저했던 이유다. 보고서는 압도적인 군사력이 필요한 이유로 △서반구와 핵심 동맹국 지역의 방어 △ 승전을 준비하는 동안 움직이는 기지의 제공·보호 △소련 전쟁 능력을 파괴하기 위한 공격적인 작전 수행 △통신망의 보호 및 관리 △동맹국에 지원 제공 등을 꼽았다.

트루먼이 NSC-68을 곧바로 채택한 건 아니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회부해 재검토를 지시했지만 두 달이 넘도록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에 북한군의 남침이 감행되자, 트루먼은 망설임 없이 채택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후일 "코리아(전쟁)는 행동으로 이어질 자극을 제공했다"고 술회했다.

1989년 5월 23일 시위 군중이 중국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걸린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가리고 있다. 톈안먼 사태 34주년을 맞아 AFP 통신이 전송한 자료사진이다. 2023.5.31. AFP 연합뉴스

서방의 안보 공약 믿은 폴란드의 비극

NSC-68은 '소련 봉쇄(containment)'를 주장한 조지 케넌 전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의 제안과 정반대였다. 1947년 '긴 전보(Long Telegram)'를 작성한 그는 '봉쇄'의 의미를 '면밀하게 계산된, 점진적인 강압 또는 강제'로 정의했다. 미국은 이미 세계 인구의 6.3%로 세계 부의 50%를 갖고 있기에 국방예산의 증가 없이 소련과의 불균형을 유지만 해도 된다는 제안이었다. 그의 탁견대로 소련은 전성기에도 미국 국력의 40% 대에 불과했다. 케넌은 미국 대외정책이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날 것을 역설했지만, 미국 내 매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전을 선택했다.

NSC-68은 지금까지 미국 대외전략의 척추를 이룬다. 베트남전쟁을 비롯해 이후 미국이 벌인 군사 행동의 뿌리였다. 탈냉전 이후 미국이 처한 안보상의 위협은 줄었지만, 미국의 군사적 대응은 되레 늘었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에서부터 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미국의 대응은 NSC-68이 출발점이었다. (앤드루 바체비치 보스턴 대학 교수)

한국전쟁에서 비롯된 미국의 군사주의는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함께 분단체제를 구성하는 양대 축이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해협에서의 군사적 긴장 고조는 한반도의 안보에도 짙은 먹구름을 드리운다. 이럴 때 대한민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윤석열 정부는 한미 동맹과 한미일 군사협력에 몰방하고 있다. 미국의 선의에 기대 '가짜통일'을 꿈꾸었던 이승만조차 당시 중공과 소련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한다.

언론인 장정수는 미국과 서방을 믿었다가 배신당한 폴란드의 비극을 교훈으로 제시한다. 2차 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됐다. 폴란드는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안보 공약을 과신, 나치 독일에 강경 대응했다. 하지만 정작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가 침공을 감행하자 서구 열강은 '침공 시 지원' 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케넌의 경고대로 현실정치에서 '가치'는 늘 위험하다.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의 전략이 한반도에서 충돌할 때 벌어지는 '미래'를 보여준다. 안보도, 평화도 스스로의 몫임을 일깨우는 본보기. 정전 70주년을 맞아 돌아본, 한국전쟁의 현재적 의미다.

관련글 더보기